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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4. "영국" 바다로 둘러싸인 제국!

by 김장렬
영국의 지리

바다는 영국을 품었고, 영국은 바다를 품었다. 이 섬나라는 자신이 딛고 선 땅보다도 수평선 너머의 바람과 파도에 더 많은 것을 걸었다. 그들은 대륙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으면서도, 한 번도 그곳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립은 때로는 축복이었다. 침략자를 막고, 도망자에게는 피난처가 되었으며, 제국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세계로 나아가는 출입구가 되어주었다.


영국은 대서양과 북해 사이에 잉글랜드가 중심인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을 비롯한 브리튼 제도에 자리 잡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도버 해협은 대륙과의 물리적 경계인 동시에 심리적 경계가 되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구성된 이 나라는 각기 다른 지형과 민족의 결합체였으며, 자연스럽게 방어와 통합이라는 이중 과제를 안고 출발한 국가였다.


영국의 해안선은 거칠고 복잡하다. 깊은 만과 천연 항구가 곳곳에 존재하며, 북쪽의 스코틀랜드 해안부터 남쪽의 콘월반도 해안까지 바다는 단순한 경계가 아닌 국토의 일부였다. 템스강 하구의 런던은 내륙과 해안을 잇는 허브였으며, 영국 해협의 입구인 포츠머스와 플리머스는 왕립 해군의 핵심 기지로 자리 잡았다.


국의 왕립 해군은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파견한 세계 최고의 무적함대를 도버 해협에서 물리치며(칼레 해전) 해양지배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1805년 스페인의 대서양 남서해안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왕립 해군은 나폴레옹이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구성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완전히 격파하며, 영국을 해양패권 국가로 우뚝 세웠다. 이 해전은 유럽 대륙의 통합에 대한 영국의 저항이었으며, 제해권의 우위가 곧 세계적 영향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승리였다.

칼레 해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영국 본토를 압박하기 위해 해상 봉쇄와 U보트 작전을 펼쳤다. U보트 작전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배의 종류와 국적 상관없이 영국으로 이동하는 모든 함선을 경고 없이 격침시켰다. 특히 민간 선박까지 표적이 되며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영국은 복잡한 영국 해안선의 지리적 특징을 활용해서 해상 호송 작전, 대잠수함 작전, 해상 감시망, 기뢰 설치 등의 대응으로 이를 무력화하며 전세를 뒤집었다. 제해권을 지키는 데 성공한 영국은 연합군의 물자 흐름을 유지했고,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외교적 기회로까지 연결시켰다.

U 보트를 추격하는 대잠수함 작전

영국의 군사 전략적 해안선 운용 정점은 1944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이 나치 독일 치하의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유럽을 탈환하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개시한 작전) 영국 남부의 대형 항구에서(플리머스, 본머스, 포츠머스, 브라이턴 등) 출발한 연합군 15만여 명의 병력과 7,000여 척의 군함이 영국 해협을 건넜다. 독일군이 점령하여 요새화된 해안방어 체계를 무력화시키며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을 확보했다. 이 작전은 해군력과 지형, 정보의 결합이 만들어낸 승리의 교과서로 불린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유럽을 해방시키는 결정적 작전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영국의 해양 지배력은 해군력뿐 아니라 정보, 산업, 외교가 결합된 다층적 전략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힘의 근간에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해군기지와 무역항이 있었으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전 지구적 해양전략의 실현이었다. 인도, 홍콩, 말타, 지브롤터, 포클랜드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바다 위에 자신의 제국을 지었다.


내륙으로 시선을 옮기면, 남부 잉글랜드의 평탄한 지형과 북부 스코틀랜드의 험준한 고지대는 전혀 다른 군사적 전통을 낳았다.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영국의 내륙 도시들은 군수산업의 중심이 되었고, 전시 동원력의 기반이 되었다.


웨일스와 잉글랜드 접경의 버밍엄과 맨체스터 같은 도시는 전쟁물자의 공급창고였고, 이를 잇는 철도망과 버밍엄 운하망은 전략적 병참선이 되었다. 반면 스코틀랜드 고지대는 방어 거점과 전통 보병 중심의 전술이 살아 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형의 분화는 전쟁 시에 각 지역의 역할을 특화시켰고, 이는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지형 및 지역별 특화되어 있는 영국군을 다양한 전략과 전투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유연한 전력 운용으로 이어졌다. 또한 웨일스와 북부 잉글랜드의 광산지대는 장기전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했으며, 지역 기반의 방위산업이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 있는 구조로 성장했다.

영국의 내륙

강과 운하도 영국의 군사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템스강은 단순한 수로가 아니라 왕권과 행정, 산업과 무역의 축이었다. 런던이 전략적 중심지로 부상한 것은 템스강 덕분이었다. 해군 함정이 도심까지 진입 가능하다는 점은 방어와 통제에 큰 이점을 주었다. 그 외에도 중부 머지강과 북부 클라이드강은 항만도시 리버풀과 글래스고의 성장 기반이 되었고, 산업화 시기 병참로로 사용되었다. 이 강들은 운하와 연결되면서 내륙 수송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그랜드 유니언 운하 등은 전시 군수 물자 이동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했다. 수로망은 폭격에 취약한 철도망의 대체로 활용되며, 전략적 이중성을 지닌 기반시설로 인정받았다.

템스강

외교적으로, 영국은 항상 섬나라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왔다. 대륙 국가들의 직접 충돌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균형자 역할을 하며,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 또는 후원자로 나섰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이나 제1·2차 세계대전 모두에서 반복되었다. 영국은 전면전에 빠르게 진입하지 않고, 전략적 후방에서 정보와 해군, 공군을 활용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후방으로 남았다는 것은 단순히 안전함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유사시 유럽 대륙에 병력을 투사할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본토의 산업력을 전쟁에 집중시킬 수 있는 여건을 의미했다. 섬의 고립성은 초기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현대전에서는 외교적 고립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유럽 연합에서 탈퇴한 브렉시트(Brexit)는 경제적, 외교적 고립의 상징이 되었고, 유럽 대륙과의 협력 체계에서 벗어난 영국은 이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다.

미래의 영국은 여전히 전략적 유연성을 가질 것이 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핵심 동맹국이며, 전 세계에 남은 해군 기지망과(지브롤터(지중해), 키프로스(동지중해), 포클랜드 제도(남대서양), 싱가포르(동남아시아), 페르시아만(중동) 등) 정보력, 영연방이라는 외교자산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제 전략의 중심은 해군력 단독에서 다차원 안보체계로 이동하고 있다. 사이버 안보, 우주 감시, 북극 항로의 개방, 인도-태평양 전략 등 새로운 '지리'가 탄생하고 있다. 석탄과 철로 제국을 세웠던 나라가, 이제는 데이터와 위성으로 안보를 설계하는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영국은 과거의 유산을 활용하면서도 미래에 맞는 새로운 선택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전략적 유연성이며, 바다와 대륙 사이, 고립과 연대 사이를 오가는 영국의 전통적 자세이기도 하다.

영국이 구상중인 미래 드론형 무기체계

영국의 지리는 단순한 섬의 경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의 지형이었고, 방어와 확장, 고립과 개입이라는 전략적 스펙트럼을 오가는 중심이었다. 이제는 그 지형을 다시 바라보고, 더 넓은 세계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결정할 시간이다. 바다는 여전히 영국을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그 바다 너머로 나아가는 방법은 시대마다 달랐다. 영국은 지금, 또 다른 항해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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