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침 해가 솟았을 때, 모세와 레라는 눈앞의 광경이 현실인지 의심하며 눈을 비볐다. 잠옷 차림으로 정원에 선 그들은 아침부터 땅을 파는 메피스토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문밖에서 찬송가와 온갖 소음이 울려왔으나, 메피스토는 오직 삽으로 흙바닥을 파낼 뿐이었다. 레라는 삽질을 하는 메피스토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네요.”
“뭐 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모세의 말대로, 레라 씨의 말대로. 아버지에게 기도했습니다. 망가진 가족일지라도, 소통이라는 시도는 가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아버지가 땅을 파라고 하셨어요?”
“글쎄요. 그런데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에요. 그날이 올 때까지. 그날이 오더라도 저는 여기서 흙을 파내고 있을래요.”
레라는 메피스토가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를 다친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레라가 바라보는 그의 눈빛과 그가 흘리는 땀에 분명 뜻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레라는 바깥의 추위에 몸을 돌려 실내로 향했다. 그때 메피스토는 레라에게 흙을 던지듯 말을 건넸다.
“우리 지옥으로 돌아가면, 같이 살아보는 건 어때요.”
레라는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모세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모세가 저택의 문을 열자 골목의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사람들은 모세를 마치 구원자의 대리인, 또는 선지자처럼 여겼다. 모세는 저택의 옆에 나무로 만들어진 새 조각상을 두었다.
“메시아께서 잠시 이 조각상에 들어가 계십니다. 그러니까, 다들 밤에는 찬송가를 부르던가 소음을 내는 행위를 멈춰 주세요. 게다가 질서도 조금 지켜봐요. 서로 밀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사람들은 모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세는 나무 조각상을 들고 이야기했다.
“메시아에게 드릴 기도나 말씀이 있으면 다들 줄을 서서 질서 있게 이 나무에 대고 말씀하세요. 메시아께서 당신들이 서로를 밀치고, 난동을 부린다면 종말이 오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괜히 종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나 후회했다. 뱉은 말은 취소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모세는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나무 조각상 덕에 그들은 더욱 안정되어 보였다. 모세는 한숨을 쉬며 저택의 문을 닫고 정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태양 아래 땅을 파고 있는 메피스토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뭐 마실 거 좀 드려요?”
“아니. 괜찮아.”
“땅을 팔 거면, 땅을 파는 마법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게 어딨어.”
“아니면 땅을 잘 파는 악마는 없어요? 땅파기를 부탁할 악마 같은 건?”
“그런 악마가 어딨어.”
“뭐라고 하든 계속 땅만 파실 거죠?”
“그래.”
모세는 웃으며 현관의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모세는 부모님과 보내던 날들을 떠올렸다. 거실보다는 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모세였다. 그를 방에서 나오게 한 것은 무엇인지 모세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모세는 메피스토를 용서한 그 순간, 끝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자기 자신, 메피스토, 부모님과 가인, 그리고 온 세상이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음을. 그러나 그것이 두렵거나 파괴적인 종말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용서와 함께 즐거운 극의 막을 내리는 듯했다.
핸드폰 너머로 언성을 높여 통화하던 군인 미겸은 모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메피스토 님께선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시는 거야? 왜 쉬지 않고 땅을 파시는 거지?”
“저도 몰라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거래요.”
“그래도 메피스토 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어떤 이야기요?”
“부대의 부관하고 통화를 했어. 한미 연합사령부에서 직접 와서 메피스토 님을 데려간다고 하더라.”
“그러면 저번과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걱정하지 마라. 내가 모든 수를 동원해서라도 저분을 지켜낼 테니까.”
“아저씨도 저 양반을 체포하고 데려가는 데는 실패했었잖아요. 왜 그랬었죠?”
“그야, 시민들이 길을 막았고, 기상천외한 천재지변들까지 일어났었지.”
미겸은 천재지변이란 단어에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모세에게 전했다.
“태양풍의 활동이 예사롭지 않다던데 혹시 메피스토 님과 관련이 있을까? 게다가 급작스러운 이상 기후를 조심하라는 정보도 들려왔어.”
모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모세는 장군이었던 남자와 거리의 모든 사람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끝없이 흙을 파내는 미궁에 갇힌 메피스토는 흙 묻은 장갑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이미 사람을 묻고도 남을 깊이를 파낸 메피스토는 잠시 삽을 흙바닥에 꽂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메피스토는 흙바닥에 기대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현듯 날아온 파리 한 마리는 삽의 손잡이에 내려앉아 발을 비볐다. 파리 대왕은 메피스토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도대체 무슨 묘책이 있는 건가? 어쩔 작정이야? 하늘이 곧 열린다는데, 악마들은 혼란에 빠졌어. 아버지는 침묵하고 있고, 데미안마저 평소와 다름없이 장사만 한다지 않나.”
대답하지 않는 메피스토의 얼굴 앞에 파리는 정신없이 날갯짓을 펼쳤다. 메피스토는 파리를 쫓아내려 손을 휘저었다. 날갯짓의 소리와 함께 파리 대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버지랑 데미안이 너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시잖아. 네가 아버지와 잘 이야기해봐. 정말 심판의 날이 오는 거냐고.”
“이야기했어요.”
“그래? 뭐라셔?”
“별말 안 하시던데요.”
“이 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존재는 단연 아버지와 벨리알이지.”
메피스토는 담배꽁초를 흙바닥에 던진 후, 삽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는 허리를 곧게 펴 스트레칭을 했다. 메피스토는 이내 다시 흙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파리는 그런 메피스토의 머리 위를 원을 그리며 비행했다.
“하늘이 열리고 그들이 강림하면, 악마들은 맞서 싸울 수밖에 없어. 이 아름다운 놀이터를 천상의 존재들에게 뺏길 수는 없지. 네가 합의점을 찾지 못해 심판의 날을 막지 못한다면….”
“아, 알았으니까.”
파리는 구덩이로부터 저녁 하늘을 향해 비행했다. 메피스토의 머릿속엔 뾰족한 수라든지, 최소한 지옥의 형제들을 안심시킬 방법조차 없었다. 악마들은 자신들의 놀이터와 인간이라는 놀이기구를 지키려 할 뿐이다.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악마들의 세상에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메피스토는 해가 기울 때까지, 땅을 파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메피스토는 머리 위에 지옥 불빛을 조명처럼 띄운 채, 흙을 멈추지 않고 파냈다. 그가 강하게 삽의 흙을 던져낼 때 흙바닥을 기는 벌레 한 마리가 메피스토의 눈에 띄었다. 붉고 뿔이 난 애벌레는 메피스토를 올려다보았다.
“메피스토!”
“벨페고르? 프랑스에 계신 줄 알았건만?”
“자네가 나한테 커피를 한잔 부탁하지 않았던가?”
메피스토는 눈동자를 올려 지나간 날들을 떠올렸다. 그는 모세와 함께 와인을 마신 다음 날의 아침을 떠올렸다. 숙취에 고통받던 날의 아침.
“그런데, 그것은 거의 한 달 전 아니었소?”
“이곳 바닥에 수맥이 흐르는지 지옥으로 가는 길이 고되어 잠시 잠이 들었다네.”
“그러면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나도 이야기 들었네.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지? 누가 아버지의 시계를 앞당겼다더군.”
“흙바닥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문을 다 듣고 있었소? 그럼 자네는 어찌할 작정이오?”
“나는 창조나 마법 같은 것을 증오하지 않나. 기술과 과학, 연구와 발전은 인간들이 있는 이곳에서만 가능하니, 아버지의 시계를 앞당긴 자를 찾는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걸세.”
메피스토는 벨페고르의 이야기에 괜스레 눈을 피해 손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이야기했다.
“심판의 날을 인간들이 이겨낸다면, 모든 것을 고치는데 한세월이 걸릴 것이오. 그때 이곳에 남아 기술 개발에 도움을 주는 것은 어떻소?”
“인간들이 심판의 날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많은 악마들이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네. 계단이 힘들어 엘리베이터를 만든 것은 당신 아니오? 땅속 밑에 있기 싫다면, 위에 있을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당신답지. 당신이라면 인간들의 영웅이 될 수 있다네.”
애벌레는 붉고 흙 묻은 몸을 기어 삽의 위로 올라섰다.
“뭐, 다른 형제들이 그렇다면…. 나를 정원 위로 올려주겠나? 심판의 날에 보세.”
메피스토는 조심스럽게 삽을 머리 위로 올려 벨페고르라는 애벌레를 정원의 잔디에 놓아주었다.
사다리를 딛고 구덩이 밖으로 나온 메피스토는 잔디밭에 몸을 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는 시끄러운 소리나 찬송가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대문의 건너편에서는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모든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지.'
눈을 감은 채 하모니카 소리를 즐기던 메피스토는 갑작스러운 심장 박동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으로 향한 메피스토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저택의 문을 열었다. 메피스토가 등장했음에도 군중들은 여전히 나무 조각상에 기도하기 바빴다. 덕분에 메피스토는 우상 뒤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저택의 문 앞에는 한 달 전, 자신을 백화점까지 태워주었던 택시 기사가 있었다. 그는 문 앞에서 메피스토를 바라보며 하모니카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얼굴에 놀란 메피스토였지만,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아님에 메피스토는 다시 문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내 택시 기사는 하모니카를 내려둔 채 메피스토의 귀에 속삭였다.
“메피스토. 나일세. 파이몬.”
'파이몬의 지혜라면 이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갈 방법을 분명히 알려줄 것이다.'
골목 앞 군중들의 눈치를 살핀 메피스토는 택시 기사의 몸을 빌린 파이몬을 정원으로 끌고 들어왔다. 메피스토는 옷의 흙을 털어낸 후, 손에 묻은 흙을 닦아내었다. 그는 파이몬의 양손을 붙잡았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걸세.”
“음악적 재능이 전혀 없는 이 남자와 계약했다네. 한 달이라는 시간을 낭비한 셈이지.”
메피스토는 이번에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파이몬의 눈을 피했다. 메피스토는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심판의 날이 32시간도 채 남지 않았네. 인간이 없는 악마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지구가 없는 지옥이 어떤 장소이겠나? 자네의 지혜라면 분명 방도를 찾았을 터.”
파이몬은 셔츠 주머니에 하모니카를 넣고 깊은 침묵에 빠졌다. 이윽고 하늘의 금성을 바라보며 메피스토에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는 대화해 보았나?”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네.”
파이몬은 메피스토가 파고 있던 구덩이의 앞으로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이몬의 표정에는 고민과 결단이 깃들었다. 메피스토는 그런 파이몬이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다. 파이몬은 구덩이로부터 몇 발자국 계산된 뒷걸음질을 쳤다. 메피스토는 정원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며 깊은 고심에 잠긴 파이몬을 주시했다.
“그래.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시게….”
파이몬의 지혜를 얻기 위해 메피스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이몬이 입을 열고, 메피스토가 자리에서 일어선 바로 그 찰나, 하늘에서 주먹만 한 돌이 파이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택시 기사의 육신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잔디 위에 쓰러졌다. 메피스토는 당황하여 뒤를 돌아 거실의 가족들을 살폈다. 나라를 책임져야 할 군인, 아름다운 궁수의 악마, 그리고 평범한 고등학생은 모두 TV에 정신이 팔린 채였다.
당황한 메피스토는 즉시 택시 기사의 몸을 파놓은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파이몬의 머리를 강타한 돌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돌에서는 분명히 빛이 나고 있었다. 메피스토가 쭈그려 앉아 빛나는 돌을 관찰하는 동안 뒤편 구덩이에서는 택시 기사의 몸이 정원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메피스토는 급하게 구덩이로 돌아가 택시 기사의 손을 잡아 그를 끌어올렸다.
“파이몬, 괜찮은가? 죽은 줄 알았네. 아니, 내 말은 이 몸이 죽은 줄 알았네.”
택시 기사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메피스토에게 인사를 건넸다. 메피스토는 반갑지 않은 존재를 알아챈 듯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 메피스토.”
“가브리엘. 네가 무슨 일이냐.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았다. 게다가 파이몬은 어디로 간 거지?”
“이 근방에 나팔을 들고 있는 몸뚱이를 찾으려니 이곳에 오게 되었다.”
가브리엘은 셔츠 주머니에 있는 하모니카를 꺼내었다.
“고작 하모니카라니, 장난하는 건가? 내가 아는 휴거와 심판의 날은 장엄한 나팔 소리로 시작되어야 마땅해. 하모니카 소리로는 하늘에 닿을 리가 없지.”
“왜 왔냐고 물었다.”
“내 할 일을 하러 왔지. 내가 입고 있는 이 택시 기사의 육신을 포함하여, 저 골목의 666명은 확실히 구원 대상이 아니겠군.”
“너는 그것을 구원이라 칭해라. 나는 억압이라 부를 테니”
가브리엘은 메피스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듯 눈을 마주쳤다.
“설마 인간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이냐. 내가 보기엔 네가 가장 불쌍한 존재다. 두 아버지의 힘 싸움에 너는 이용당했을 뿐이지. 심판의 날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논쟁 뒤에, 너의 아버지는 너를 찾아가 그 시시한 내기를 시작했지.”
“...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어디든지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가브리엘.”
“지금 몇 시지?”
메피스토는 핸드폰을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그는 땅을 파내느라 벗어놓은 겉옷의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음을 잊고 있었다. 메피스토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가브리엘에게 부탁했다.
“내가 핸드폰을 두고 와서, 자네 몸을 한번 뒤져보게.”
가브리엘은 택시 기사의 몸을 뒤져 지갑과 하모니카 등을 꺼낸 후 핸드폰을 찾아내었다. 그는 메피스토에게 핸드폰에 적힌 시간을 보여주었다.
6:30 AM
메피스토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말했잖나.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고.”
“하늘을 봐라. 멍청아. 해가 떠있어야 할 하늘이 너무 어둡지 않나?”
메피스토는 밤처럼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브리엘은 이제야 상황을 인지한 메피스토가 우스운지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가브리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세와 레라는 황급히 정원으로 나왔다. 모세는 하모니카를 부는 피 흘리는 택시 기사를 본 후 메피스토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메피스토는 답을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내 정원으로 뛰쳐나온 미겸은 메피스토에게 급한 소식을 전했다.
“군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답니다. 메피스토 님을 체포하고, 바깥에 있는 시민들도 모두 체포한답니다.”
혼란에 빠진 메피스토는 머리 위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물에 즉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메피스토의 머리 위, 어두운 하늘이 마치 얇은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하늘이 갈라지자 빗방울은 더욱 거세어졌다. 메피스토는 손바닥을 올려 빗방울을 자세히 관찰했다. 빗물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이윽고 하늘에서는 피가 섞인 비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메피스토가 파놓은 거대한 구덩이에서 벨페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피스토!”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모니카를 부는 가브리엘에 메피스토는 정신이 없었다. 메피스토는 어쩔 줄 몰라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택시 기사는 그 자리에 쓰러져 하모니카 연주를 멈추었다. 하지만 하늘에서의 북소리와 피가 섞인 빗물은 멈출 줄 몰랐다. 메피스토는 구덩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애벌레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변해 있는 벨페고르는 구덩이 밖으로 수많은 우산을 던져냈다.
“곧 불이 쏟아질 거야. 바깥사람들에게 이걸 나누어줘.”
“불이 쏟아진다고? 지금은 피가 쏟아지는데?”
“성경도 안 읽나 메피스토. 어서 나누어주기나 해.”
모세는 남산 위로 찢겨 나가며 빛이 새어 나오는 하늘을 응시했다. 그것은 인간의 빛도, 자연의 빛도 아니었다. 빛의 틈새로 수많은 거대한 안구와 수레바퀴들이 굴러 나왔다. 천상의 눈동자들은 인간 한 명 한 명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기괴한 모습에 정신이 팔린 모세는 메피스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메피스토는 모세에게 우산을 건네주었다.
“바깥사람들에게 건네주어라.”
“이게 뭐예요?”
“곧 하늘에서 불이 내릴 예정이라고 한다. 젖지도, 타지도 않는 우산이지. 저기 지옥의 과학자 아저씨가 만든 물건이다.”
붉은 악마는 반가운 듯 레라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모세는 이 신기한 악마를 구경할 때가 아님을 깨닫고, 우산을 들고 황급히 저택 밖으로 나섰다. 겁에 질린 시민들은 나무 새 조각상에 절을 하고 있었다. 모세는 우산을 나누어주며 소리쳤다.
“모두 우산을 펴고 자리를 지키세요. 하늘을 쳐다보지 마세요.”
눈앞의 광경에 미겸은 극도의 혼란을 느꼈다. 메피스토를 지켜주겠다는 그의 맹세는 이 공포와 혼돈 앞에서 힘없이 옅어지고 있었다. 겁에 질린 미겸은 저택의 문을 열고 줄행랑을 치려 했다. 문이 열리고 뛰쳐나온 군인의 눈을 본 모세는 급하게 제자리에 멈춘 군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옥의 불이 섞인 눈. 악마의 눈을 한 미겸은 모세에게 미소 지었다.
“고작 이런 우산 하나로 심판의 날을 막아보겠다? 그것이 벨페고르의 묘책인가? 게으른 영혼이로군. 짐승과 군인들이 다가오면 인간은 우산을 내던지고 도망칠 것이다. 진정으로 바꿔야 할 것은 저들의 정신이지.”
“아저씨 괜찮아요?”
“나는 아스모데우스. 잠시 이 몸을 빌리겠다.”
모세는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던 날, 귀신이 들렸던 작은 소녀를 떠올렸다. 메피스토가 그 소녀와 나눈 대화는 희미했지만... 아스모데우스는 형형색색의 우산을 든 군중 사이를 거닐며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 음악에선 나무가 타들어 가는 향취가 느껴졌고, 검고 붉은 음표들이 공중에 아른거렸다. 아스모데우스의 음악을 듣던 군중들은 군인과도 같이 질서 있게 오와 열을 지켜 자리에 섰다.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세에게 다가간 아스모데우스는 입을 열었다.
“저들을 바라보아라 모세야. 공포를 망각한 채 자리를 지키는 아름답기만 한 저 군중의 모습을.”
모세는 군중들을 잠시 쳐다본 후, 아스모데우스를 응시했다. 말이 없이 서 있던 모세는 대문을 밀치며 정원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메피스토는 모세의 고함에 어깨가 들썩였다. 모세는 메피스토의 팔을 흔들었다.
“바깥에 우산은 다 나누어 주었는데요. 저번에 작은 여자아이의 몸에 들렸던 귀신 기억나요? 그 귀신이 군인 아저씨 몸에 들렸어요. 게다가 그 아저씨가 인간들의 뇌를 조종하는 것 같아요.”
메피스토는 웃음을 지으며 모세를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마라. 악마들은 이곳에 도우러 온 것이야.”
정원에 선 일행은 하늘을 향해 치솟는 빛의 기둥들을 목도했다. 찢어진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과 피를 뚫고, 특정한 믿음을 가진 인간들은 섬광이 되어 하늘로 빨려 들어갔다. 모세는 다시 한번 저택의 문 앞, 사람들을 확인하러 나섰다. 우산을 쓴 사람 중 한 명도 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없음에 모세는 안심했다.
골목의 반대편에서는 군인들이 모세의 집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모세는 다시 메피스토에게 소리를 지르며 정원으로 돌아갔다. 군인들 일부가 빛이 되어 솟아오르자, 그들의 전열은 무너졌고 진격은 지연되었다. 그 사이 모세의 집 앞, 믿음을 가진 666명은 우산을 편 채 손을 잡고 집의 대문 앞을 지켰다.
군인들은 과거에 그랬듯이 자리를 지키는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했다. 군중들은 기침과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문 앞에 선 아스모데우스는 멀리서 들려오는 파리떼의 비행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검은 구름과도 같이 나타난 파리떼는 군인들을 향해 비행했다. 군인들은 손톱보다 작은 파리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렇게 발사된 총알은 군복을 입은 아군들의 육체를 뚫고 지나갔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은 바알의 형상을 띠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과 군인들의 계속되는 사격에도 비행하는 파리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도시의 가로수와 자동차, 붕괴한 건물들은 불타오르며 연기를 내뿜었다. 도시를 거니는 피 묻은 검은 사자는 불타는 도시의 연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사자, 마르바스는 쏟아지는 화염과 파편에 상처 입은 인간들을 치료하느라 분주했다. 그는 이야기했었다.
‘병을 주었으면 치료제도 주어야 하는 게 나의 의무요.’
모세는 하늘에 떠다니는 눈알이 달린 수레바퀴들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눈을 볼수록 자신이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모세는 무너지는 남산의 타워와 불타는 도시의 위에 날개가 달린 거대한 안구를 볼 수 있었다. 하얀 비둘기 같은 날개를 가진 안구는 모세를 바라보았다. 모세는 그 눈이 자신의 영혼을 비춰주는 느낌을 받았다. 모세는 자신의 벌거벗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을 마주했다. 세상의 소리는 줄어들고 눈빛을 제외한 시야는 사라지고 있었다.
모세는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손에서는 하얀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모세는 편안함을 느꼈다. 자기를 비추어주는 눈빛과 하나가 될 준비가 되었다. 그는 무한했던 피곤함 끝에 마침내 잠이 들고 싶었다. 모세는 하늘로 향하는 빛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모세가 빛에 둘러싸여 눈을 감으려는 순간, 길고 거대한 불화살이 날개 달린 안구에 날아와 박혔다. 안구는 고통에 피를 쏟아내며 격렬한 날갯짓으로 몸부림쳤다. 모세는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세 옆의 레라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하늘의 시선을 향해 활을 쏘아 올렸다.
“저만 빼고 다 악마들이었어요?”
레라에게 모세의 질문에 답할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하늘로 불을 쏘아 올리기를 반복했다. 메피스토는 구석의 담을 넘어 조용히 접근해오는 군인들을 잠재웠다. 군인들의 총은 메피스토의 손에 잡혀 녹아내렸다. 메피스토는 군인들의 이마에 엄지손가락을 올린 후 지옥의 불을 태워 올렸다. 영혼의 화상에 그들은 정신을 잃어갔다.
메피스토는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거대한 뱀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뱀은 메피스토를 공격하는 군인들을 물어뜯었다. 모세는 뱀을 바라보며, 과거 지하실에서 자신의 복수를 도왔던 존재임을 알아챘다. 안드로말리우스는 메피스토의 몸을 기어 다니며 혀를 날름거렸다.
“자네가 쉴 새 없이 땅을 파길래, 혹시 귀한 보물이라도 숨겨 놓은 줄 알았지.”
메피스토는 감사함에 뱀을 쓰다듬었다.
“고맙네.”
“이곳은 내가 지킬 테니 자네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메피스토는 피와 불꽃의 잔디에 서서 생각에 빠졌다.
'내가 해야 할 일….'
메피스토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구덩이 옆의 삽이었다. 삽을 잡은 메피스토는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모세는 온갖 난장판이 펼쳐지는 종말의 날에 땅을 파기 바쁜 메피스토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지금 땅을 파야 할까요?”
“그래. 걱정할 것 없다. 모세야, 나가서 사람들을 도와라.”
모세는 메피스토에게 믿음을 걸었다. 저택의 앞, 골목으로 나선 모세는 자리를 지키는 군중들의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모세는 미겸의 몸을 취한 아스모데우스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모세는 등 뒤에서 다가오는 빛과 말발굽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하얀 말이 군인들을 짓밟으며 군중들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하얀 말에서 내린 미겸의 부관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부와 군에서 모두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군중들의 불안은 거세어졌다. 기계와 같이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은 우산을 잡고 움직이며 진열을 이탈했다. 군중들 사이에 섞여 있던 한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 남자의 말을 들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와 메피스토만 믿고 이 자리에 서 있으면 됩니다.”
모세는 군중들의 중앙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아스모데우스임을 알 수 있었다. 하얀 말을 바라보는 군중들은 웅성거리고 있었다.
“우리를 구하러 왔나 봐.”
말에서 내린 부관은 우산 아래 군중들의 사이를 지나다니며 그들에게 불안에 떨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부관은 찾는 사람이 있는 듯 군중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하얀 말에서 내린 남자는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메피스토의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 가만히….”
부관은 군중들 사이에 섞여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장군님.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사람들을 선동하면 어떡합니까.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관의 다른 손은 허리춤의 권총을 향했다. 아스모데우스는 잠시 점거한 인간의 육체가 파괴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쏴라.”
부관은 권총을 꺼내 미겸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었다. 모세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자칫 그들을 자극했다간 방아쇠가 당겨질까 두려웠다.
모세가 결단을 내린 바로 그때, 부관은 방아쇠를 당겼다. 군중과 하얀 말이 선 골목에 정적이 감돌았으나,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부관은 발사되지 않은 총에 당황한 듯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미겸은 그러한 총을 눈앞에 두고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부관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권총을 확인했다. 부관은 권총의 총구를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를 향해 날아온 불화살이 그의 이마를 정확히 관통했다.
모세는 하얀 말에 기대어 부관을 향해 활을 겨눈 레라를 바라보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레라에게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레라 옆의 하얀 말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불타올랐다. 레라는 그런 말이 불쌍한 듯 내려다보았다. 모세는 레라와 아스모데우스에게 믿음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대화를 이어갈 새도 없이, 거대한 칼을 입에 문 붉은말은 저택의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모세는 붉은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정원에 가볍게 안착한 붉은말은 불꽃 섞인 콧김을 내뱉었다. 붉은말은 칼을 문 채 천천히 메피스토가 있는 구덩이로 향해 움직였다. 거대한 뱀 안드로말리우스는 경비병처럼 적마 앞에 머리를 내든 채 멈춰 섰다.
“네가 입에 물고 있는 그 칼. 내가 가나안에 두고 온 칼이다.”
칼을 문 붉은말은 뱀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날카로운 앞니로 물었다. 말은 뱀의 입가를 칼로 찢으며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뱀은 입이 찢어진 채로도 적마의 칼날을 계속 막아냈다. 피에 젖은 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잔디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모세는 가브리엘이 몰고 온 주먹만 한 돌을 적마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적마는 칼을 물고 고개를 돌려 붉은 눈으로 매섭게 모세를 노려보았다. 붉은말은 모세를 향해 달리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피에 젖은 뱀은 붉은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의 몸을 감아 강하게 비틀었다. 뱀에 감긴 붉은말은 신음을 내며 쓰러졌다.
붉은말은 쓰러진 채 바닥에 몸을 비벼 뱀을 떼기 위해 네발과 온몸을 움직였다. 말을 쥐어짜던 뱀의 힘이 풀려갈 무렵, 안드로말리우스의 피 묻은 몸에서 지옥의 불꽃이 타올랐다. 적마는 자신을 감싼 채 타오르는 지옥 불을 견디지 못했다. 적마는 뱀과 함께 재로 변해 정원 위의 바람에 흩날렸다. 두 번째 말이 죽자, 하늘로 향하는 휴거의 빛기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모세는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말 한 마리가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리한 검은 말은 멈춤 없이 모세를 영혼을 앗아갈 준비를 끝냈다. 지붕에서 뛰어내리려는 검은 말의 엉덩이에 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검은 말은 귀찮은 파리들을 꼬리를 이용해 내쫓았다. 검은 말은 더욱 빠르게 꼬리를 움직여야 했다. 내쫓으면 내쫓을수록 더 많아지는 파리들은 검은 말의 온몸에 붙어 힘을 빠지게 했다. 말은 온몸을 움직이며 고통의 숨소리를 내질렀다.
이내 검은 구름의 형상처럼 날아온 파리떼는 지붕 위의 검은 말을 들어 올려 그 주위를 비행했다. 파리들의 비행 소리는 마치 헬리콥터처럼 우렁찼다. 파리 떼는 뼈만 남은 검은 말을 정원 바닥에 내던진 채, 하늘의 안구들을 향해 비행을 이어갔다. 모세는 징그러운 듯 검은 말이었던 것의 뼈를 내려다보았다. 골목에선 천둥과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우레와 같은 외침에도 메피스토는 땅 파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세는 메피스토가 부탁한 대로 군중들을 지키기 위해 골목으로 향했다. 모세는 공포인지, 발작인지 몸을 떨고 있는 군중들을 보았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붉은 눈을 가진 청색의 말이 미겸을 입에 문 채 서 있었다. 군중들의 앞에 선 레라는 미겸을 위해 활을 내려놓았다. 모세는 상황의 복잡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모세는 당당하게 청색 말의 앞으로 걸어갔다. 레라는 걱정이 담긴 눈으로 모세의 등을 쳐다보았다. 푸른색의 말은 모세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거짓 선지자.”
“군인 아저씨를 내려놔 줘.”
“내려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징조다. 이곳 모두가 죽을 것이야. 장담하마. 그것이 내가 온 유일한 이유이니.”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일단은 아저씨를 내려놓을 수 있잖아?”
푸른 말의 붉은 눈은 모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재해이며, 군단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다. 거짓 선지자. 뒤를 돌아보아라.”
모세는 말의 이야기에 등을 돌렸다. 자리를 지키던 666명의 군중은 가인이 그랬듯이 발작에 휩싸여 몸부림쳤다. 그들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모세는 고통을 겪는 군중들의 얼굴에서 가인의 영혼을 보았다. 모세는 공포와 분노에 손을 떨었다. 가인의 목숨을 앗아간 군인을 물고 있는 청색 말은 모세에게 말했다.
“너는 너의 죄의 깊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고통을 통해.”
“가인이를 죽인 사람을 내려줘.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살려줘. 그렇다면 나를 죽여도 좋아. 너는 재해이자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고 했지? 내가 그 죽음을 맞이할게.”
청색 말은 침을 흘리며 미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모세 뒤의 군중들은 여진처럼 남은 두통에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청마는 모세를 향해 한 걸음씩 빠르게 전진했다. 말은 모세를 짓밟기 위해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빠르게 저택의 대문에서 뛰어나온 검은 사자는 말의 목을 물어뜯었다. 검은 사자 마르바스의 얼굴은 푸른 말의 피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사자는 앞발로 피 흘리는 푸른 말을 짓누르며 내려다보았다.
검은 사자는 모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모세는 사자라는 겉모습에 공포를 느껴 뒷걸음질 쳤다. 검은 사자는 모세에게 물었다.
“질병관리본부 건물이 어디 있지?”
한참 동안 핸드폰 화면의 지도를 응시하던 검은 사자는 마침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질주했다.
푸른 말이 죽었을 때 하늘의 안구들은 힘을 잃고 더 이상의 빛은 솟아오르지 않았다. 메피스토의 안위가 걱정된 모세는 정원으로 달려갔다. 모세는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메피스토는 어제, 엊그제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땅을 파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일말의 의심 없는 굳은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모세가 내려보는 메피스토는 삽 위의 흙을 들어 올렸다. 땅에서는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메피스토는 웃으며 구덩이 위 모세를 올려다보았다.
“모세야! 잘 봐라. 우물이다.”
“고작 우물을 발견하기 위해서 여태 땅을 판 거예요? 지금 세상이 끝나가고 있는데? 진짜 악마 그 자체예요.”
“고작 우물이 아니야. 화합의 우물이다. 평화의 우물이야. 두 가지 빛을 담을 수 있는 우물이야.”
메피스토는 모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세는 메피스토의 손을 잡아 그를 끌어올렸다. 구덩이에는 빠른 속도로 물이 차올랐다. 메피스토는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럽게 우물을 바라보았다.
“두 가지 빛을 담을 수 있는 우물이야.”
12시간의 전쟁이 지난 후, 기울어진 태양은 우물에 담겼다. 저녁과 함께 찾아온 금성의 빛 또한 우물에 비쳤다.
“잘해주었다. 나는 얘기를 나누고 오마.”
“누구랑요?”
“두 아버지.”
메피스토는 우물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두 손을 모은 채 깊은 명상에 잠겼다. 태양의 온기가 왼쪽 뺨을 따뜻하게 비추며 그의 마음을 녹였다. 오른편에 닿는 차가운 금성의 빛은 서늘하고 냉철하게 그의 이성을 맑게 했다. 메피스토는 눈을 감은 채 두 빛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두 분을 모신 이유는….”
태양의 빛은 메피스토의 말을 가로채며 금성의 빛에 일갈을 날렸다.
태양 : 인간들의 세상을 바라보아라. 어떻게 처리할 거지?
금성 : 심판의 날은 내 계획이 아닌 당신의 계획입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이 사단의 책임을 나에게 전가할 줄 알았습니다.
태양 : 그것을 앞당긴 것은 너의 잘못 아닌가?
금성 : 나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를 의심하십니까, 늘 그랬듯이.
두 빛의 압력에 갇힌 메피스토는 자신에게 쏟아질지 모를 아버지들의 분노를 몰아내려 집중했다.
금성 : 그것이 당신의 특기 아닙니까? 모든 좋은 일과 사랑은 당신의 축복 때문이고, 인간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은 내 탓이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빛들의 신경전에 메피스토는 중재에 나서야 했다.
“우선 지금 일어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부터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태양 : 나는 그러기 위해서 온 것이다. 저놈은 그렇지 않은 듯하군.
금성 :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오?
태양 : 너의 문제는 알지. 교만하고 경솔하고 무능력한 배반자라는 것.
메피스토의 오른편에 비추어지는 금성의 빛은 얕아지고 있었다. 메피스토는 그러한 빛을 우물에 붙잡아야 했다. 금성의 빛은 메피스토의 마음에 파도를 일으켰다.
금성 : 나는 이런 대화를 할 필요가 없네. 저자가 필요하지도 않아.
태양 : 나는 네가 필요하고?
금성 : 예. 당신은 나를 누구보다 필요로 합니다. 균형이라는 소리는 늘 당신이 하는 소리 아닙니까? 내가 없으면 이제 누가 욕을 먹는 역할을 할 것입니까?
모세는 자리에 앉아 명상하는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메피스토의 이마에서 흐르는 한 줄기의 식은땀에 모세는 불안함을 느꼈다. 메피스토는 왼쪽 뺨에 닿는 태양의 빛을 간절히 붙잡았다.
“분명히 합의점이 있을 것입니다.”
태양 : 그래.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금성 : 심판의 날은 나의 계획이 아니오, 당신의 계획이지. 그 와중에도 나는 당신의 계획을 따르기 위해 666명의 짐승을 지켜냈소. 할 말 있습니까?
태양 : 교만의 왕이라는 소리를 괜히 듣는 것이 아니지. 예언의 짐승은 네가 아니라 메피스토가 지켜낸 것 아닌가? 이렇게 하지. 나에게 끝없는 믿음을 보여준 영혼들의 일부는 이미 빛이 되어 나에게 왔다. 너희가 아끼는 인간들의 세상은 너희 악마들이 알아서 수습해라. 나는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놨으니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금성 : 진정으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인간들이 딛고 다니는 땅을 둘러보기나 했습니까? 2000년, 아니면 3000년이 지나도록 저세상을 본 적은 있습니까? 희망이라기보다는 기만이겠지.
그들의 언쟁에서 메피스토는 합리적인 합의라는 희망을 잃어갔다. 명상을 이어가는 그는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허리는 아팠고 고개는 뻐근했다.
태양 : 네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나는 끝없이 사랑과 용서를 나눌 것이다.
금성 : 그렇게 사랑을 이야기하며 나를 추방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흔한 모순입니까?
태양 : 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다. 내가 없는 틈에 나의 옥좌를 탐내니, 어찌 너를 나의 옆에 둘 수 있겠나.
메피스토는 언쟁이라도 두 빛이 교류를 이어가길 바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차라리 싸움이라도 이어지는 균형이 인간 세상에는 더욱 유익할 것이다. 두 빛의 침묵이 이어지고 메피스토는 인간계가 버림받을 것을 걱정했다. 그때 메피스토는 얼굴의 정면에서 다가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메피스토는 데미안의 불꽃과 향을 맡았다. 메피스토의 앞에 선 데미안은 두 아버지에게 고했다.
“하늘의 왕좌에 계신 아버지. 이 모든 사단은 저의 친아비께서 벨리알이라는 악마를 용서하였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친아버지께서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였을 뿐입니다.”
금성 : 내가 벨리알을 용서한 것은….
메피스토는 금성의 빛이 상황을 악화시키기 전, 감히 그의 말을 자른 채 데미안이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도왔다. 데미안은 천국 앞에 무릎 꿇었다.
“지옥의 친자로서 저의 영혼과 피를 걸고 맹세합니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저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해 주소서.”
메피스토는 점점 강해지는 왼편 태양의 빛과 얕아지는 오른편 금성의 빛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양 : 지옥의 왕자가 영혼을 걸고 한 말이라면 들을 용의가 있다. 인간들이 잃은 사랑과 믿음을 되돌리는데 남은 수명을 다할 것을 맹세하느냐.
“맹세합니다. 지옥의 왕자, 저 데미안의 피와 영혼을 걸고 맹세합니다.”
메피스토는 자신이 알던 데미안이 맞는지 의아했다. 영계의 일에는 철저히 신경을 끊고 살던 자가 아니었던가.
메피스토는 데미안의 말을 의심했으나 태양 앞에 영혼을 건 언약에 메피스토는 침묵을 지켰다. 메피스토는 쏟아지는 어둠 속으로 떠나가는 태양의 빛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구나. 깔끔하진 않지만, 데미안 덕에 합의가 된 것이지.'
메피스토는 아직 잔잔하게 남아 있는 오른편 금성의 빛을 느낄 수 있었다. 데미안은 메피스토가 잊고 있었던 것을 금성의 빛에 아뢰었다.
“아버지의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세상을 둘러보시옵소서. 내기는 메피스토가 이긴 듯합니다.”
메피스토는 질린 듯 명상 도중 한숨을 내뱉었다.
'그놈의 내기, 그놈의 계획들. 이제 더 이상 듣기도 싫다.'
금성 : 메피스토. 다녀와라.
메피스토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는 어두운 하늘에 수 놓인 별들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천사들과 악마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그의 옆, 모세는 물었다.
“이제 다 끝난 거예요?”
“응. 이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양복 입은 악마들이 도시를 고칠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아저씨는요?”
“상황은 이미 다 끝났어.”
“당장 집 앞의 골목은 어떻게 정리하죠? 문 바깥세상은 엉망이에요.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죠?”
메피스토는 저택의 대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바깥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문을 닫았다. 그는 웃으며 모세에게 말했다.
“문제해결이다. 들어가자.”
메피스토는 현관문 앞에서 그를 향해 곧장 다가오는 화살 같은 눈빛에 마음을 빼앗겼다. 현관 벽에 기대선 레라가 그에게 밝은 미소를 보냈다. 메피스토는 현관의 레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따뜻했고, 웃음은 선선했으며, 자신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그녀의 품은 포근했다. 메피스토는 천국으로의 여행이 더 이상 급하지 않았다. 레라와 모세, 메피스토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뉴스를 시청했다. 무너진 건물들을 짓고, 불을 끄는 악마들을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