멀리서 보면 이탈리아는 바다 위에 반쯤 빠져나온 한 자루의 긴 칼날 같다. 북쪽은 알프스라는 단단한 손잡이에 걸려 있고, 남쪽은 지중해 깊숙이 잠겨 있다. 아드리아해와 티레니아해가 반도의 좌우를 부드럽게 감싸고, 남쪽 끝자락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같은 섬들이 바람과 파도의 요새처럼 떠 있다. 이 길고 굽은 지형은 고대부터 오늘까지 수많은 전쟁을 불러왔고, 수많은 평화를 다시 꿈꾸게 했다.
고대 로마제국의 위대함은 바로 이 지리에서 출발했다. 지중해 한가운데에 반도를 길게 드리운 로마는 강력한 육군과 혁신적인 해군으로 카르타고(튀니지를 중심로한 북아프리카와 중동 일부에 형성된 국가)를 꺾고, 북아프리카에서 에스파냐(스페인)까지 뻗어갔다. 알프스가 방패였다면 바다는 무기였다. 길 위에 돌을 깔고 도로를 만들었고, 바다 위에 군선을 띄워 지중해를 내해처럼 다스렸다. 지형을 품에 안은 옛 제국은 사라졌지만 그 길과 항만, 요새와 성벽은 지금도 살아 숨 쉰다.
이탈리아의 해안선은 유럽에서 가장 긴 축에 속한다. 만과 반도가 교차하고, 모나코와 접경인 리구리아 해안에서 최남단의 시칠리아까지 작은 항구와 큰 항만이 파도 속에 숨듯 이어진다. 고대 로마는 이 해안선을 병영 삼아 포에니 전쟁을 치렀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트리레임이라 불린 전투 갤리선을 띄운 로마는 ‘코르부스(Corvus)’라는 접이식 다리를 달았다. 이 다리를 적선에 걸고, 바다 위에서 육상전처럼 싸웠다. 이 전쟁은 로마가 지중해를 '로마의 바다(Mare Nostrum)'로 부르게 한 계기가 되었고, 군사력과 특징적 지리가 결합하면 얼마나 강력해 지는지 처음으로 보여줬다.
*트리레임 : 노가 3줄로 배치된 형태로 고대, 중세에 걸쳐 지중해를 지배한 범선, 영화 트로이 목마의 범선과 유사
10세기 전후 중세로 오면 알프스산맥 접경인 제노바와 베네치아 같은 해상 공화국이 바다를 다시 요새로 삼았다. 제노바는 서부 지중해의 무역과 해상 전투를, 베네치아는 동부 지중해를 장악했다. 갤리온(중세를 대표하는 범선으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범선과 유사)은 곡사포를 달아 해적선을 추격했고, 상선을 호위하며 상업과 군사력이 한 배에 올라탔다. 이 두 도시는 바다 위에서 무역로를 지켰고, 해양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었다.
튼튼한 해안선 방어체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은 언제나 이탈리아의 것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시칠리아 상륙작전은 이탈리아의 견고했던 지중해 제해권을 잃고 국운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탈리아의 총리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독일, 일본과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1943년 연합군은 시칠리아의 만곡진 해안과 절벽을 활용해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기습적인 함포 사격과 공중폭격으로 상륙지점에 있는 이탈리아 요새를 초토화했다. 이어서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상륙정을 해안으로 보내면서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작전은 큰 피해 없이 성공했다. 시칠리아는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유럽 본토로 진격하는 교두보였고, 독일군이 지중해 남부를 잃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상륙작전을 통해 지중해의 제해권을 쟁취한 연합군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는데 자신감을 갖게 했다.
*추축국 : 1936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B. Mussolini)가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다'라고 연설한 데서 유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동맹)
이탈리아 북쪽 알프스는 유럽과 반도를 가르는 첫 관문이었다. 높고 단단한 이 산맥은 로마시대에도, 중세에도, 현대에도 언제나 첫 방패였다. 하지만 방패는 종종 문이 되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고대 카르타고 군사 지도자)은 코끼리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스파냐(스페인)) 피레네 산맥을 지나 알프스를 넘었다. 그리고 15년 동안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숨통을 조였다. 로마는 끝까지 항전했고 기어이 지중해를 건너 카르타고의 중심인 북아프리카를 역공하면서 코끼리 부대를 몰아냈다. 그러나 한니발의 침략 경로는 후세에 ‘불가능을 깨는 길’로 남았다.
근세로 오면 1800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세력을 약화시키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소수의 병력과 함께 몽블랑산의 험준한 그랑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군사적 업적뿐만 아니라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명언과 함께 나폴레옹의 명성을 높이고 프랑스혁명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와 피에몬테를 거머쥐고, 도시국가들을 재편했다. 이 침공은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길과 평야를 통해 유럽 권력의 균형을 흔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알프스 산맥과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을 무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과 이탈리아와의 치열한 산악 참호전이 벌어졌다. 이탈리아는 협상국(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도와 참전한 국가)으로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참전했다. 이탈리아 산악 전선은 알프스가 단순한 벽이 아니라, 포대를 숨긴 요새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가파른 빙벽과 계곡엔 참호가 파이고, 병사들은 곡사포와 기관총을 산비탈에 숨겼다. 스키와 삽, 바위와 눈은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과 참호전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전쟁 양측의 전투력을 소진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면서 전쟁의 종결을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펜니노 산맥은 북에서 남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척추처럼 뻗었다. 산은 높지 않지만 길었다. 중세 시대 제노바, 볼로냐, 피렌체 같은 도시국가들은 아펜니노 산맥의 계곡과 고개를 경계 삼아 서로를 견제하고 성채를 높였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구조는 지형 덕분에 분열과 연맹을 반복하며 생존했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독일 본토 침공을 막기 위해서 아펜니노 산맥에 ‘구스타프 라인’을 구축했다.(구스타프 라인 독일군 최고 사령관 중 한 명인 구스타프 폰 포겔러의 이름에서 유래) 산길과 협곡, 구릉마다 참호가 이어지고, 88mm 대공포가 전차를 저지했다. 구스타프 라인은 아펜니노 산맥을 자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연합군의 진격을 늦춘 교묘한 전략이었다. 작전결과 연합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구스타프 라인은 돌파되었다. 아무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도 강력한 의지를 갖춘 압도적인 군사전력은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북이탈리아를 가로지르는 포강은 알프스를 넘어온 모든 군대가 만나는 병참의 강이었다. 고대 로마는 이 강을 따라 군단을 이동시켰고, 평야의 곡물을 실어 날랐다. 중세 베네치아는 운하를 뚫어 상선과 군선을 동시에 띄웠다. 운하는 상업의 혈관이자 전시에는 무기를 나르는 신경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군은 포강 북쪽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 연합군은 포강 다리를 폭파하고 다시 부교를 만들어 탱크를 밀어 넣었다. 이 강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라 전선을 나눈 피의 강이었다.
베네치아 운하는 바다와 육지를 이어주었고, 전시에는 무기와 식량, 화약과 병사를 실어 날랐다. 포강 운하 또한 물자와 군수품이 끊기지 않게 하는 동맥이었다. 운하는 군사 거점을 연결하고 항구를 열었다. 강과 운하는 언제나 이탈리아의 병참선이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 중심부에 놓여 유럽, 아프리카, 중동을 잇는 교차로였다. 이 지리적 이점은 고대부터 무역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작용했지만, 동시에 침략과 분쟁의 무대가 되었다. 동서로는 동방무역로와 실크로드의 끝자락이었고, 남북으로는 북아프리카와 발칸(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튀르키예 등의 유럽 남동부)을 향하는 통로였다. 이러한 복잡한 지형과 지역 갈등은 오늘날까지 문제를 남겼다. 다양한 자연환경은 지역마다 경제적 격차를 키웠고,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는 경제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EU 통합의 물결 속에서도 이탈리아는 여전히 북과 남, 도시와 농촌의 균열을 껴안은 채 살아간다. 지형은 여전히 무역과 안보의 장점이지만, 이 다양성은 때로는 약점이 된다.
오늘의 이탈리아는 여전히 지중해의 문 위에 서 있다. 북아프리카 난민선은 시칠리아로 몰려오고, 해저 가스관과 데이터 케이블은 지중해를 가른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으면 새로운 경로와 갈등이 열릴 것이다. 드론과 위성이 바다를 지키고, 사이버 전장이 항구와 운하를 대신해 무기가 된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남유럽 방벽, EU의 전초기지로서 이탈리아는 다시 지형을 전략으로 삼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