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알 Ⅱ

8

by 박규동

차가운 햇볕 아래,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 사령관의 캠프 문을 바라보았다. 주변 병사들은 그를 구경하기 바빴고, 메피스토는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천막을 젖히고 나온 사령관이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쌀쌀한데, 들어오시죠.”


캠프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앉았던 의자와 사용했던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사령관은 메피스토의 관찰을 방해했다.


“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차?”

“커피.”


사령관은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놓고 자리를 잡았다. 메피스토는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는 사령관을 응시했다.


“할 말이 있다고 불러놓고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보이시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부관이 전했겠지만, 오늘 오후에 계엄령은 해제됩니다.”

“뉴스에 나올 정보는 어떻게 통제할 생각이요? 병자들을 치유하는 남자와 파리떼에 공격받는 군인들에 관한 이야기.”

“언론과 출판 업계에는 보도지침과 보안법에 따른 가벼운 검열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메피스토는 한심하다는 듯 한쪽 입가를 올린 후 커피를 들이켰다. 사령관은 악마의 미소에 담긴 뜻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군인으로서 국가에 혼란을 줄 정보보다는 검열이 낫다고 판단합니다. 차악을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검열이란 것은 과거와는 궤를 달리합니다.”


메피스토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예의를 위한 대화를 이어갔다.


“어떻게 다릅니까?”


사령관은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재생했다.


“음악 좋아하십니까?”

“너바나의 음악이네요. 커트 코베인이 죽었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마치 엊그제 같네요.”

“내가 말하는 검열이란 이런 겁니다. 과거처럼 입을 막고, 삭제하고 지우는 방식이 아닙니다. 국가가 문맥을 결정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국민이 토론할 문제점과 해결책까지도 국가가 결정하고 제공합니다. 그런데 당신, 당신이 보여준 기행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알아서 꺼져달라, 이런 거요?”

“한미 연합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계엄이 끝나면 당신을 체포하여 넘겨달라고 합니다. 솔직히 묻겠습니다. 군인들이 모두 철수하고 나면, 체포에 응하시겠습니까?”

“체포당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사라지는 편이 낫겠네요. 계엄이 끝나고 군인들이 철수하면 제가 알아서 꺼져드리겠습니다.”


사령관은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그는 메피스토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넨 후, 나머지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재떨이에 재를 털어낸 사령관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군인이 아닌, 일개 인간으로서 묻는 겁니다. 당신이 진정 교회에서 말하는 메시아입니까?”


메피스토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어차피 당신이 듣고 싶은 답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이 믿을 말이 있고, 믿지 않을 말이 있겠지요. 진실을 말하는 자는 자신이 한 말을 모두 기억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일 뿐입니다.”


메피스토는 천막 문을 열고 고개를 숙여 캠프를 빠져나왔다. 줄지어 정렬된 군인들 사이로 그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


같은 시간, 벨리알은 눈을 감고 기도하며 병자들 사이를 걸었다.


'아몬, 나의 형제여. 내가 나의 의무가 있듯, 너도 너의 의무가 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이다. 계약자들의 채권을 회수해라. 내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지는 분명 네가 더 잘 알 터이니.'


벨리알은 모세와 가인, 레라가 앉아 있는 저택 문 앞에 섰다. 악마는 모세를 내려다보았다. 어색하게 인사하는 모세를 바라보는 벨리알의 눈빛엔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기분이군.'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목사의 눈빛에서 모세는 불길함을 느꼈다.


“목사님, 저희 부모님 하고 연락해 보셨어요?”


모세가 태어나기 전, 그의 부모님이 원했던 것은 그들의 건강도, 태어날 아들의 안녕도 아니었다. 그들의 유일한 기도, '제발 이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의 반복되는 기도는 결국 분노 섞인 일갈로 변했고, 그들이 기도를 올리던 십자가를 부러뜨린 순간, 기도는 이루어졌다. 나약한 남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혼을 담보로 얻은 성공은 그들에게 거대한 저택과 넓은 잔디,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대문을 선물했다.


시작은 간단했다. 얻은 부를 즐기기에 바빴다. 두 번째는 궁금증이었다. 그들이 담보로 내놓은 영혼이란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 번째, 궁금증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매주 교회에 들러 회개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때가 부모님과 모세와의 사이가 멀어졌을 즈음이었다. 아몬에게 얻은 돈은 모세 부모의 주머니를 거쳐 벨리알의 헌금함으로 들어갔다. 목사는 아몬이 빚을 수확할 시간이 올 것임을 항상 알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부모님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세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목사는 모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모세에게 차갑게만 느껴졌다.


“모세야, 미안하다. 두 분은 분명 천국으로 가셨을 거야.”


자신에게 쏟아지는 햇빛에 모세는 오히려 분노를 느꼈다. 믿지 못할 이야기에 세상이 도는 듯 어지러웠다. 모세는 벨리알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왜 저의 부모님이 죽어야 되는 건데요?”

“하필 도심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계엄령이 발동되었으니, 너를 위해 억지로라도 통제된 이곳에 돌아오려 무리하셨겠지.”


어지러움을 느끼던 모세는 정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왜 슬픔이 아닌 분노를 느끼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레라와 가인은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침묵했다. 메피스토처럼 긴 손톱을 가진 목사의 손을 내려본 모세는 무섭도록 차분해져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 저희 부모님이 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는지 물었습니다.”

“말했잖니, 도심이 통제되는 바람에….”


모세는 무섭게 목사를 응시했다. 대악마 벨리알은 고등학생 남자아이의 눈빛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모세는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부모님이 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남자가 있었다.”


모세는 멀리서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오는 메피스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벨리알은 모세가 두려운 것인지, 다가올 상황이 불편한 것인지 자리를 피해 병자들 사이를 지나쳤다. 메피스토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벨리알의 표정을 관찰하고, 저 멀리 대문 앞에 앉아 있는 모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메피스토는 자신을 지나치려는 벨리알의 팔을 잡았다.


“뭡니까?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거짓말을 하고 오는 길은 아니니, 안심해라.”


메피스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배 목사. 저번에 한 말 진심이요?”

“무슨 말?”

“교회에 있다 보면 신이 된 것 같다는 기분.”

“그저 표현 방식 중 하나일 뿐이지.”

“나 역시 진심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듣고 있다는 것.”


벨리알을 지나쳐 저택 대문에 도착한 메피스토는 허망하게 앉아 있는 모세를 내려다보았다. 모세는 그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갔다. 그 짧은 순간에도 메피스토는 모세의 눈에서 분노와 의심이 가득한 불꽃을 볼 수 있었다. 레라는 메피스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메피스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악마와의 계약은 어길 수 없어.


'내 잘못이 아니야.'


두 생각 모두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앉은 메피스토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사령관은 일부러 나를 불러낸 것이군.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목사는 모세에게….


메피스토는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까치발을 들어 군인들이 있는 곳을 훑었다. 철수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제 우리도 돌아가야 하나?'


'아니야. 저놈들이 다시 와서 메시아를 공격할 수 있어.'


'그래. 우리는 메시아를 지켜야 해.'


자신을 갖고 놀았다는 깨달음에, 메피스토는 분노가 서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군인들을 순순히 물러나게 할 수 없었다. 내기를 시작한 아버지의 교만과 분노가 메피스토에게 고스란히 발현되었다. 모세와의 관계는 이미 깨진 유리처럼, 되돌릴 수 없어 보였다. 데미안의 조언을 되새기려 했으나, 분노가 그의 기억을 흐렸다.


메피스토는 병자들을 밀치며 시체 더미로 쌓인 벽 위에 올라섰다. 이내 군인들을 치료할 때 그러했듯이 다시 한번 손톱으로 손목을 그었다. 쏟아져 나온 피는 치유의 가을비와 거리가 멀었다. 분노를 머금은 피의 파도가 군인들을 덮쳤다.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피 속에서 군인들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피의 파도는 사령관의 캠프를 뒤덮고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메피스토의 손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피 속에서 개구리들이 태어났다. 피에서 자라난 수많은 개구리는 군인들이 헤엄치지 못하도록 그들을 핏속으로 끌어들였다. 청년들이 핏속에서 익사하자, 사령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 사령관은 허리까지 가득 찬 핏속을 걸어가며 개구리들을 향해 총을 쏴대었다. 혼돈 속에서 울려대는 총성은 종말의 날 나팔 소리와도 같았다.


메피스토의 피가 멈추자, 시체 더미 위의 그는 양팔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의 분노가 닿을 듯 높은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져 내렸다. 날카로운 우박은 군인들의 피부를 관통했다. 하늘이 피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하늘에서 추락하는 우박에는 불이 붙어 군인들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피와 우박, 그리고 공포는 골목의 하수구로 흘러내려갔다.


메피스토에게 치료받은 병자들은 이러한 광경에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어야 했던 구세주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시민들은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박을 떨어뜨리는 메피스토의 눈에 분노의 불꽃이 타오를 때, 그는 문득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존재를 감지했다. 마르고 창백한 남자는 메피스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하늘로 뻗은 메피스토의 팔을 내리며 진정시켰다.


“이것이 네가 천국에 가는 방식이냐? 사람들을 돌아보아라 메피스토. 저들이 무슨 잘못을 지었다고 너와 아버지의 내기에서 희생되어야 하지? 내려와라.”


데미안은 시신으로 쌓은 벽 위에서 바닥을 향해 사뿐하게 뛰어내렸고, 메피스토 역시 데미안을 따라 검은 코트를 펄럭이며 골목 바닥에 착지했다.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메피스토에게 데미안은 이야기했다.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모든 이유를 네가 보여주는구나. 내가 아버지에게 말해주겠다. 내기는 이쯤에서 접도록 하지.”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데미안. 방해하지 마라.”


데미안은 메피스토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닌 건가.'


총성과 비명이 줄어드는 저녁, 메피스토는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데미안에게 건넸다. 휴대폰에서는 녹음된 벨리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 된 기분이라고.’


데미안은 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었어. 이건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려야겠네.”


데미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겁에 질려 도망친 시민들이 떠난 자리, 그곳에는 레라와 가인만이 남아 있었다. 데미안은 그들의 표정에서 깊은 우려를 읽었다.


“사적인 일은 알아서 해결해라.”


노을이 완전히 어둠에 물들었을 때 데미안은 길을 떠났다. 메피스토는 저택 앞에 앉아 레라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면 좋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끝없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 그게 악마들의 존재 의의 아닌가요?”

“악마에 대해 참 잘 알고 계시네요. 저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 것이 자유는 아닐 거예요.”


메피스토는 모세가 있는 방을 잠시 쳐다본 후 길을 떠났다. 레라와 가인은 골목을 벗어나는 메피스토를 붙잡지 않았다.


도시의 중심으로 나온 메피스토는 총을 겨누는 경찰들을 무시한 채 편의점에 들어서 물 한 병을 구매했다. 메피스토는 물을 와인으로 바꾼 후 들이마셨다. 사소한 기적을 목격한 경찰들은 총을 내렸다. 메피스토는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병에 담긴 피를 들이키며 정처 없이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데미안의 술집으로 이끌렸다.


술에 취해 길을 걷는 메피스토의 트림에서는 지옥의 불꽃이 타올랐다. 술집 앞에 도착한 메피스토는 흔들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얼굴에 붕대를 감은 거대한 문지기가 있었다. 메피스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남자는 한숨과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바에 앉은 메피스토는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젊은 남자 직원에게 호통쳤다.


“사장 나오라고 해.”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메피스토는 젊은 직원의 노란 눈을 또렷이 바라보았다.


“뭐야, 너도 악마잖아. 데미안에게 전해라. 별 뜻 없이 그저 한잔하러 왔다고.”


바 뒤편의 문이 열린 후, 방금 설거지를 끝낸 듯 손의 물기를 터는 데미안이 메피스토의 앞에 섰다. 창백하며 소년 같은 외모의 데미안은 술에 취한 메피스토를 불쌍한 듯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얼음잔을 꺼내 한숨처럼 위스키를 부어 메피스토에게 건넸다. 메피스토는 잔을 바라보았다.


“데미안, 너는 인간 세상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지?”

“나야 뭐, 아버지랑 한 곳에 같이 있는 건 질색이니까.”

“어떻게 견디지?”

“무엇을?”

“네 주변의 인간들이 늙거나 병들어 죽는 것을.”

“그렇다고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것이 자연의 일부인 걸. 악마와 계약하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은 인간이라면, 보내줄 때 보내줘야지.”

“아니야, 죽음은 오히려 쉬워. 우정을 배신하고, 우정에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이는 거짓을 고백하고.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견디는 거지?”


메피스토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 라이터의 숫돌을 굴렸다. 기름이 떨어진 라이터는 불꽃을 허락하지 않았고, 메피스토는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던졌다. 데미안은 동정 섞인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며 손끝에서 뽑아낸 불꽃으로 메피스토의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지옥 불은 싫다. 이제 지겨워. 그나저나 벨리알은 어떻게 됐어? 아버지에게 고발했나?”


데미안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 놓쳤어. 분명 다른 몸에 빙의해 숨어 있는 것이지. 그 위대한 솔로몬조차 잡지 못한 족제비 같은 녀석이잖아.”

“신성모독이라는, 단 하나의 쉬운 규칙을 파기하다니. 멍청하기에 족제비처럼 숨어 살 운명이지.”


데미안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메피스토는 취했지만, 그의 눈치를 예민하게 읽어냈다.


“왕자님이 무슨 할 말 있으면 하셔야지.”

“메피스토. 이번 내기는 말이다….”

“아니야. 그 얘기는 해주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이제 어째야 하는지만 알려줘.”


교만의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데미안은 이 상황을 이겨낼 방법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말했잖아. 아버지는 본인이 질 수 있는 내기는 하지 않는다고.”

“그런 것 말고, 답이나 알려주라고. 답만 명확하게 말이야.”

“노력을 해봐.”

“노력하라고? 그게 조언이야? 아니, 그걸 답이라고 주는 거야?”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법이지. 그만한 혼란이 있나?”

“별 도움이 안 되는구먼.”


자리에서 일어난 메피스토는 비틀거리며 거구의 남자가 있는 문을 향해 걸었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문지기의 눈빛을 피해 계단을 올랐다. 바깥으로 나선 메피스토는 탁한 도시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가 내뱉는 입김에서 흘러나온 지옥 불은 모세의 집 방향을 가리켰다. 메피스토는 그 마음속 불꽃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모세의 집으로 향하는 길, 그가 바라본 도시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 부러진 가로등. 메피스토는 그중 쓰러진 가로수 나무들에게만 연민을 느꼈다. 군인과 병자들이 가득했던 골목에는 아직 최루탄과 죽음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달빛 아래 빈 골목을 비틀대며 걸어가던 메피스토는 모세의 집 대문을 열고 잔디 위,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창을 통해 불이 꺼진 거실의 소파에 잠든 레라와 가인을 볼 수 있었다. 유난히 빛나는 금성의 빛 아래 잠든 메피스토에게 레라는 소리 없이 다가섰다. 레라는 메피스토의 의자 옆 잔디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진한 눈썹과 턱수염, 뒤로 넘긴 검은 머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잠이 든 메피스토는 레라에게 잠꼬대하듯 이야기했다.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것이요? 아스모데우스가 순수한 여자아이의 몸에 빙의했을 때, 당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소. 레라지에. 처음 나는 인간과 사랑에 빠진 줄 알았어. 낭만적이고, 악마들은 이제 지겨우니까. 아버지의 명을 받고 왔나? 당신도?”


레라는 메피스토의 이야기에 어떠한 답도 할 수 없었다. 레라는 눈을 감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육체가 아닌 영혼에 화살을 쏘는 악마 레라지에는 메피스토의 영혼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싶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불쌍한 두 악마는 한 고아의 집 정원에서 잠이 들었다.


메피스토는 숙취와 강렬한 햇볕에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레라를 내려다보았다. 메피스토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현관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혹시나 모세일까, 메피스토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모세가 아닌 가인은 눈을 비비며 메피스토의 옆에 앉았다. 가인 역시 아무 말 없이 메피스토의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메피스토가 말을 꺼내기 전, 가인은 눈을 감은 채 이야기했다.


“방문도 잠그고, 마음의 문도 잠그고 며칠이나 있을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세도 분명 알 거예요. 아저씨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란 걸. 저를 믿으세요. 저보다 모세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잔디에는 새벽의 이슬이 맺혀 있었다. 두 친구는 바지가 이슬에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메피스토의 옆을 지켰다. 숙취에서 벗어나려 나태의 악마에게 기도를 올리려던 메피스토는, 옆에 앉아 잠든 두 여인을 보고 그저 눈을 감았다. 악마는 기도가 아닌 낮잠을 선택했다.


메피스토는 현관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잠옷 차림의 모세는 메피스토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메피스토 역시 웃음을 지으려는 찰나,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모세를 위한 문, 그리고 불길한 직감이 들어오는 대문, 두 개의 세계가 동시에 열렸다. 저택의 대문에는 계엄을 이끌었던 사령관이 사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는 목사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나를 아버지에게 고발해? 내가 말했지. 나는 내가 살던 인생이 좋았다고.”


사령관은 안주머니에서 차가운 권총을 빼냈다. 영혼을 잃은 군인은 메피스토를 향해 무거운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의 총성이 울린 후 메피스토는 본인의 육체를 확인했다. 상처 하나 없는 메피스토는 혼잣말 같은 욕설을 내뱉으며 도망가는 벨리알의 뒷모습을 허무하게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모세와 눈물을 흘리는 레라를 바라보았다. 메피스토가 오른편을 돌아보았을 때, 이미 가인의 미간과 가슴에는 총알이 관통한 후였다. 새벽이슬이 맺혔던 잔디는 선연한 핏물에 젖었다. 메피스토는 귀에서 떠나지 않는 총성과 모세의 눈물에도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메피스토의 내기가 끝나기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 모세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모세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갔다. 메피스토와 레라는 모세가 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메피스토는 모세의 방 문이 영원히 열리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메피스토와 레라의 눈에는 약하디 약한 불꽃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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