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바스

3

by 박규동


이슬 맺힌 아침, 메피스토에게 모세와의 외출은 어색한 일이었다.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그는 거실에서 모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밤새 쏟아진 비가 그친 후의 아침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햇빛은 젖은 세상을 말렸고, 풀과 나무는 반짝였다. 메피스토가 보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오전이었다. 그는 모세의 준비가 길어지는 것에 지루함을 느꼈다.


모세는 머리를 가꾸고, 옷을 고르고, 어떤 향수를 뿌릴지 긴 시간을 보냈다. 메피스토는 그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있나.'


연예인처럼 꾸며 입고 나온 모세의 모습에 메피스토는 웃음을 지었다.


“교복은? 오늘 학교는 아예 안 갈 생각이야?”

“아저씨, 교육이란 게 뭔지 이야기해봐요.”

“뭐?”

“21세기의 학교, 학생들이 겪는 교육이 뭔지 말 해보세요. 빨리요.”

“기득권은, 자신들을 쓰러트릴 수 있는 정보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지 않아. 너희 모두를 똑같은 존재로 빚어내는 곳이지. 누가 말을 잘 들을 노예인지. 누가….”


모세는 메피스토의 말을 끊고 신발을 신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봐요. 그럼 안 가도 되죠?”


메피스토는 당돌한 모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현관이 열리자 빛이 쏟아졌다. 메피스토는 하늘로 고개를 들어 눈을 감았다. 그는 따스함을 만끽했다. 모세는 그런 메피스토의 모습이 우스운지 바라보았다.


“뭐 하세요?”

“다들 내가 빛을 싫어한다고 오해하거든. 그런데 나는 지구의 햇빛이 좋아.”


모세는 그런 메피스토의 팔을 잡고 지하 차고로 향했다. 어머니의 자동차 앞에 멈춰 선 모세가 메피스토에게 차 키를 던졌다.


“운전 좀 해주세요.”

“내가 네 부하야?”

“그럼 그냥 집에 들어갈까요? 오늘도 온종일 천장만 보고 누워있으시게요?”


메피스토는 한숨을 내쉬며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옆자리에 앉은 모세는 안전띠를 매며 미안한 기색 없이 변명을 내뱉었다.


“저는 미성년자잖아요. 제가 운전을 할 수 있으면 당연히 제가 했죠.”

“알았으니, 주소나 불러.”


메피스토와 모세가 탄 검은 자동차는 차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지하에서 쏟아져 나왔다. 메피스토는 자동차 핸들에 붙은 여러 버튼에 익숙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마차라는 게 있었거든. 한 번은 공작의 아이를 훔치려 했는데.”

“저기서 우회전이요.”


모세는 메피스토의 잡담에는 관심이 없는 듯 방향을 지시했다. 메피스토는 긴장한 듯 보이는 모세의 모습에 자신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부촌에서 벗어난 자동차는 험악하고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막는 다른 차들의 압박에 메피스토는 지옥 불이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모세는 메피스토의 열기에는 무관심했다.


“저기에 세우면 돼요.”

“여기 주차하면 안 되는 곳 같은데.”

“아저씨 악마 맞아요?”

“말했잖아. 악마라는 게 나쁜 행동을 해서 악마가 된 게 아니라고. 게다가 내가 양심에 찔려서 이러겠어? 차 빼달라고 전화 오면 귀찮으니까 그렇지.”


모세는 메피스토의 불평이 한심한 듯 먼저 차에서 내렸다. 모세를 따라 내리는 것이 메피스토에게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부하 맞네.'


메피스토는 한숨을 쉬며 모세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그들은 허름한 컨테이너로 지어진 집들이 가득한 골목에 들어섰다. 메피스토는 길가에 놓인 연탄을 바라보았다.


'요새도 연탄을 때는 곳이 있나.'


그는 자신의 권능을 시험하기 위해 연탄에 불을 붙이려 집중했다. 그러나 차갑게 비에 젖은 연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모세를 따라 걷는 골목에는 병든 자들이 많았다. 메피스토는 그들의 몸과 마음의 병이 빈곤이라는 구조적 폭력에서 온 것을 간파했다. 그들이 걷는 길가는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했다. 모세와 메피스토는 거리의 추함을 피해 허름한 주택의 지하로 향했다.


모세는 헛기침을 한 후, 낡은 철문을 두드렸다.


“가인아. 나 모세야.”

“잠시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는 기침 소리가 섞여 있었다. 지하의 철문이 열리자 메피스토는 모세와 동갑인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문손잡이를 쥔 여자아이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메피스토를 쳐다보았다. 모세는 바깥이 추운 듯 편하게 집에 들어서며 신발을 벗었다.


“신경 쓰지 마. 우리 교회 다니는 아저씨인데 잠깐 우리 집에서 얹혀살아.”


여자아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외국인이세요?”

“안녕.”


메피스토 역시 검은 신발을 벗고 집안에 들어섰다. 집에는 어른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모세의 집과 같으면서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메피스토와 모세는 안방 바닥에 앉아 무릎 위에 이불을 덮었다. 메피스토는 가인을 바라보는 모세의 눈빛을 보고 미소를 숨겼다.


'모세는 이 여자아이를 좋아하는구나.'


가인은 인스턴트커피 석 잔을 가져와 그들과 함께 바닥에 앉았다. 모세는 어색한 듯 말을 꺼냈다.


“교복 입었네? 학교 가려고?”

“응. 가려고 했는데, 아침에 발작이 와서.”


메피스토는 그곳에서 마시는 커피가 달콤하기만 했다. 그는 아무런 눈치 없이 가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발작?”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눈치를 보내려 했지만, 메피스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를 부하처럼 부린 것에 대한 작은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가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친절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제가 머리가 아파서요. 발작이나 경련이 자주 일어나요. 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기는 했는데, 너무 독해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내가 괜한 질문을 했네. 미안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러면 약을 먹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거야?”

“있기는 한데, 아니에요. 없다고 봐야죠.”


가인이 커피 잔을 두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을 때, 메피스토는 모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나한테 부탁할 거 있지.”

“뭐가요?”

“네 눈에 내가 아주 바보 천치로 보이지?”


가인이 돌아오자 그들은 급히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하는 척했다. 가인의 눈에 그들의 관계는 이상하기만 했다. 가인은 돌려 말하지 않고 물었다.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메피스토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모세의 눈치를 살폈다. 거짓말이라도 지어내 달라는 눈치였다. 이에 모세는 메피스토의 눈빛을 알아챘다는 듯이 자신 있게 가인에게 답했다.


“이 아저씨 이름은 메피스토. 악마야. 지옥에서 왔대. 뭐, 당연히 안 믿을 거 알아. 그런데 믿게 안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


가인은 모세의 말이 농담인듯 웃기에 바빴다. 메피스토 역시 억지로 그들의 웃음에 맞춰 따라 웃었다. 가인은 모세의 농담에 장단을 맞춘다는 듯이 모세에게 물었다.


“악마면 나쁜 존재 아니야? 그렇게 안 나빠 보이시는데? 잘생기셨어요.”

“우리가 아는 선과 악은 거짓에 불과하대.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이 뭐라더라…. 자신들은 신과 인간을 잇는 정령과도 같은 존재인데,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기 때문에 성경에 악마라고 적혀있는 거래.”

“그래. 아무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모세는 가인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제 슬슬 가야겠다. 가인아 너 조금 있다가 학교 갈 거지?”

“응. 오후 수업은 들어야지.”

“그럼 나도 갈게.”


비에 젖고 낡은 철문을 열고 나온 그들에게 햇빛이 쏟아졌다. 가인의 집을 나서자마자 그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피우던 담배를 길에 던진 메피스토는 비에 젖은 바닥에 덧칠된 햇볕을 바라보았다.


'정원에서 맞이하는 햇살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네. 하나도 아름답지 않아.'


차갑고 습한 차에 오른 메피스토가 모세에게 물었다.


“이게 증거야? 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힘든 생활을 이어가는 게?”

“아니요.”

“그러면?”

“가인이가 발작을 멈출 유일한 방법이 있기는 해요. 그런데 그게 불법이라 그렇죠.”

“그게 뭔데?”

“대마초요. 이미 미국에서는 가인이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대마초에서 나오는 성분으로 치료받고 있어요. 그런데 가인이가 여기서 그걸 사서 이용해봐요. 결국 감옥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것 말고는 달라지는 게 없는 거죠.”


메피스토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어쩌면 처음으로 모세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었다. 메피스토가 시동을 걸고 출발할 때 모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류회사와 담배회사의 로비 때문에 의료용 대마초도 절대 합법화가 될 일이 없다네요. 우리나라에서는.”

“너희 부모님이 주류회사 사장님 아니야? 어쨌든 이미 의료용 대마초는 있지 않아?”

“가인이의 발작을 멈추게 하는 성분을 다 뺀 상태로 들여오죠. 그것도 구하려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집으로 가줄래요? 가서 교복 입고 학교에 가야겠어요.”

“그래.”

“학교에 가서 아저씨가 한 말이 맞나 봐야겠어요.”

“무슨 말?”

“뭐 학교는 노예를 어쩌고저쩌고.”

“그래도 내가 너보다 몇천 년은 더 살았는데, 무례하기는. 어른을 존중할 줄 알아야지.”

“됐어요.”


차 안의 메피스토와 모세는 시끄러운 락 음악을 즐겼다. 모세는 메피스토가 나쁘지 않은 음악 취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메피스토는 어쩌면 모세를 도울 방법이 몇 가지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도시 구석의 가난을 감춘 도시의 대로에 나왔을 때 그들은 창문을 열고 다시 한번 햇빛을 즐겼다. 메피스토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즐거운 음악, 정오의 햇살.


집으로 돌아온 모세는 급하게 교복으로 갈아입고 늦은 등교에 나섰다. 메피스토는 침대에 앉아 그간 만났던 악마들의 이름과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질병의 악마…. 질병의 악마…. 누구였지….'


'사랑하는 사람이 병마와 싸우는 걸 지켜보는 일은 힘든 일이겠지. 고칠 방법이 있으면서도 고치지 못한다니. 부모님의 회사는 걸림돌만 되고. 모세의 인생이 보기보다 쉽지는 않구먼.'


메피스토는 기억을 되찾은 이후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말해왔다. 대악마라고 불리는 메피스토 본인조차도 분명 사랑에 빠졌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저 기억해내지 못할 뿐.


메피스토가 동급생들의 폭력에서 모세를 구제해 준 것은 호기심과 따분함이 이유였을 것이다. 사랑에 관한 콤플렉스 때문일까, 메피스토는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모세를 돕고 싶었다. 문제는 그가 기도를 올려야 할 악마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메피스토는 침대 위에 양반다리로 앉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에 온갖 잡념을 던져내었다. 그가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돌아올 공간이 있도록.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는 그의 머릿속에는 악마들의 전성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전쟁과 죽음, 질병들이 쏟아지던 시기. 까마귀 모양의 가면을 쓴 인간들의 모습. 도시 구석에 버려진 인간들. 또는 인간이었던 것들. 어두운 하늘에 닿을 듯 불타오르는 시체들의 화염. 인간을 겁내지 않는 도시의 쥐들. 그의 기억은 그가 찾는 악마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분명, 광장에 있었을 거야.'


메피스토의 핸드폰은 진동 소리를 내며 알람을 쌓아갔다. 핸드폰의 알림 소리에 집중력을 잃은 메피스토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는 세상의 무엇이 그를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핸드폰을 열어 확인한 메피스토는 실망감과 하찮은 분노를 내뱉었다.


'연예인 둘이 결혼한다고? 이게 속보야? 이거 때문에 나의 명상이 끝난 거야?'


메피스토는 간편하고 따뜻한 외투에 슬리퍼를 신고 저택을 나섰다. 그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둠이 너무나도 빨리 찾아오는 초겨울, 빛을 누릴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과거에도 그와 같이 빛을 사랑하는 악마들이 많았으나, 악마의 천성인 게으름에 그들은 늘 빛을 즐길 시간을 놓치곤 했다.


저택의 대문을 잠그고 하늘을 바라본 메피스토는 짙은 어둠에 실망했다.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지루함을 느꼈다. 그는 새로운 놀잇감이 필요했다.


그는 와인을 구매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의 입맛이 변한 것일까? 스스로 권능으로 만들어낸 와인의 맛에는 만족할 수 없었다. 지옥에서는 자신이 만든 적포도주를 맛보기 위해 악마들이 줄을 섰는데도 말이다.


'지옥에서 내가 만든 와인을 먹기 위해 줄을 섰던 악마들이….'


그는 와인과 연결 지어 질병의 악마, 그의 이름을 떠올리려 했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빗물에 젖은 은행 나뭇잎이 바람에 떨어졌다. 입에 담배를 물고 검은 재킷에 손을 찔러 길을 걷던 메피스토는 외로움을 느꼈다.


'다른 악마들도 이런 외로움을 느낄까. 파이몬이라면 이런 간지러운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신호등의 초록 불을 기다리며 길 건너의 주류 매장을 바라보던 그는, 매장 왼편에 새로 들어선 꽃집을 발견했다. 신호등의 초록 불이 켜졌다.


천천히 발걸음을 떼는 메피스토는 볼 수 있었다. 꽃집 안에서 의자에 올라 벽을 칠하는 여성의 얼굴. 어쩌면 살면서 처음으로, 아니면 기억을 잃은 이후 처음으로, 그가 느끼는 것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거대한 유리창 밖에 선 그는 어찌할 줄 몰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스토커처럼 보이겠지? 일단 옆집에 가서 와인부터 살까? 그래. 어차피 그러려고 나온 거잖아. 꽃집이 도망가기야 하겠어? 아니지, 와인을 사는 동안 저 여자가 도망갈 수는 있잖아. 아니야, 페인트칠하다가 갑자기 도망갈 이유가 뭐가 있겠어. 일찍 퇴근할 수도 있겠지? 일단은 와인부터 사고 들어가 보자.'


와인을 구매하러 매장에 들어선 그는 날카로운 손톱을 물어뜯으며 와인을 결제했다. 점원은 메피스토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예? 뭐가요?”


메피스토는 와인을 손에 든 채 적진으로 진군하듯 빠르게 꽃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천국의 향기가 그를 반겼다. 평생을 천국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하며 살아온 메피스토였으나, 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펼쳐진 것은 천국의 향기였다.


잠시 후 천국의 빛을 등진 여자는 메피스토에게 말을 걸었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메피스토의 심장은 지옥의 용암이 튀어 오르듯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그녀의 짙고 굵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우주의 어둠처럼 검은 머리카락, 풍성하고 휘어진 머리카락, 그다음은 천장의 빛을 반사하는 이마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밝은 이마는 천국의 구름 같았다. 얇지만 진한 눈썹과 미소를 담은 빛나는 눈, 그 눈은 태양같이 밝아 감히 마주칠 수 없었다. 메피스토의 시선은 그녀의 오뚝하고 부드러운 코 선을 타고 내려와 붉고 긴 입술에 고정되었다. 붉은 입술은 그녀의 미소를 더욱 진하게 만들어냈다.


메피스토는 인간에게서 천국의 빛이 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말을 잃었다. 어쩌면 그가 빛을 사랑하게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는 최면에 걸린 듯했다. 꽃집 바깥에서 울리는 자동차 경적에 메피스토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는 사실에 창피를 느꼈다. 그는 경직되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조카 주려고요.”

“예? 조카 줄 선물 찾으시는 거예요? 꽃? 화분?”

“아무거나요.”

“조카가 여자애예요?”


메피스토의 머릿속엔 모세의 불평 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애요. 고등학생.”

“삼촌분이 되게 낭만적이시다. 조카한테 이런 선물 잘 안 사는데.”


작은 화분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는 메피스토의 옆을 지나 움직였다. 그녀의 원피스에 그려진 꽃 무늬에서는 살아있는 꽃의 향기가 나는 듯했다. 향기만으로 심장이 아팠고 눈물이 맺혔다.


'보통 인간처럼 행동하자. 정상인처럼. 어차피 한 달이면 다시 지옥으로 돌아갈 거야. 아버지와의 내기에서 이겨서 천국에 가게 될 거야. 인간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든 상관없어.'


작은 화분들을 진열하는 그녀에게 메피스토는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레라에요.”

“레라요?”

“아 혹시 화분 이름 물어보신 거예요? 죄송해요. 저는 제 이름 물어보시는 줄 알고.”


그녀가 소리 내어 크게 웃을 때 메피스토는 가슴 한쪽 편이 따가웠다.


“아니요. 사장님 이름 물어본 거 맞아요. 이름이 신기하네요.”

“이름 때문에 놀림 많이 받았어요. 이건 어떠세요?”


메피스토는 작은 화분을 카운터에 올려놓은 그녀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늘고 흰 손목에는 작은 문신이 있었다. 아름다운 사자의 모습. 사자의 그림에 메피스토는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찾던 악마의 이름.


메피스토는 다시 한번 시체들이 불타오르는 광장을 떠올렸다. 인간을 겁내지 않는 쥐들과 까마귀 가면을 쓴 의사들, 울고 있는 아이들과 병에 지쳐 바닥에 누운 인간들. 도시의 혼란이 가장 극심했을 때 그는 그곳에 있었다. 메피스토는 골목의 어둠에 숨어있던 악마를 기억해냈다. 검은 갈기를 한 사자, 피가 묻은 얼굴을 한 채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악마.


'마르바스.'


메피스토는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이곳에 계속 서 있다가는 다시는 마르바스라는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할까 걱정이 됐다.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은 화분을 들고 나온 메피스토는 핸드폰에 마르바스의 이름을 적은 후,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는 하늘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과 은행나무잎에 자신이 애초에 집에서 나온 이유를 기억해냈다.


'아. 내 와인.'


메피스토가 넓고 높은 오르막길을 지나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이 꽃집에 와인을 두고 왔음을 떠올렸다. 처음 와인을 떠올린 순간은 자신을 원망했다.


'인간의 뇌를 갖고 사니까 바보가 되는구나.'


다시 생각해보았을 때 그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다음번에는 와인을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다시 한번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행여나 그녀가 선물이라 착각해 마신다면, 메피스토에겐 황홀하기만 할 것이다.


대문의 처마 아래 비를 피하며 담배에 불을 붙인 메피스토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항상 남과 다르다 느끼며 살아왔다. '남'이라고 해봤자 지옥의 다른 악마들뿐이었다. 타인은 지옥이라지만 메피스토에겐 달랐다. 그에겐 다른 악마들이 지옥이었다. 지옥에서 살아가는 악마들은 어째서인지 사랑이나 행복 같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메피스토는 그런 그들이 답답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전쟁과 종교재판, 수많은 천재지변에 휩쓸리며 지나온 인간의 역사를 지켜본 그는 자신이 문제임을 깨달았다. 지옥에서조차 문제아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일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의문을 품고, 내기 같은 도전을 하는 바보 같은 악마는 메피스토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기는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아버지에게 무릎 꿇고 빌어야 할까? 모르겠다.'


메피스토는 담배 불을 끈 후 꽁초를 주변의 쓰레기통에 던졌다. 비를 피해 현관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신발장에 놓인 새로운 신발을 발견했다.


주방에는 교복을 입은 모세와 가인이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가인은 웃으며 메피스토를 반겨줬다. 모세는 경직된 메피스토의 얼굴을 본 후 물었다.


“그건 무슨 화분이에요?”

“이거? 이거 너 주려고. 가져.”

“머리를 다치셨나? 갑자기 웬 화분?”


메피스토는 사춘기 아이처럼 주방 테이블에 화분을 놓은 후 2층 자신의 방으로 달려 올라갔다. 빠르게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그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레라의 미소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소와 목소리에서도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아.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하얗고 고울 수가 있지.'


지하에서 들려오는 가인의 기침과 발작 소리에 메피스토는 이름을 떠올렸다.


“맞아. 마르바스.”


메피스토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1층을 지나쳤다. 가인을 돕고 있는 모세는 달려가는 메피스토에게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메피스토는 바쁜 그들을 지나쳐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곳에는 십자가의 나무 조각과 뼛조각, 뱀의 사체들이 나뒹굴었다. 메피스토는 지하의 모든 혐오스러운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바닥 중앙에 모은 후 계단에 앉았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질병과 치유의 사자, 마르바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뱀의 사체와 부서진 십자가 조각들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은 점점 크게 피어올랐다. 메피스토는 지하의 보일러와 관련된 기계들이 불에 닿아도 괜찮을지 걱정하며 불꽃을 바라보았다.


모든 잡동사니를 태운 불꽃은 한곳으로 응집해 한 마리의 동물을 만들어냈다. 튀어 오르는 불꽃은 사자의 검은 갈기로 변하였다. 피에 젖은 얼굴을 한 사자가 그곳에 나타났을 때 메피스토는 공손히 말을 꺼냈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주겠소.”


이내 사자는 검은 머리를 한, 위압적인 남자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남자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메피스토, 오랜만이네! 친구. 이야기는 들었네. 아버지에게 대결을 신청했다고? 어쩌려고 그러나?”

“대결이라기보단, 친목 도모를 위한 내기라고 보는 게 맞을걸세.”

“솔직히 말하지. 나는 당신이 이겨서 그 자신만만하고 위대하다는 아버지가 당황하는 꼴을 보고 싶다네.”

“나를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그런 셈이지.”


메피스토와 지난 회포를 풀던 마르바스는 물었다.


“도시의 혼란을 불러올 수 있겠나? 흑사병이 창궐하던 그 날처럼? 좋은 옛날이었지.”

“그래. 좋은 옛날이었어. 혼돈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네.”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병을 줄 때 약을 함께 건네야 할 의무가 있어. 약을 건넬 때는 병을 건네야 할 의무가 있지.”

“치료에 쓰일 풀을 주게.”

“병은?”

“발작. 병은 이 도시에 혼란을 퍼붓는 데 이용할걸세. 도와주게.”


마르바스는 웃으며 길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지옥으로 돌아가는 의식을 잠시 멈춘 마르바스가 메피스토에게 말했다.


“자네가 이겨서 천국에 간다면, 그곳이 어땠는지 나에게 들려주겠나?”

“물론이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몸은 불타올랐다. 지옥의 불이 사라진 지하실은 지난 어느 날보다 깨끗했다. 마르바스가 떠나고, 뱀의 사체가 뒹굴던 바닥에는 가인을 위한 풀이 놓여 있었다. 어째서인지 메피스토의 머릿속이 아닌 가슴속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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