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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광명이 스며드는 집안, 모세와 가인, 메피스토는 1층 소파에 앉아 뉴스를 시청했다. 메피스토가 가인의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을 준 후 세상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가인은 발작을 멈췄고, 메피스토는 바닷가에서 익사할 뻔한 아이의 생명을 구해냈다. 뉴스는 최근 수많은 이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발작에 시달린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리포터가 마무리 인사를 전하는 길가 뒤편에서조차 발작하며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도시의 혼란의 불씨는 계속해서 번지고 있었다.
가인은 뉴스를 보던 메피스토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을 느낀 메피스토는 가인의 눈에 담긴 질문을 읽어냈다.
‘뭐 할 말 없어요?’
메피스토 역시 이 사태의 전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솟아나는 의심 하나를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가인을 위해 마르바스에게 기도했을 때, 메피스토가 귀 기울여 듣지 않은 마르바스의 말을 떠올렸다.
‘치료제를 줄 때는 병을 줘야 하고, 병을 줄 때는 치료제를 줘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네.’
같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세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메피스토가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 문제를 해결해 준 날을 떠올렸다. 십자가에 걸린 두 악인을 물어뜯는 뱀들의 모습. 뱀들을 바라보고 모세의 마음이 정화되던 순간. 그는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마음속 종양이 제거되는 자유. 각자의 생각 속에 침묵으로 갇혀 있던 아침, 모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저 사람들 다 고칠 수 있잖아요.”
메피스토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피했다.
“내가 어떻게 고치겠어.”
메피스토는 정원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의자에 기댄 메피스토는 태양을 또렷하게 마주했다.
‘마르바스의 도움으로 도시에 혼란이 쏟아지는구나. 이대로라면 아버지와의 내기는 내가 이기겠어.’
정원까지 따라 나온 모세가 메피스토의 사색을 방해했다.
“아저씨가 다 고칠 수 있잖아요.”
“내가 어떻게 고쳐?”
“가인이에게 준 담배를 나눠주면 되잖아요.”
“야, 그거 최소 5년 이상의 징역이야. 심각한 범죄다.”
“언제는 법이 사소한 제안에 불과하다면서요.”
메피스토는 모세의 눈빛을 피하며 태양아래 그의 날카로운 손톱을 비추었다.
“가인이가 어땠는지 알잖아요. 저 사람들 저렇게 고통에 빠져 살도록 둘 거예요?”
“법에 걸리지 않는다고 치자. 내가 저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제를 어떻게 다 나눠줄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원해?.”
“그래서 저 사람들 안 도와줄 거란 이야기죠?”
“도와줄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는 이야기지.”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실망한 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보는 모세의 모습에 메피스토는 머리를 긁적였다. 모세는 물 위를 걷고 아이를 구해내는 메피스토의 영상을 반복해 돌려보았다. 그는 메피스토가 겁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직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던 가인은 TV 뒤 창문 너머 의자에 앉아 있는 메피스토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누구보다 발작과 두통의 고통을 잘 아는 가인은 메피스토가 옳은 선택을 하길 바랐다. 메피스토를 소개하던 모세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아저씨가 온 곳에서는 옳고 그름 같은 건 없대.’
가인은 악마를 향한 걱정을 품었다. 메피스토의 머릿속에는 옳고 그름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는 것 같았다. 가인이 바라보는 태양 아래 메피스토는 재채기를 쏟아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지옥불이 아닌, 가인을 살려낸 그 연기였다.
가인은 의자에서 일어난 메피스토가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레라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메피스토는 그녀의 짐을 들어주며 레라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모세와 가인 역시 정원으로 나와 레라를 맞이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레라는 말을 이었다.
“제가 어릴 때 아팠다고 했죠? 요즘 뉴스에 나오는 그대로 아팠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발작이 일어났어요. 마치 어렸을 때처럼. 머리는 아직도 아파요.”
메피스토는 그녀의 뒤통수에 손을 올린 채 입술에 접근했다. 입술이 닿기 직전, 그는 몸에 흐르는 연기를 레라의 입속에 불어넣었다. 레라는 자신의 고통이 숨에 섞여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메피스토가 건넨 연기는 그녀의 영혼을 정화했다. 그것은 자유이자 구원이었다.
레라의 두통이 사라지고 그녀가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모세는 메피스토 얼굴 앞에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버스 기사가 발작을 일으켜 고층빌딩에 충돌하는 모습. 연이은 교통사고로 마비된 도시. 충돌한 차들에서 화염과 연기가 피어올랐고, 하늘에서는 비행기의 잔해가 유성처럼 떨어졌다. 정부는 발작을 하는 듯 아무런 입장도 발표하지 않았다.
모세는 정부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환란에도 부모님에게 문자 한 통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때서야 모세의 집에서도 하늘로 향하는 세상의 화염과 연기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정원의 모두가 도시에서 쏟아지는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부탁했다.
“아저씨가 다 구할 수 있잖아요. 가인이랑 레라 누나도 아프잖아요.”
“가인이와 레라 씨는 내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지 않나?”
“다른 사람들은요?”
“굳이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바다에서 여자아이는 왜 구한 건데요?”
“눈앞에 있었으니까.”
“무슨 수를 쓸 생각이 없다면 제가 아저씨의 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거예요. 물 위를 걷고, 발작을 일으킨 아이를 살려낸 영상이요.”
“악마한테는 협박이 안 통하는 법이야.”
“아저씨가 평생 여기에 있을 것도 아니잖아요. 그때 되면 가인이랑 레라 누나는 어떡해요?”
메피스토는 자신을 말없이 응시하는 레라를 바라보았다. 레라는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에선 메피스토의 연기, 지옥불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레라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선이 아닌 심술에 메피스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현관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선 메피스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하실 문을 열었다. 계단에 걸터앉은 그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얼굴에 지옥불의 열기가 느껴질 때 그는 눈을 떴다.
검은 옷과 머리카락의 남자, 마르바스는 메피스토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말했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찾아오려 했다네.”
“무슨 연유로?”
“아버지께서 이곳의 연기와 화염을 바라보셨네.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시더군.”
“그렇다면 이번 질병은 언제 끝이 나겠는가?”
“끝나기를 원하는 건가? 이대로라면 자네가 내기에서 이기는 것이 분명한데. 14세기 이후 최고의 작품이 될 걸세.”
복잡한 것은 질색인 메피스토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지옥 같이 만들어야 하는 메피스토. 그는 여전히 지옥의 특별함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악마들은 역병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가 역병의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
“질병을 몰아내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이번 혼란과 병을 요구한 건 자네야. 평소라면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아버지가 보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려보는 땅 위에서 마르바스에게 더 이상 무리한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메피스토는 더 이상 무례해지기 싫었다.
“검은 사자 마르바스. 고맙네.”
“파이몬이나 벨리알에게 조언을 묻는 것은 어떠한가? 어찌 되었든 나는 지옥으로 돌아가야 하네. 지금 이런 말을 꺼내기가 불편하지만, 혹시 약조는 지켜줄 수 있는가.”
“어떤 약조?”
“천국에 간다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약조하지 않았나.”
“내가 이긴다면, 그 약조는 분명히 지키도록 하지.”
검은 머리카락을 한 악마의 옷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메피스토는 그가 사라지는 지옥 불을 이용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뱉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천국이 궁금해서, 아버지 핑계를 대고 나를 돕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메피스토는 핸드폰을 꺼내 거짓의 군주 벨리알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짓의 군주 벨리알님, 바쁘십니까?”
“오늘은 또 존칭을 써주시네. 그냥 배 목사라고 하지 왜?”
“뉴스 봤지?”
“지옥에서도 난리다. 다들 널 응원하고 있어. 네가 정말 이기겠는데?”
“그래서 그런데, 도시에서 질병을 몰아낼 방법은 없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굳이 질병이 아니어도, 도시에 혼란의 불을 태울 방법은 많잖아.”
“너 다른 생각하는구나? 내가 어찌 알겠어. 솔직히 안다고 해도 알려주지 않을걸?”
메피스토는 답답함에 지하실의 계단에서 일어나 핸드폰 건너 벨리알에게 물었다.
“왜?”
“아버지 패배는 둘째 치고, 발작 덕분에 교회가 문전성시야. 이렇게 장사가 잘된 적은 처음이야.”
“그래요. 헌금 잘 받으시고, 장사도 열심히 잘하세요. 그나저나 모세 부모님은 잘 있는 거지?”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걱정이나 해. 인간으로 살아갈 각오는 되어 있어? 분명 이겨야 할걸. 인간의 번뇌라는 게 보통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알았어. 됐어. 끊어.”
지하실 계단을 올라 문을 닫았다. 창문 건너로부터 전해지는 눈빛을 느낀 메피스토는 담배를 문 채 정원에 앉아 있는 모세와 가인, 레라에게 다가갔다. 그는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나도 분명히 노력은 해봤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모세는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메피스토를 째려보았다. 그의 말에서는 어떤 안타까움이나 진심은 읽을 수 없었다. 모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버튼을 눌렀다.
“저도 아저씨한테 분명히 말했어요. 그러면 저도 노력한 거예요.”
모세의 말이 끝난 후, 메피스토의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난 메피스토는 정원의 잔디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했다.
“내 수갑은 내가 풀 수 있지.”
메피스토는 정원에 핸드폰을 둔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릿속 천국을 그려냈다. 하늘의 빛과 황금, 고전 속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토록 아름답다는 천국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악마라는 종의 한계임을 자각했다.
메피스토가 방의 창문을 열고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 그는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는 사람들의 비명과 무엇이 불탄 건지 짐작도 되지 않는 연기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모세의 집 담벼락을 넘어 다가오는 혼돈의 향기는 분명 지옥의 냄새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그는 지옥의 악마들을 떠올렸다.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들. 자유의 값어치는 무엇보다 비쌌다. 마치 자석의 양극처럼 악마와 자유는 다가갈수록 서로를 밀어내었다. 자유의 부재는 악마들의 폭력을 자극했고, 사랑을 잊게 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갈망하던 악마는 메피스토뿐이었다. 메피스토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창밖의 소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리고성을 방불케 하는 모세의 집 담벼락을 넘으려는 사람들. 돌을 딛고 기어오르던 그들은 발작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하기를 반복했다. 발작하며 모세의 집으로 침범하려 하는 그들은 메피스토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너희들을 당해도 싸.’
인간들에게 어떤 자비나 애정이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하지만 병자들이 담을 넘어 레라나 모세, 가인에게 해가 될 것이 염려되었다. 그의 머리는 복잡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였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거실로 향했다. 메피스토는 거실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세와 가인, 레라는 병자들이 담을 넘어오려는 상황이 대수롭지 않은 듯 잔디에 앉아 햇볕을 즐겼다. 무언가 공평하지 않았다. 메피스토의 머릿속에는 혼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혼란과 자유의 가치를 저울질했다. 정원의 평화를 무시한 채, 그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다시 한번 지하실의 같은 자리에 앉게 된 메피스토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파이몬, 내가 바라는 것은 금은보화도, 아름다운 목소리도 아니오. 솔로몬에게 그랬듯이 지혜를 들려주시오. 메피스토의 얼굴에 불의 열기가 느껴졌을 때 그는 두 눈을 떴다. 그곳에는 붉은 염소 한 마리가 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메피스토는 경박한 염소를 혼란과 질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파이몬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파이몬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기도를 이루기 위해 바쁘십니다.”
“나의 기도? 내가 파이몬과 어떤 계약을 했지?”
“파이몬님은 중년의 남성에게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법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메피스토는 백화점으로 향하던 택시에서 만난 남자를 떠올렸다. 메피스토는 택시 기사를 위해 기도했고, 그에게 분명히 약속했다.
‘좋은 날이 올 거예요.’
택시 기사가 메피스토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교회에 갔다면 메피스토는 파이몬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메피스토의 눈앞에서 방황하는 붉은 염소는 메피스토에게 말했다.
“파이몬님께서 메피스토님의 내기가 시작되었을 때 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인간은 별과 같은 물질로 만들어졌으나 오직 한 가지의 다른 점은 ‘의지’뿐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저는 말을 전할 뿐입니다.”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메피스토는 손바닥을 펴 염소에게 입김을 불어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불은 염소를 불태웠다. 염소는 화염에 고통스러워하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메피스토는 개의치 않고 다른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메피스토는 눈을 감고 명상에 집중했다. 수많은 이미지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모세의 집 담벼락을 오르려는 병자들, 모세의 집이 있는 골목길을 채우는 병자들의 수. 메피스토는 더욱 높은 담벼락을 상상했다. 더욱더 높게, 더욱더 높게. 그 상상 속에서 바벨탑을 짓는 노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메피스토는 이내 자세를 고쳐 앉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그는 화염이나 질병보다 강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안드레알푸스, 나의 기도를 듣고 있다면 이곳에 화염으로 나타나라. 너를 위한 탑이 무너지고 수치를 당했던 과거는 끝이 났다. 내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 메피스토의 눈꺼풀 너머 밝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을 때 그는 눈을 떴다. 그곳에는 불이 붙은 거대한 날개를 가진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메피스토는 반가움에 미소를 지었다.
“나의 형제, 안드레알푸스. 소통이 칼과 총보다 강력하다는 것은 너의 존재를 알리는 문장이 아닌가?”
불붙은 날개의 새는 지하실 바닥을 돌아다녔다. 메피스토는 새를 노려보았다.
“하늘에게 기품마저 빼앗긴 네가 불쌍하구나. 너의 탑을 돌려받고, 아버지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마.”
새는 움직임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흔들며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너를 위한 바벨탑을 무너뜨린 날의 수치를 기억하는가? 너의 목소리를 잃은 날을. 지금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이야기해라. 질병은 평화의 전조이며,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고 전해라. 각자 집에서 본인의 자리를 지키라 전해라. 그들이 문을 열기 전에, 구원이 그들의 문을 열 것이다. 두들기지 않아도 열릴지어라.”
새는 고개를 흔들었다. 메피스토의 말에 복종하듯 고개를 숙인 새의 몸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이내 메피스토는 미소를 지으며 지하실의 계단을 올랐다.
‘나에게 파이몬의 지혜, 바알의 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메피스토는 당당하게 정원으로 향했다. 모세는 담벼락을 오르려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핸드폰 게임에 집중했다. 레라와 가인은 담배를 나눠 피우며 잡담을 나눴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호들갑을 부린 것은 메피스토뿐이었다.
‘다들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는 건가?’
메피스토는 정원의 의자에 앉으며 모세에게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상황 다 정리됐다.”
“사람들을 다 고쳐주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안정을 되찾도록 도운 거지. 뉴스 봐.”
모세는 메피스토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메피스토가 말한 대로 핸드폰을 통해 뉴스를 시청했다. 레라와 가인은 모세의 옆에 붙어 함께 뉴스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메피스토가 자신만만했던 대로 뉴스의 진행자는 급작스러운 속보를 읽기 시작했다.
“정부는 도시에서 일어난 온갖 혼란과 폭력 사태를 인지하고 있으며, 질병 또한 인지하고 있습니다. 질병관리청이 여러분을 도울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질병관리청이 병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인지하고 사태를 파악할 때까지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이는 국회가 동의한 바로, 현재 시민 여러분은 도시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즉시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시위, 집회, 민간 언론, 출판 등의 행위는 계엄이 끝나기 전까지는 엄격히 금하는 바를 선포합니다.”
모세는 한심하다는 듯 메피스토를 응시했다. 메피스토는 안드레알푸스가 자신을 배신한 것인지, 단지 무능력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레라는 메피스토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이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아요.”
메피스토는 차라리 레라가 화를 내기를 바랐다. 그는 더 이상 상황을 외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메피스토는 길게 내려오는 검은 코트와 슬리퍼 차림으로 저택의 대문으로 향했다. 모세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등진 그의 등은 어째서인지 넓어 보였다.
메피스토가 정문을 열자, 담벼락을 오르던 병자들은 모두 길바닥으로 떨어졌다. 골목길을 가득 메운 인파는 메피스토를 본 후,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을 꿇은 인파는 모두 같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살려주세요.”
메피스토는 태양 아래, 그의 발아래 무릎 꿇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법이나 신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곧 치료제를 들고 올 것입니다. 합리적인 행동을 합시다.”
엎드린 이들은 살려달라는 울음을 반복했다. 메피스토의 머리는 뜨겁고 가려웠다. 자신에게 살려달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답답할 뿐이었다.
“나한테 무릎 꿇는다고 병이 낫습니까? 집에 가서 인터넷을 이용해 검색하고, 책을 읽어 자료를 찾아보십시오. 무엇이 원인인지, 고칠 방법은 무엇인지.”
밝고 마른하늘에 천둥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의 끝에서는 방패를 든 남자들이 병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메피스토가 내뿜는 연기와는 전혀 다른 최루탄을 발사했다. 골목의 병자들은 본인들을 제압하려는 남자들과 대치했다. 기침과 눈물을 자극하는 연기 속에서 일부는 몸을 흔들며 쓰러지기도 했다.
경찰인지, 군인인지 모를 남자들은 시체인지, 사람인지 모를 병자들을 밟으며 진군했다. 메피스토는 폭력의 파도가 자신에게 다가와 부서질 것을 직감했다. 방패와 최루탄, 곤봉은 메피스토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병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쌓아 올려 메피스토를 보호했다. 인육으로 만들어진 성벽에 메피스토는 병자들이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보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으로 지은 벽에 깔린 한 남자가 자신의 핸드폰을 메피스토에게 건넸다. 메피스토는 자신이 병자를 고치는 영상을 확인했다. 바닷가의 고통받는 여자아이, 그녀에게 치료의 연기를 불어넣는 메피스토. 영상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에게 모든 것을 줄 테니….”
그것은 분명 메피스토가 레라에게 했던 말이었다. 메피스토는 병자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기다려주십시오.”
다가오는 계엄군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메피스토를 위해 병자들은 길을 내어주었다. 계엄군의 방패와 최루탄은 인간으로 지어진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인간과 멈춰 있는 차들로 가득한 골목에서 도망 나온 메피스토는 혼돈에 휩싸인 도시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길에 쓰러진 사람들과 폭발한 자동차들. 화염과 연기, 무너진 건물들. 아름다운 백화점의 분수나 클래식 음악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메피스토는 도로의 구석에 숨어 떨고 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자전거를 붙잡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아이에게 다가간 메피스토는 아이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자전거 좀 빌리자.”
마법같이 차분해진 아이를 등진 후 메피스토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무너진 가로등과 나무들 사이로 메피스토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를 가로질렀다. 사이렌 소리는 그가 즐기던 락 음악과 다르지 않았다. 가스와 연기, 구름이 하늘을 가린 탓에 저녁이 찾아왔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메피스토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계엄군의 군화에 짓밟히고 있는 길을 피해 골목에 들어섰다. 그는 간판이 없는 지하의 바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무너질 듯 낡은 계단을 밟고 지하 바로 내려간 그의 앞. 거대한 남자가 입구를 막아섰다. 거대한 덩치의 남자는 메피스토를 내려다보았다. 메피스토는 자신을 째려보는 그의 얼굴에 지옥 불을 뱉어내었다. 거구의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불이 붙은 해골을 가린 채 계단을 뛰어오르는 남자를 뒤로하고 메피스토는 바의 테이블에 앉아 숨을 헐떡였다.
바 안에서 정갈한 머리, 깔끔한 옷차림의 젊은 남자가 나와 메피스토를 맞이했다. 남자는 두 잔에 얼음을 채우고 위스키를 부었다. 잔을 건네는 남자에게 메피스토가 말했다.
“뭐 좀 물어보자, 데미안.”
“왕자님이라고 부르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