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차가운 지하실 계단에 앉은 메피스토는 두 손을 모아 불이 타오를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안드로말리우스. 나의 기도를 듣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소.'
바닥에서 불꽃이 피어올랐고 춤추듯 사그라든 화염 뒤로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피스토가 뱀에게 입을 열기도 전, 뱀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네. 자네가 무슨 부탁을 할 줄도 알아. 조금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학생을 괴롭히는 불량배 몇은 얼마든지 뱀의 먹이로 던져주지. 그러나 이제 멈춰야 해.”
“나는 마녀를 사냥할 뿐이오.”
“자네를 돌아보게.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내가 알던 악마 메피스토는 어디로 갔는가?”
“복수의 뱀, 악마 안드로말리우스. 나의 기도에 응하시게. 벨리알은 어디에 있는가?”
“알려줄 수 없네. 인간 세계의 문제로 형제끼리 이런 분쟁을 벌이는 것은 옳지 않아.”
“언제부터 악마들이 서로 간의 갈등을 두려워했지? 안드로말리우스.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사실대로 말해주시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오. 개입하지 말라고 하더군.”
“위? 아버지의 말씀인가?”
“그보다 더 위를 말하는 걸세.”
지하실의 계단에 앉은 메피스토는 불꽃 섞인 헛웃음을 터뜨리며 지옥처럼 끓어오르는 가슴의 분노를 차갑게 식혀냈다.
“솔직히 이야기하지. 나의 사적인 감정이 담긴 것은 사실일세. 허나 나는 데미안 왕자의 임무를 도울 의무가 있네.”
“데미안 왕자를 만났는가?”
“벨리알은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다네. 미워도 부모라고, 아버지의 친자식이 그런 꼴을 두고 볼 수는 없겠지. 궁금하면 데미안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안드레알푸스가 아버지에게 닿을 높이의 바벨탑을 지었을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않는가? 불쌍하고 멍청한 공작새로 평생을 살게 되었지.”
지하실의 바닥을 기어 다니는 붉고 거대한 뱀은 눈을 깜빡이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 역시 메피스토의 꾀를 모르는 악마는 아니었지만 벨리알의 오만과 신성모독의 심각성 역시 알고 있었다. 복수의 뱀은 나름의 절충안을 내뱉었다.
“지옥에 있는 누군가가 말하더군. 불이 붙은 전차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천사가 전차를 몰고 있다고 하네.”
“지옥으로 도망을 갔군. 그 정도면 되었네. 감사를 표하지.”
“나는 그저 신성모독에 동참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줬을 뿐이네.”
붉고 거대한 뱀의 몸에서 다시 불꽃이 타올랐다. 백작 안드로말리우스는 메피스토가 벌이는 일에 연루되기를 극도로 꺼리는 듯했다. 그의 몸이 불에 타오르며 지옥으로 돌아가는 길, 메피스토는 뱀의 몸을 붙잡아 함께 불타올랐다. 지옥 불로 변해가는 화염 속에 안드로말리우스는 메피스토에게 소리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어차피 지옥으로 가는 길 아닌가?”
메피스토는 유황과 재의 향을 맡으며 뜨거운 바닥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그의 옆에는 뱀이 그려진 창을 든 적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메피스토는 남자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고맙네. 안드로말리우스. 내가 분명히 보답하지. 사기꾼과 도둑을 잡는 것이 자네의 천국 아니겠나? 내가 벨리알을 잡아 전리품을 얻는다면, 자네에게 선물하지.”
“주면은 받겠지만, 나는 분명히 말했네. 인간사의 문제로 인한 형제들끼리의 분쟁에 반대한다고.”
적발의 남자는 다시 뱀으로 변해 지옥의 어두운 골목길로 빠져나갔다. 메피스토는 오랜만에 지옥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두운 하늘의 불꽃, 불타버린 폐허, 흩날리는 재. 그립지 않던 풍경이 반가웠다. 메피스토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유심히 관찰했다. 붉은 하늘에는 유성이 떨어진 듯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메피스토는 그것이 벨리알의 전차일 것이라 확신한 후 길을 나섰다.
메피스토는 유성의 흔적을 좇아 길을 나섰다. 끝없이 걷던 그는 악마들이 지은 폐허조차 없는 불의 사막에 지쳐 주저앉았다. 메피스토는 불씨가 섞인 사막의 모래를 한 줌 쥐어 입에 집어넣었다. 맛이 없다는 듯 뱉어낸 모래에서 벨리알의 환영이 불처럼 일렁였다.
“메피스토펠레스. 나의 형제. 정말로 이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생각이야?”
“너는 내 친구의 머리와 가슴에 총알을 박아 그의 육신을 죽였다.”
“인간이잖아. 진짜 형제는 우리라고. 여기가 너의 집이야. 둘러봐.”
메피스토는 붉게 타오르기만 하는 사막을 둘러보았다. 가을의 이슬비와 은행나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쳐 자리에 앉은 그는 벨리알의 환영이 있는 곳을 향해 사막의 모래를 던졌다. 모래에 벨리알의 환영이 사라지자, 메피스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이 붙은 모래를 바지에서 털어냈다.
한참을 걷던 메피스토는 멀리 피어오르는 불빛을 감지했다. 사막 언덕에 오르자, 그의 눈앞에는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이 불처럼 일렁였다.
도시가 시작됨을 알리는 나무들은 충분한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메피스토는 나무에 손을 올렸다. 뜨겁지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메피스토는 손을 올려두었다. 도시는 지옥 불이 아닌 인간들이 만든 듯한 조명에 잠겨 있었다. 메피스토는 바이올린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를 향해 홀린 듯이 걸어 들어갔다. 그는 바의 의자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주문했다.
'믿기지 않는군.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아. 지옥에서 차가운 음료를 다 마셔보네.'
바 테이블 너머, 매혹적인 여성 직원은 레몬을 썬 후 입에 물었다. 그녀는 테킬라를 따르며 메피스토에게 말했다.
“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죠?”
메피스토는 눈앞에 놓인 테킬라를 한 번에 목뒤로 넘긴 후 레몬을 물고 있는 여성의 입술로 향했다. 그는 데미안이 건네주던 술과 그곳 직원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이내 여성의 입술에 놓인 레몬을 물려던 메피스토는 그녀의 목을 강하게 손으로 잡아 올렸다. 이내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벨리알의 환영은 메피스토에게 말했다.
“너 때문에 아버지한테도, 데미안한테도 도망을 다녀야 하는데. 왜 너까지 이러는 거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너 잘못이라니까? 어서 인간계로 돌아가서 너의 멍청한 내기를 끝내기나 해.”
메피스토는 액체가 되어 흐르는 벨리알의 환영을 손에서 털어냈다. 환영이 사라지자 도시와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선율조차 한 줌의 모래로 바람에 휘날렸다. 메피스토는 다시 한번 불이 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의 전차가 추락한 흔적은 그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메피스토가 걸어가는 길에 차가운 음료나, 매력적인 도시는 없었다. 지옥의 악마들도 걷지 않는 사막에서 메피스토는 지쳐갔다. 뒤쪽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엔진소리에 메피스토는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40년은 더 되어 보이는 검은 머스탱은 메피스토의 앞에 멈춰 섰다. 내려진 창문 안으로 메피스토는 고개를 숙여 핸들을 잡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메피스토는 한숨을 내쉰 후 부서질 듯 녹이 슨 차의 문을 열어 자리에 앉았다. 메피스토가 안전띠를 매자 차는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출발했다.
핸들을 잡은 하얗고 털이 난 손, 반지가 가득한 손가락과 명품 시계를 걸친 손목을 지나 선글라스를 낀 채 운전하는 남자는 메피스토에게 말했다.
“나는 이때 갖고 있던 육체가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늙은 목사의 몸보다는 훨씬 낫지.”
메피스토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벨리알의 또 다른 환영에게 침묵했다. 그는 창밖의 사막을 바라보았다. 운전석의 남자는 메피스토의 눈치를 살폈다.
“베트남전이 끝나고 몇 년 뒤였지. 물질의 악마 아몬이 새로운 몸을 얻기 전이었어. 우리의 주머니는 풍족하지 않았어. 이런 사막을 달리고 있었잖아. 뉴욕에서 출발해서. 베가스까지. 베가스까지 6시간, 아니면 6시간 반 정도 남았을 때의 모습이지. 지금 창밖의 모습 말이야.”
“정확히는 7시간이야.”
“그래. 베가스의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온갖 약에 취해 있었지.”
“시대가 그랬으니까.”
“좋은 시절이었어. 우리는 베가스에 데미안 왕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첩보를 받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떠났지. 그러나 그건 핑계였던 건 알지?”
“그래. 우리는 데미안을 찾는다는 핑계로 베가스에서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냈어.”
메피스토는 창밖에 펼쳐진 베가스의 밤,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벨리알과 함께 카지노에서 주사위를 던지던 기억을 떠올렸다. 인간들과 주먹으로 싸우기도 하던 시절. 운전석의 남자는 메피스토를 추억에 빠트리고 있었다.
“여기 호텔에 차를 세울까? 예전처럼 놀 수도 있어. 아니면 차를 돌릴까? 너는 인간계로 돌아가서 아버지와의 놀음을 끝내는 거야. 좋았던 시절을 생각해 봐. 여기가 너의 집이고 내가 너의 진짜 형제야.”
메피스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천 년의 수레바퀴를 함께 굴러온 형제와의 싸움과 우정. 그리고 순간에 불과한 인간들과의 우정. 그가 차의 창문을 올리자 창밖의 호텔과 환락은 모두 사막의 모래로 녹아내렸다.
“멈추지 마. 차를 돌리지도 말고. 확실히 베가스로 가는 길과 그날의 밤은 즐거웠어.”
“그날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알잖아? 함께 니체를 괴롭히던 날을 떠올려봐. 아니면, 사라예보에서 총성을 울리던 날은 어때?”
“말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 거의 다 왔나 보군. 지옥에서 다른 악마에게 죽으면 기억을 잃고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지. 세금도 내고, 학교도 다니고, 보험도 가입할 준비를 해야 할 거야 벨리알.”
“나는 그런 이야기 안 믿어.”
검은 머스탱은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붉은 하늘에 닿을 듯한 궁전의 대문은 메피스토를 맞이했다. 벨리알의 정원을 바라보는 메피스토는 미소를 지었다. 벨리알의 욕심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그는 등 뒤에 모래바람으로 변하며 사라지는 머스탱의 엔진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메피스토는 정원의 길을 거닐며 괜스레 옆의 풀과 나무를 만져보았다. 푸른 잎과 꽃은 지옥불처럼 뜨거웠다. 그는 길을 막는 분수를 올려다보았다. 끓어오르는 분수에 손을 넣은 메피스토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메피스토는 황금으로 도금된 저택의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잠시 옆을 바라본 그는 정원의 잔디를 불태운 채 나뒹구는 불의 전차를 볼 수 있었다. 벨리알의 저택에 첫발을 디딘 순간, 메피스토의 세상은 어지럽기만 했다. 메피스토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눈앞에는 거울로 만들어진 높은 계단과 벽이 있었다. 메피스토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반사하는 계단에 한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는 깨질지도 모르는 계단을 끝없이 올랐다. 벽에 반사되는 본인의 모습이 바보같이 보이기도 했다. 가까워지는 위층에선 벨리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너의 인간 친구를 죽여서 미안해. 사과할게. 됐지?”
메피스토는 계단을 오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옥상에 닿을 듯 불꽃이 섞인 목소리로 벨리알에게 말했다.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것 다 알고 있어.”
“그래. 안 미안해. 고작 인간일 뿐이잖아. 미안하지는 않아. 그래도 합의점을 찾아보자. 내가 뭘 해주면 좋겠어?”
메피스토는 유리로 지어진 계단의 끝에 올랐다. 그는 본인을 반사하는 유리문을 힘차게 당겨 열어냈다. 그곳의 바닥, 서재, 책상, 피아노, 모든 것은 악마를 비추는 거울로 만들어져 있었다. 피아노 의자에는 가운을 두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하나의 몸에 두 천사의 머리를 가진 남자는 문 앞에 선 메피스토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거래하자. 네가 원하는 것을 줄게. 내 모든 권능을 이용해서라도, 네가 원하는 것을 줄 테니, 여기서 나를 죽이지 말아다오. 메피스토.”
두 개의 머리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고대의 조각상과도 같은 두 얼굴은 당황하고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메피스토는 오른쪽의 머리의 옆에 다가가 귓속말을 읊조렸다. 벨리알의 왼쪽 머리는 소리쳤다.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아버지가 나를 원자단위로 분해하실 것이야.”
“교회를 차리고 신의 행사를 하는 것보다 나쁠까? 어차피 예언된 날이 찾아오는 것뿐이야. 뭐, 나의 제안이 싫다면, 데미안을 부를 거야.”
천사의 모습을 한, 두 개의 머리는 고민에 빠진 듯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메피스토는 벨리알의 침묵을 동의로 간주한 뒤 그의 창백한 손목을 들어 올렸다. 메피스토는 벨리알의 손목에 감긴 시계의 시간을 맞추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72시간…?'
메피스토가 벨리알의 팔을 놓아주자 벨리알은 손목에 걸린 시계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72시간 뒤로 멈춰진 시계는 석고와도 같이 굳어갔다. 두 개의 머리는 안심한 듯 메피스토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된 거지?”
“그런 셈이지. 그런데 72시간 안에 당신이 또 무슨 꾀를 부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손목에 걸린 시계를 봐라. 아버지가 예언을 위해 나에게 하사하신 시계야. 나도 이걸 갖고는 장난칠 수 없다고.”
“그건 그렇지.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메피스토는 벨리알이 앉아 있는 의자 옆의 피아노 건반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금이 가며 부서진 유리 조각을 쥔 메피스토는 검지를 그어, 반짝이는 거울 바닥에 피를 흩뿌렸다. 피는 데미안의 인장을 그려낸 후 불타올랐다. 거대한 화염이 사그라든 후 나타난 데미안을 바라본 벨리알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와 긴 다리의 데미안은 벨리알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신성모독이 중죄이기는 하지만, 동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피아노 앞의 세 악마는 서로를 경계했다. 데미안은 피아노에 손가락을 올린 후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잘했다. 메피스토. 혹시 또 쓸데없는 계략을 꾸민 것은 아니길 바란다.”
“그런 것 없으니까, 이제 집에 보내줘.”
데미안은 유리로 만들어진 깨진 피아노를 연주했다. 감미로운 음악은 어떤 지옥의 마법보다 위대했다. 음악에서 깨어난 메피스토는 데미안의 연주를 멈췄다.
“잠시만, 데미안.”
“다 끝난 것 아니야?”
“맞아. 다 끝이야. 아버지에게 전해줘. 어차피 모두가 겪는 몇만 년의 고통인데, 한 번쯤은 용서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말이야.”
데미안은 미소를 지으며 피아노 연주를 이어갔다. 그가 마지막 음표에 소리를 울리자 거울로 지어진 저택은 높은음의 파괴음을 내며 깨지며 쏟아졌다. 세 악마는 유리 파편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추락의 가속도에 급히 눈을 뜬 메피스토는 모세의 집 정원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테이블에는 레라가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메피스토를 바라본 레라는 웃으며 커피를 권했다.
“지옥 냄새가 나요.”
메피스토는 자신의 옷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곳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도, 냄새는 지워지지 않네요.”
레라가 건넨 커피를 받아 든 메피스토는 자신이 잊고 있던 현실로 돌아왔다. 병자들을 고치던 자신의 모습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받은 모세도, 모든 현실이 돌아온 듯했다. 메피스토는 지옥이 더 편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는 레라가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그녀의 하얀 얼굴이 햇볕에 잘 어울리는 꽃과 같다는 생각을 잃지 않았다. 메피스토는 물었다.
“이제 어떡하죠?”
“기다려야죠.”
레라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모세가 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메피스토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믿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메피스토 역시 레라의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모세를 기다렸다. 레라와 커피는 메피스토의 지루한 기다림을 오전의 낭만으로 바꾸어놓았다.
“모세가 방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죠?”
“3일이요.”
메피스토는 손가락을 이용해 지옥과의 시차를 계산했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메피스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메피스토. 자네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그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준다는 약속을 잊지 않았지?’
질병의 악마 마르바스에게 온 메시지였다. 메피스토는 귀찮음에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레라와 메피스토가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그들은 모세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메피스토는 모세가 문을 열 때 쏟아져 나오는 빛을 똑똑히 보았다. 분명 씻지도, 먹지도 못했을 모세는 깔끔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모세는 천천히 다가와 레라와 메피스토가 있는 식탁에 앉아 장난스럽게 메피스토가 마시던 커피를 뺏어 마셨다.
메피스토는 자신이 기적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세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인지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레라는 모세가 인간임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빛과 신성은 설명할 수 없었다. 메피스토를 향하는 모세의 목소리엔 빛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저씨가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생각했죠. 언젠가는 분명히 아저씨보다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지. 부모님을 잃은 것을 용서하고 나니, 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어요. 사랑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사라진 거죠. 솔직히 처음에는 모든 게 아저씨 탓 같았어요. 부모님이 죽은 것도, 가인이가 죽은 것도. 그렇게 아저씨를 미워하다 보니까, 아저씨보다 위대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아저씨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용서하고 사랑해 보려고요. 나한테 잘해줄 때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건 너무 쉽잖아요? 아저씨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선과 악 같은 건 없을지 몰라요. 그런데 적어도 저한테는, 사랑을 배신하는 모든 것은 악이에요.”
메피스토는 옅은 미소를 지은 후 다시 모세에게서 자신이 마시던 커피를 뺏어와 홀짝였다. 레라는 웃으며 모세를 따뜻하게 챙겼다.
“배고프지?”
정오의 식사를 즐기는 두 악마와 한 아이는 가족 같아 보였다. 메피스토는 밥을 먹는 모세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용서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어?”
“당연히 어렵죠. 그런데요, 꿈을 꿨어요. 침대에 누워 잠만 자고 있었는데, 저 멀리에 태양만큼 밝은 빛이 있는 거예요. 그 앞에는 괴상하게 생긴 천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 법정의 피고인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데미안은 메피스토에게 말한 적이 있다.
‘영계의 일은 인간세계의 천문, 또는 인간들의 꿈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메피스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천사는 어떻게 생겼는데?”
“그 왜, 고대 조각상들 있죠? 미대생들이 보고 그리는 거. 그런 머리가 두 개가 달려 있었어요.”
“그래서, 그 천사는 용서받았니? 빛에?”
“네. 그 모습을 보니까, 용서하는 것이 어렵지 않더라고요.”
메피스토는 다리를 떨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는 그가 인간계에 온 목적을 모세에게 말해줄 시간이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인간 세상에 온 목적이 비밀이 될 것이라 예상치 않았다.
“모세야, 혹시 그 천사의 손목에 시계가 있었니?”
모세는 답을 하려 급하게 입안의 음식을 삼켜냈다. 모세가 입을 여는 순간 셋은 바깥 저택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메피스토는 레라와 모세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수신호를 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을 열고 정원에 나온 메피스토는 반갑지 않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가인의 목숨을 앗아간 장군은 메피스토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메피스토는 겁이 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모세와 레라는 집 안에 있으라는 메피스토의 말을 무시한 채 밖으로 나왔다. 두 악마와 한 아이의 앞에선 남자는 정원의 잔디 위에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주세요. 저도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메피스토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누굴 용서해. 네가 날 용서한다고?”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제가 이곳에 와서 총으로 한 여학생을 살해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었을 때, 마치 그것이 현실인 듯 눈물이 흘렀습니다. 두 번째 꿈은 제가 빛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빛은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빛이 저에게 베푸신 자비와 용서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용서받고, 용서하라.’ 제가 이곳에 앉아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입니다.”
“여자아이를 쏜 것이 꿈이었다고? 넌 실제로 너의 손으로, 너의 총을 이용해서 여자아이를 죽였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꿈일 뿐이었습니다.”
무표정의 모세는 메피스토를 지나쳐 무릎을 꿇은 남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메피스토는 모세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메피스토와 같은 본성을 지닌 레라 역시 모세를 막고 싶지 않았다. 음식을 먹던 포크를 든 채 장군의 앞에선 모세는 무릎 꿇은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안에 들어와서 차 한잔하세요.”
모세는 죄책감과 공포에 몸을 떠는 남자를 부축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라는 메피스토의 손을 잡았다. 모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목소리엔 희망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병자를 고치던 당신을 메시아라 했지만, 어쩌면 모세가 진정 그 사람일지도 모르겠네요.”
“진정한 구원자가 돌아오는 날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레라 씨는 알고 있죠?”
“심판의 날이요?”
레라는 메피스토가 재밌는 농담을 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이제야 아버지의 계획이 있는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군.”
“뭐가요?”
“심판의 날은 거짓이나 비유가 아니에요. 아버지는 자신의 시계를 가장 믿을 수 없는 악마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그 악마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시계를 앞당겼습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앞당겼다고요? 도대체 왜요?”
“모세가 날 용서해 줄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차피 악마니까, 이곳의 종말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레라는 메피스토의 앞에 선 채 그의 양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았다.
“그게 다예요? 솔직하게 말해줘요. 한 번만이라도.”
“내기에서 지는 게 두려웠어요. 내가 무엇을, 누구를 사랑했는지 잃고, 한낱 인간의 시야로 고통을 받으면서 사는 게 두려웠어요. 심판의 날이 온다면, 내기는 확실하게 저의 승리잖아요.”
“모세에게 사실대로 말하세요.”
“또 한 번 저 아이를 실망하게 하라는 말입니까?”
“메피스토, 당신도 봤죠? 모세가 방에서 나올 때의 빛을. 그 아이가 실망한다면, 당신에게서 얻을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아이의 빛이 사라질지 몰라요. 구원자는 없는 거예요. 구원자 없이는 심판의 날도 없는 거예요.”
메피스토는 레라에게 등을 돌려 모세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메피스토는 거실의 식탁 위, 아이처럼 우는 장군을 위로하는 모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어른을 위로하는 모세. 메피스토는 문에 기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메피스토는 모세에게 당당하게 다가가 마음속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꺼내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모세야, 내가 인간 세상에 온 이유는 이곳을 파멸로 이끌기 위함이야. 그래야 내가 천국이라는 놀이터를 구경할 수 있거든. 게다가 내가 이길 것 같아. 심판의 날이 오기까지 72시간도 남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왜냐면 심판의 날이라면 아버지라도 내기에서 승복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메피스토는 고통스럽고 속 시원한 상상을 하며 모세의 옆에 앉았다. 메피스토는 군인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모세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모세는 메피스토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니.”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 비어 있는 커피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커피잔에는 메피스토의 돌고 도는 잡념이 넘실거렸다.
'지금의 모세라면 날 이해해 주고, 용서해 줄 확률이 높지. 이렇게 말하니 내가 완전히 모세라는 아이를 이용하고 갖고 논 것처럼 들리는군. 아니야, 모세가 나를 용서한다면 그것도 문제지. 심판의 날이 계획대로 흐르기 위해서는 메시아가 필요해. 모세가 나를 용서해도, 용서하지 않아도 문제군. 인간으로 살기는 지옥같이 싫은데. 모세가 날 다시 미워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그래, 모세가 나를 용서할 확률이 높지, 그러면 심판의 날이 찾아오고 나는 내기에서 이기는 거야. 그렇게 모세를 포함한 대부분이 인간이 죽겠군. 도대체….'
모세는 커피잔을 보며 눈도 깜빡이지 않는 메피스토의 잡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없다니까.”
데미안의 말이 완전히 맞았네. 내가 이곳에 도착한 것 자체로 균형이 무너진 거야. 아버지는 본인이 패배할 내기는 하지 않는다니. 데미안의 조언을 들어봐야겠어.
모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장군은 메피스토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늘의 아들이 맞는 거죠? 연합사에서 내린 당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내가 아는 온갖 인맥과 정보를 동원해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모세는 메피스토를 놀리는 듯 웃었다.
“아저씨가 메시아인지는 몰랐네요. 좋겠다. 장군님도, 아저씨도 걱정하지 마세요. 빛이 천사를 용서하는 꿈을 꾼 사람들은 절대 아저씨들을 미워하거나 공격하지 않을 거예요.”
메피스토는 신발도 갈아 신지 않고 정원을 지나 밖으로 향했다. 데미안이 있는 바로 향하는 길, 그를 마주치는 인간들은 모두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게 다시 한번 구세주를 배신했습니다.”
도시에는 아직 시민들을 통제하는 군인들이 남아 순찰을 이어갔다. 그러한 군인들마저 길을 지나는 메피스토를 보고 무릎을 꿇었다. 찬송가와 기도를 읊는 인간들을 피해 메피스토는 먼 길을 돌아 데미안이 있는 바에 도착했다.
메피스토는 급하게 바의 안으로 들어가 데미안을 찾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데미안을 찾아 메피스토는 바의 주방으로 향했다. 메피스토는 팔을 걷고 그릇들을 씻고 있는 데미안을 본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님, 바쁜가?”
“오늘은 왕자님이라고 불러주시네.”
“저번에 나한테 말한 거 기억하지?”
“어떤 거?”
“그, 왜. 내기를 물러주겠다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린다고 했잖아.”
“응. 그런데 네가 됐다고 했잖아? 심판의 날이 오면 네가 이기는 건데.”
“그런데 심판의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니까.”
“그러면 내기에서 지고 싶다고?”
“지고 싶다는 건 아니야.”
데미안은 고무장갑을 벗어 털어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의 앞치마에 손을 닦은 데미안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데미안은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주방 안쪽 냉장고 앞을 드나들었다. 메피스토는 슬리퍼가 물에 젖지 않도록 주방 바닥의 물기를 조심하며 데미안을 쫓아다녔다. 데미안은 양배추를 썰며 이야기했다.
“심판의 날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어. 알잖아?”
“아버지에게 전해줄래? 보니까, 모든 미래를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은데, 이러면 내기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래서 모든 악마가 그랬잖아. 나를 포함해서. 어떻게 아버지와 내기해서 이길 생각을 했냐고 말이야.”
메피스토는 데미안이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정신 사나웠다. 메피스토는 냉장고를 왔다 갔다 하며 데미안의 요리를 도왔다. 메피스토는 도마 위에 채소를 던지며 말했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을 것 아니야?”
“구원자가 없이는 심판의 날이 오지 않지. 천국에선 그런 걸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니까.”
“구원자가 없어져야 한다고? 모세? 모세가 없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면, 심판의 날이 오지도 않고, 아버지께서는 구원자를 손에 넣으실 텐데, 너에게 과연 인간으로 사는 형벌을 내릴까? 벨리알도 용서하셨는데. 메시아가 아버지의 손에 잡혀 들어간다? 이런 쾌거가 있나.”
메피스토는 답답한 듯 양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이 모든 게 결국 다 계획에 불과했던 거야. 아버지는 정말, 비열해.”
채소를 썰던 데미안은 담배를 문 입으로 미소를 지으며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그 말, 공적으로 하는 거 아니지?”
“공적이면 어때. 메시아만 던져주면 얼굴에 침을 뱉어도 용서해 주실 모양이구먼. 너도 결국은 아버지한테 질려서 여기서 숨어 사는 거 아니야.”
메피스토는 데미안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린 후 바닥의 물기를 피해 주방에서 빠져나왔다. 주방 안의 데미안은 고개를 숙이고 메피스토에게 외쳤다.
“문 앞에 저거 가져가.”
메피스토는 데미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낡고 흙이 묻은 삽이 있었다.
'이거로 뭘 어쩌라는 거야.'
삽을 든 그는 문을 지키는 거구의 남자를 심술궂게 강하게 밀쳐 바에서 빠져나왔다. 메피스토는 허망하고 느린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메피스토를 마주친 인간들은 모두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메피스토는 그들에게 성의 없는 인사로 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오히려 맑아지기 시작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구원받을 사람들은 구원받고. 나는 천국으로 가겠네. 모세라는 인간도, 은행나무와 지구, 인간세계의 모든 것도, 어디론가 사라지겠지. 천국과 지옥의 경계는 흐려질 거야. 미래의 누군가는 묻겠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왜 사라졌나? 아름다운 지구는 어디로 갔나? 그렇다면 누군가는 답하겠지. 그것은 멍청한 메피스토 때문이야. 모세를 아버지에게 바치는 것 외에는 심판의 날을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
집 앞의 골목엔 메시아를 찾아온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메피스토의 등장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꿈을 꾸었습니다….”
“예. 머리 두 개의 천사가 나왔죠? 저는 바빠서 가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메피스토가 그들의 꿈조차 맞출 수 있음에 그가 구원자라 확신했다. 메피스토는 그저 모든 것이 귀찮고 머리 아플 뿐이었다. 메피스토는 모세의 집 앞에 버려진 새 모양의 나무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버려진 채 무력하게 누워있는 아름다운 새의 모습이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새와 삽을 들고 집의 대문을 연 메피스토는 유리 너머, 거실에 앉아 있는 모세와 레라, 미겸을 바라보았다.
메피스토는 알고 있었다. 이제는 진정으로 모세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야 할 때였다. 그는 정원의 의자 옆에 삽을 꽂은 후 의자에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금성이 가장 빛나는 시기가 찾아오는구나.'
집에서 나온 모세는 의자에 시체처럼 널브러진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모세는 따뜻한 차 한잔을 들고 메피스토 옆에 섰다. 모세는 그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다.
“아저씨. 바깥, 골목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요?”
메피스토는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며 모세에게 길에서 주어온 나무 조각상을 건네주었다. 모세는 먼지 묻고 더러운 나무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새는 아니었다. 비싼 골동품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메피스토는 모세에게 등을 돌려 의자에 기댄 후 말했다.
“사람들한테 말해.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거기에 대고 절하고 기도하면은 병이고 뭐고 다 낫고, 부자도 되고 그런다고.”
“이 새 이름이 뭔데요?”
“파주주.”
모세는 메피스토의 힘없는 등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저한테 할 말 있죠?”
“응.”
“그러면 말하지 마요.”
“뭐?”
“내가 아는 것은 통제할 수 있지만, 모르는 것은 통제할 수 없죠. 어떤 것들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메피스토는 자세를 고쳐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떠올랐다.
‘일곱 살 아이에게도 지혜를 묻는 것을 주저하지 마라.’
메피스토는 모세에게 받은 차를 마신 후 물었다.
“이제 어떡하지?”
“뭐, 아저씨 가족한테 물어보세요. 신이 나, 아저씨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요.”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홀로 생각할 시간을 남겨준 후 집안으로 돌아갔다. 심판의 날과 자신의 목적을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모세의 말에 그는 거대한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그것은 메피스토가 느껴온 어떤 자비보다 따뜻했다. 메피스토는 레라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기울어지지 않은 지구의 가장 높은 곳에서 고개를 올려둘 때,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악마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시 구절에 메피스토는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후 의자에 곧은 자세로 앉았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메피스토는 빛나는 금성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 제가 뭘 어찌하길 원하십니까.’
진솔하고 단정한 자세로 기도를 올린 메피스토에게 금성의 빛은 답을 보냈다. 빛과 바람에 실려 돌아온 대답을 들은 그는 다시 의자에 누워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금성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는 신경질적인 말을 되뇌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