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라지에

4

by 박규동

이 세상이 나의 것이었다면.



모세의 집 정원, 신나는 음악이 잔디와 나무를 흔들었다. 메피스토는 의자에 기대 선글라스를 벗었다. 노을 지듯 지나가는 인간들의 젊음을 냉소적으로 응시했다. 벨리알의 전화를 받은 후 모세는 신이 나서 가인에게 달려가 부모님이 한동안 집에 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했고, 가인은 모세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들이 행복하다면 메피스토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모세와 가인의 연기처럼 흩어지는 젊음을 응시하던 메피스토는 필멸은 저주, 영생은 고통이니. 아버지의 무자비함을 떠올렸다.


메피스토가 건넨 풀을 담배로 말아 피운 지 일주일. 가인은 발작 증세 없이 안정된 상태였다. 모세와 가인은 잔디 위에 앉아 서로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는 장난을 했다. 가인은 고개를 돌려 메피스토의 공허함을 응시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외로워 보이는 악마의 의자 옆에 앉은 가인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래도 괜찮을까요?”

“뭐가.”

“불법이잖아요.”

“무엇이 불법이고 무엇이 합법인지는 누가 정하지?”

“나라에서 정하죠.”

“그들은 무엇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지, 도움이 되지 않을지 정하는 것일 뿐이야. 16세기에도 그랬고, 지금도, 아마 미래에도 그럴걸.”


메피스토 역시 셔츠의 가슴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가 내뱉은 연기는 흔한 지옥의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가인의 표정에서 읽힌 혼란, 메피스토는 연기 섞인 한숨을 내뱉어 그녀를 위로했다. 지옥이나 악마보다 법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딱하기도 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장담하는데 이게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담배들이나 온갖 소주, 맥주보다는 건강에 훨씬 좋을 거야. 정부는 돈이 된다면 너희에게 쥐약이라도 먹일걸. 돈을 잃는다면 만병통치약이라도 앗아가니까.”

“그래도 법을 어기는 거잖아요.”

“법이란 사회가, 아니지. 사회의 몇 명이 만든 약속일 뿐이야. 즉, 언제든 파기해도 괜찮다는 뜻이지. 가인아, 내가 너 몰래 모세와 숨어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고를 결정하면 기분이 좋겠나?”

“...”

“이게 다 나라가 백성들을 가르치고 훈육해야 할 무지한 동물로 여겨서 그래.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봐. 사회니, 법이니, 문명에서 뒤로 물러서봐. 인간 동물로서 네가 병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치료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 그럴 권리가 있지?”


가인은 메피스토의 말에 수긍한 듯 다시 모세의 옆으로 달려가 장난스럽게 안겼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메피스토는 레라를 떠올렸다. 편의점에 가거나 외출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메피스토는 괜히 몇 걸음을 더 걸어서라도 그녀가 있는 꽃집을 지나치곤 했다. 그리움을 담은 서툰 핑계, 와인을 이유로 레라에게 닿아야 했다.


아버지와의 지옥에 두고 온 듯 그는 혼란과 여유에 빠져있었다. 과거 아버지에게 들었던 우화 탓에 메피스토는 사랑을 두려워했다.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는 묘약을 먹였고, 그녀의 사랑을 쟁취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가 베푸는 사랑이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남자는 그녀의 술잔에 필요 이상의 묘약을 섞었고 그녀는 중독으로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


아버지의 이야기는 메피스토의 귀를 통해 들어와 영혼에 박힌 가시가 되었다. 어째서인지 그 남녀를 아는 듯우화의 남녀가 친근하기도 했다. 메피스토는 사랑을 위해서는 어떤 악마에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 나에게 계시를 내려주길. 어찌해야 할지.'


메피스토는 잔디 위에 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음악을 듣고 있는 모세와 가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자신과 레라의 모습이기를 원했다. 위대한 철학자는 일곱 살 아이에게도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했다. 메피스토는 의자에서 일어나 모세와 가인에게 다가섰다. 신과 인간들의 사이에 선 대악마로서, 아이들에게 지혜를 묻는 것이 부끄러운 메피스토였다. 모세와 가인은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보는 메피스토에게 물었다.


“뭐 할 말 있으세요?”

“없어.”


메피스토는 어떠한 답도 얻지 못한 채 그의 작은 침대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창문을 연 메피스토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모세와 가인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음악에 덮여 정확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는 모세가 내뱉은 한 문장을 포착했다.


“무엇이든 하고 후회하는 것이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들이 어떤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는지, 문맥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모세의 말을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는 벽시계를 응시했다.


'늦지 않았다.'


그에게 꾸며 입을 충분한 시간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검은 옷을 걸친 후 현관으로 달려온 그에게 신발 끈을 묶을 시간은 사치였다. 외출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그는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의 대문을 열었다. 모세는 소리쳤다.


“어디 가세요?”

“와인을 두고 와서.”


빠른 걸음으로 꽃집을 향하는 그의 머리는 바람에 헝클어졌다. 가로등에 비친 그의 그림자에는 낭만과 긴장, 설렘이 공존했다. 신호등 건너편에 선 그는 떨리는 마음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긴 호흡으로 연기를 들이마셨을 때 초록불이 켜졌다. 그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진 후 거친 발걸음으로 건널목을 지났다. 긴장된 마음에 문을 강하게 밀어 열었다. 실수였지만, 그 힘 조절의 실패는 마치 연출된 등장과 같았다. 레라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문 닫으려고 했는데.”

“와인을, 두고 와서요.”

“맞아요. 잠시만요.”


창고인지 가게의 뒤편으로 레라가 사라졌을 때 메피스토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메피스토의 긴장에 잡생각이 섞여갔다.


'이제 문 닫는다고? 의도치 않게 퇴근 시간에 맞춰 왔다니. 우연. 우연은 계시 때문에 만들어지지. 모세는 어째서 그녀의 퇴근 시간에 계시를 들려준 거지? 애초에 나는 왜 이곳에 와인을 두고 온 거지?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하지.'


레라는 머리를 묶고,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창고에서 와인을 들고 나왔다. 메피스토는 다시 한번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그 이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와인 같이 마실래요?”

“여기서요? 저랑요?”

“예. 어차피 문 닫는다면서요.”


고민에 빠진 레라의 동그란 눈을 바라본 메피스토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취소하고 싶었다. 다른 악마의 도움, 마법이나 묘약. 그 모든 쉬운 길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레라의 목소리는 악마의 심장을 흔들었다.


“그래요. 그러면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줄래요?”


해가 진 도시 한 구석에서, 악마 메피스토는 무거운 화분들을 옮기고 있었다.


'허리 아파.'


레라는 메피스토에게 빈 물통을 건넸다.


“여기에 물 좀 가득 채워서 가져다줄래요?”


메피스토는 아무런 대답 없이 물통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강한 수압에 그의 옷은 다 젖고 말았다.


레라를 위한 노동이 거의 끝났을 때, 메피스토는 꽃들에 둘러싸인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잔에 따랐다.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메피스토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그녀에게 어떤 거짓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을 인간이 모세 말고 누가 있을까. 메피스토는 고민에 빠졌다. 레라의 눈을 바라보며 메피스토는 잔을 들었다.


'좋아. 나 자신이 되는 거야.'


레라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메피스토에게 먼저 질문을 건넸다.


“이름이 뭐예요?”

“메피...”

“메피? 외국인이세요? 외국에서 오셨어요?”

“네. 남쪽… 에 있는 곳이요.”

“남쪽? 호주?”

“더 밑에요.”


일반적이지 않은 배경에 둘은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꽃들마저 악마를 돕고 싶어 했다. 메피스토는 용기를 내 보았다.


“힘들지 않으세요? 이렇게 꽃들을 가꾸고 살아가는 거?”

“힘들죠. 힘들다기보다는 옳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남는 것도 없고. 남는 게 없으면 이걸 계속하는 게 맞는 일일까, 차라리 학교로 돌아가서 더 많이 배워야 하나. 제가 하는 일들이나 가는 방향이 옳은지 모르겠어요.”

“제가 온 곳에서는 옳고 그름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남쪽이요?”

“네. 남쪽.”

“진짜 어디인지 안 알려줄 거예요? 남쪽이라고만 하고? 그러면 저도 알려주지 않을래요.”


“그게 사실은, 제가 기억을 잃은 적이 있어서요. 아니면 제가 하는 말이 모두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볼래요?”


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피스토는 지옥과 악마들, 천국과 천사들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 영적인 존재들의 개입과 아버지, 그리고 철학자들의 이야기. 레라는 메피스토의 이야기가 고향처럼 포근하기만 했다.


그들은 와인병의 붉은 파도를 모두 비워냈다. 메피스토의 육체는 그곳의 어떤 꽃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메피스토는 고개를 돌려 재채기를 쏟아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레라는 어지러움 속에,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꽃의 환영을 보았다. 물론 와인에 흔들린 그녀의 착각일지 모른다.


“옳고 그른 게 없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해요? 올바른 방식으로 가야 할 길이 없잖아요. 목적 없는 삶 같아요.”

“목적 있는 삶이 어딨어요. 다들 그렇게 믿을 뿐이지. 그러니까 악마들은 자유롭죠. 가야 할 방향이나 길을 정하지 않았으니까. 정답이란 게 없으면 어디를 걷든 그곳이 길이에요. 자유롭죠? 악마들이 사실 나쁜 존재가 아니거든요. 자유를 추구할 뿐이지.”

“그래도 인간의 눈에는 결국 나쁜 짓을 하는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잖아요.”

“세상이 나쁜 곳이라면요? 병든 세상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진짜 건강하다는 뜻일까요?”

“너무 어렵고 복잡해요.”


메피스토는 화려한 꽃들 사이, 벽에서 피어난 볼품없는 곰팡이를 바라보았다. 화분이든 콘크리트든 무언가는 자라난다.


“모든 혁신이나 개발은 전의 체제와 개념을 파괴할 때 생겨나잖아요? 원래 악마는 혁신의 아버지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파괴만을 두려워하고 악이라고 하죠.”

“그건 모르겠지만, 옳고 그름이 없다는 건 마음에 드네요. 그러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아니에요? 난 자유네요.”

“맞아요. 당신은 자유예요. 그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어요. 어디든 꽃은 자라니까요.”


메피스토는 술기운에 자신의 삶을 와인잔에 따르는 레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라 시간의 흐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따금 그녀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려, 그녀가 내뱉는 이야기를 놓치기도 했다. 레라는 메피라는 남자와 있는 순간이 환상같이 느껴졌다. 레라가 바라보는 남자에게선 다른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하얗고 동그란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메피스토의 설렘을 담은 미소는 제어되지 않는 순수한 지옥불처럼, 왈츠를 멈추지 않았다.


'내일이 무슨 상관이야. 악마든 인간이든 어차피 진정한 현실은 오늘이라는 순간일 뿐이잖아.'


메피스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건넸다. 그녀는 악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일어나죠?”

“어디로 갈까요?”




아침에 눈을 뜬 메피스토는 옆에 잠든 레라를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태양 빛이 거대한 창문을 뚫고 레라의 얼굴에 비쳤다. 어떠한 소음이나 움직임이 아닌, 빛에 의해 잠에서 깬 레라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5분만 더 잘래요.”


샤워를 말끔히 마치고 어제와 같은 옷을 입은 메피스토는 의자에 앉아 침대 위 잠든 그녀를 응시했다.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넘기며 메피스토는 그녀의 하얀 피부에 반사되는 빛의 따뜻함을 느꼈다.


'나도 인간처럼 죽는 날이 올까. 그렇다면 그날까지 이 여자를 잊지 못할 것 같아.'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머리를 말리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메피스토는 자신이 인간이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호텔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브런치를 즐겼다. 늦은 가을, 심지어 겨울의 시작이라 할지라도 정오의 햇볕은 따뜻했다. 그들이 함께하는 카페 창가의 공기는 대자연의 날숨보다 맑았다. 팬케이크에 꿀을 뿌리는 그녀에게 메피스토가 물었다.


“교회 다녀요?”

“아니요. 그래도 신은 있다고 믿어요. 신이 아니더라도 신과 비슷한 것들.”


메피스토는 그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이 좋았다. 그녀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이야기했다.


“제가 아기 때 심하게 아픈 적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과학의 시대니까 병원에 열심히 다녀서 고쳤죠. 그런데 과거였어 봐요. 악령이 들었다고 했을걸요? 의사 대신 신부가 와서 병을 고치려 했겠죠. 그런데 무슨 상관이에요.”

“왜 상관없어요?”

“어차피 아팠던 건 사실이고, 다 나은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메피스토는 자신이 인간들을 과소평가해 왔던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들은 악마나 천사들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였다. 어쩌면 복잡하기에 그들을 과소평가해 왔을지 모른다. 그녀의 이야기에 매료된 메피스토의 핸드폰이 커피잔 옆에서 진동했다. 모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저씨 안 와요?’


‘아저씨 가출했어요?’


카페에서 나온 두 남녀는 꽃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건널목의 초록불을 기다렸다. 메피스토는 레라의 하얀 손목을 바라보았다.


“손목의 사자 문신은 무슨 뜻이에요?”


레라가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초록불이 켜졌다. 불이 켜짐과 동시에 건널목 건너편 한 여자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가인이 아플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손목과 손가락은 돌아가고 입에선 침이 흘렀으며 눈은 돌아갔다. 아이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떨었다. 주변 행인들은 아이의 몸을 붙잡고 진정시키기 바빴다. 누군가는 구급차를 불렀고, 누군가는 구경했으며, 누군가는 아이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또 누군가는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기에 바빴다.


메피스토와 레라는 그 광경을 지나쳐 꽃이 가득한 일터에 도착했다. 레라는 열쇠로 문을 열며 말했다.


“제가 어릴 때 저렇게 아팠거든요.”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

“그럼요.”


그녀가 꽃들에게 돌아가고, 메피스토는 다시 한번 건널목을 지났다. 집을 향한 오르막길에 발을 디딜 때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음과는 상관없이 메피스토는 기분이 좋았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여성과 하루를 보냈음에 더없이 좋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런 하루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자아이를 본 것은 불편하기도 했다. 자신이 모르는 인간의 하루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저택의 문을 열었을 때 정원에는 어제의 모습 그대로 모세와 가인이 앉아 있었다. 가인의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에 메피스토는 레라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의사를 부르든, 신부님을 부르든 무슨 상관이에요.'


자리에 누워 하늘 위로 구름을 만들어내는 가인을 두고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소리쳤다.


“어제 어디 갔어요? 어디 간다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지.”

“나는 친구도 만나면 안 되니?”

“친구 없잖아요. 말도 없이 지옥으로 돌아간 줄 알았잖아요.”

“갈 때 되면 말하고 갈 거야. 걱정하지 마.”

“결국 가기는 해야 하나 봐요. 언젠가는. 근데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요?”

“기분 좋은 일은 무슨, 너희 학교는 이제 안 가기로 했니? 난 낮잠이나 자련다.”


2층으로 올라가는 메피스토의 발걸음,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와 높은 목소리 톤.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악마한테 좋은 일이 생기면, 인간들한테는 안 좋은 건가?'


방으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은 메피스토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봤다.


'아직은 아무런 문자도 오지 않았네. 지금은 바쁘겠지. 바쁘냐고 먼저 문자를 보내볼까? 아니야, 조금 더 기다려보자. 아니면 그녀 역시 내가 왜 문자를 보내지 않나 생각하고 있으려나? 그렇다면 먼저 보내야 할 텐데.'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보는 메피스토의 머리 위, 파리 한 마리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메피스토는 방의 천장을 비행하는 파리에게 물었다.


“파리 대왕님. 무슨 할 말이 있으십니까.”


파리는 메피스토의 검지에 앉아 앞발을 비비며 말했다.


“이제 아버지와의 내기는 완전 뒷전인가 봐?”

“내가 다 생각이 있어요. 계획대로 되고 있습니다.”

“나도, 다른 악마들도 형제님 기도 들어주면서 응원하고 있는데, 손 놓은 건 아닌가 걱정되어서 와봤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니?”

“언제부터 날 이렇게 걱정해 줬다고. 아버지가 분명 다 듣고 있을 텐데.”

“마태오 복음서 12장 24절.”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악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그러면 행복한 2주 보내.”


파리는 창문을 통해 유유히 퇴장했다. 파리의 시니컬한 인사에 심술이 난 메피스토는 방안에 독한 살충제를 분사했다. 살충제의 냄새가 가득한 방에 앉은 메피스토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악마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노력했지만, 아무리 집중해도 떠올릴 수 없었다. 방의 공기 중에 떠 있는 살충제에 메피스토는 기침을 뱉어냈다. 그의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 불씨는 메피스토의 손등에 옮겨 붙었다. 손을 털어 불을 끈 메피스토의 심술은 멈출 줄 몰랐다.


'인간의 몸을 줄 거면 확실히 주든가. 이게 뭐야. 어디 물속에라도 들어가서 가만히 있고 싶네. 절대 몸에서 불이 나올 일이 없도록 말이야. 잠시만, 혹시 인간들이 그래서 물속에 들어가는 세례를 받는 것인가? 아니겠지.'


메피스토는 핸드폰을 꺼내 레라에게 문자를 보냈다.


‘물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요.’


레라의 답장에 메피스토는 미소를 지었다.


‘바다 같은 곳이요?’


‘가을 바다 좋죠. 내일 가까운 바다나 보러...’


문자를 작성하던 메피스토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의 모세와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작성하던 문자를 고친 후 전송했다.


‘가을 바다 좋죠. 내일 가까운 바다나 보러 갈까요? 제 조카와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좋아요.’


메피스토는 빠르게 계단을 통해 정원으로 내려가 모세와 가인에게 다가섰다.


“너희들 내일 할 거 없지?”

“학교 가야죠.”

“언제부터 학교를 열심히 갔다고. 내일 갈 데 있으니까, 약속 비워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메피스토는 어서 내일이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같이 바다도 보고, 해가 지는 것도 보면서,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야 할지 몰라.'


설렘에 잠을 설치던 메피스토는 아래층의 모세와 가인이와 같은 모습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다 잠들었다. 아침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메피스토는 잠옷 차림으로 1층으로 내려가 모세와 가인을 잠에서 깨웠다. 악마는 졸음에 취해 불평하는 청소년들을 등진 후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염을 다듬고, 머리를 뒤로 넘긴 메피스토는 향수를 뿌린 후 방으로 돌아가 거울 앞에 섰다. 어떤 옷을 입을지 거울 앞에서 목 아래로 옷들을 대보던 메피스토는 평소와 다름없는 검은 옷을 입고 정원으로 향했다.


모세와 가인을 기다리며 의자에 기대 누운 메피스토는 선글라스로 태양을 가렸다. 선글라스 뒤에 숨은 메피스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메피스토는 태양에게 경박한 헛웃음을 보냈다.


'아버지와의 내기 때문에 머리 아파하고 고통받고 있을 줄 알았다면, 제가 이긴 거나 다름이 없네요.'


눈을 비비며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모세와 가인을 낚아챈 메피스토는 차고로 빠르게 내려갔다. 모세는 깨끗이 청소되고 향기가 나는 어머니의 차의 모습에 잠이 깼다.


'이 아저씨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그래서 어디 가는 건데요?”

“바다. 빨리 타.”


차고에서 빠져나온 검은 자동차, 핸들을 쥔 검은 옷의 남자는 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불렀다. 뒷좌석의 가인과 모세는 각자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 서로만의 음악을 공유했다. 날씨가 맑음에 메피스토는 하늘은 역시나 그의 편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 검은 자동차는 꽃집 앞에 멈추어 섰다. 모세와 가인은 뒷좌석에 앉아 꽃집 문을 걸어 잠근 후 걸어오는 여성을 바라봤다. 모세와 가인은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첫째로 들었다. 두 번째는 메피스토가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에 대한 이해였다. 조수석에 앉은 레라는 등을 돌려 모세와 가인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삼촌 하고 하나도 안 닮았네?”


모세와 가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레라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밝은 미소는 빛과 잘 어울렸다. 모세의 눈에 메피스토가 검은색이라면 레라는 하얀빛이었다. 차 안의 남녀는 웃으며 잡담을 이어갔다.


멀리서 푸른 바다가 보일 때쯤 가인은 창문을 내려 바다의 내음을 맡았다. 메피스토에게 건네받은 담배가 아닌 빛과 바다의 조합은 가인의 발작을 막아주었다. 모세는 부모의 부재라는 고통에서 자유를 얻었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멋대로 차를 세운 메피스토는 바다를 향해 춤을 추듯 내려갔다. 메피스토는 검은 구두를 벗고 해변에 발을 디뎠다. 오랜만에 본 바다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메피스토는 레라보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파도들과 장난을 치는 데 더욱 집중했다.


레라와 모세는 해변의 모래 위에 앉아 메피스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 삼촌, 정말 희한한 사람이야.”

“삼촌은 아니고 사실 악마예요. 그런데 악마가 그렇게 나쁜 존재가 아니래요.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거래요.”


레라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말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어요.”

“교회 다니니?”

“아니요. 부모님이 강제로 끌고 다니셨죠.”


메피스토는 바지를 걷고 해변의 물길을 걸어갔다. 가인은 파도에 발이 젖지 않을 거리에서 메피스토를 따라다니며 말을 걸었다.


“아저씨 진짜 악마예요?”

“응. 말했잖아.”


가인은 메피스토에게 받은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연기와 빛, 바다가 몰고 온 바람덕에 가인은 메피스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들이치는 파도에 신발이 젖지 않게 피하며 메피스토를 따라가며 물었다.


“지옥에는 인간들이 많아요?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 인간들 있잖아요. 벌 받는 인간들.”

“내가 지옥에서 본 건 다른 악마들 뿐이야. 벌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저희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지옥에 가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돼요?”

“지옥 가기 싫어서 하나님을 믿니.”

“애초에 믿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데요. 뭐를 믿는다는 건지.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

“역시 모세 친구라서 그런지 똑똑하네.”

“이제 아저씨 말 다 믿으니까, 아무런 증거나 보여줘 봐요.”


메피스토는 양손으로 바닷물을 한 움큼 들어 올렸다. 가인은 그의 손에 고여 있는 물을 바라보았다. 메피스토는 바닷물에 입김을 불었고, 바닷물은 적색의 포도주로 바뀌었다. 가인은 자신의 담배 연기를 메피스토의 손에 담긴 포도주에 내뿜었다. 메피스토가 손을 내려놓아 포도주가 바다로 돌아갔을 때, 바다에는 어떠한 적색도, 포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저씨 발 안 시려요?”



레라와 모세는 멀리 해안을 따라 걸으며 장난을 치는 메피스토와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이 그랬듯이 모세 역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레라는 그런 아이들에게 훈계나 잔소리할 생각이 없었다.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그랬듯 레라에게 물었다.


“아무런 말도 안 하시네요?”

“뭐가?”

“고등학생이 이런 걸 피냐고 뭐라 할 줄 알았거든요.”

“내가 왜 뭐라고 하겠어. 내가 어릴 때 많이 아픈 적이 있었는데...”


레라가 말을 이어가려 할 때, 그들은 바다 깊은 부분에서 물장난을 치는 여자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레라는 바닷바람에 떨며 여자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춥지도 않나? 대단하다.”

“추워서 들어간 거 아니에요? 증명하려고.”

“뭐를?”


모세가 답을 하기도 전에 물속의 한 아이는 허우적대며 바닷물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다른 아이는 해변을 향해 도움을 청하며 다가왔다. 물속의 아이는 가인이와 같은 모습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레라는 해변으로 다가갔다.


“모세야 빨리 구급차 불러볼래?”


모세가 핸드폰을 꺼내 세 개의 숫자를 치기도 전에 그는 기적을 목격했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은 채 물장난을 치던 메피스토는 그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모세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본 것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옷의 메피스토가 수면을 딛고 내달리는 경이로운 광경을. 그는 망설임 없이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가인은 어째서인지 물 위를 달리는 메피스토의 모습에 기겁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레라는 메피스토를 향한 조건 없는 믿음이 있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뿐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메피스토는 마치 물고기를 낚듯 손쉽게 허우적거리는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파도는 그렇게 기절한 아이와 그 손을 잡은 메피스토를 해변으로 밀어내었다. 모래 위에 누워있는 아이를 바라보던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물었다.


“이제 어떡하죠?”

“너 그, 담배 하나 줘봐.”


메피스토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들이마셨다. 메피스토는 기절한 아이에게 인공호흡을 하듯 입에 연기를 내뿜었다. 이내 아이는 메피스토의 얼굴에 바닷물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바닷가의 파리는 다른 곳을 향하여 날아갔다. 메피스토는 분명 파리가 그곳을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만 세 번째네. 발작하는 인간을 본 게. 마르바스. 당신이 한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겠네.'


발작에 빠졌던 아이가 진정되고, 그 자리의 모두는 할 말을 잃은 채 침묵을 지켰다. 메피스토가 레라를 돌아본 후 미소를 지었을 때, 레라는 그의 눈빛 속에서 구원의 지옥 불을 목격했다. 레라의 눈동자가 시간과 함께 희미하게 정지하는 순간, 그녀는 모래 위로 쓰러졌다.


레라는 머리카락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해변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눈을 뜨고 자리에 앉았을 때 하늘엔 노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메피스토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레라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메피스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당황하고 있는 메피스토의 모습, 그러나 자신을 향한 마음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이해하지 못한 채 남겨두기로 했다. 그녀는 가을의 밤하늘을 담은 바다를 바라보며 메피스토의 어깨에 기댔다.


모세는 핸드폰을 꺼내 바다를 가르며 달려가는 메피스토의 영상을 돌려보고, 계속해서 돌려보았다. 모세는 레라에게 고백하는 메피스토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있었다.


... 당신한테 모든 것을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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