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도시의 건물들과 인간들. 모든 것이 차가웠다. 혹독한 추위에도 민혁이 도심으로 나온 이유는 단순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귀는 붉게 물들었다. 바람에 얇은 코트는 넝마처럼 나부꼈다. 팔짱을 끼고 담배를 문 그는 굽은 등을 펴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담배 향도, 머릿속의 생각도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눈은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름엔 분명 겨울이 왔으면 하고 빌었는데 말이야.'
높은 건물들 사이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그는 다시 따뜻한 교도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약속 장소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화려한 호텔 지하 클럽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영하의 날씨를 잊은 듯 짧은 치마와 하얀 살이 훤히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춥지도 않나.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는 클럽 앞의 긴 줄을 지나쳤다.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피해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어두운 골목 끝에는 간판 없는 카페가 있었다. 문 앞에 선 민혁은 마지막으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바닥에 꽁초를 던졌다.
'여기는 다방이야, 폐가야 뭐야?'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 속에는 커피와 담배 향이 스며 있었다. 좁고 볼품없는 카페에는 두 명뿐이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컴퓨터를 보고 있는 주인아주머니, 그리고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 준호는 카페에 들어서는 민혁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급하게 안긴 실내의 온기에 민혁은 코를 닦으며 준호 앞에 앉았다.
"여기에 이런 카페도 있었냐? 나 들어가 있을 때 생긴 건가?"
"너 빵에 들어가기 전에도 있었어. 네가 맨날 스타벅스 같은 곳만 찾아다니니 몰랐지. 아무튼, 잘 지냈냐?"
'잘 지냈냐'는 준호의 질문에 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약 올리냐? 잘 지냈겠냐?"
준호는 웃으며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민혁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준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야, 가게에서 담배를 피워? 여기서 펴도 되는 거야?"
"기다려봐. 재떨이 갖다 줄게."
친구가 서로를 꼭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민혁은 준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준호는 민혁의 앞에 뜨거운 커피와 재떨이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빵에서 모은 돈은 좀 있을 거 아니야?"
"지금 월셋집 보증금에 다 썼지."
"집은 살만하냐?"
"곰팡이나 먼지는 상관없는데, 보일러를 틀어도 존나게 춥다."
"집주인한테 월세를 좀 깎아달라 하던가."
"돌았냐? 내가 그런 말을 하게. 안 그래도 보증금에서 월세 까달라는 이야기도 이제는 더 못하겠어."
민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준호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준호의 담배는 피워도 그의 라이터는 사용하기 싫었던 민혁.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연기를 내뿜었다. 그들 사이의 침묵과 연기는 그들만의 소통이었다. 서로의 얼굴로 향하는 담배 연기는 그동안 서로의 삶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코를 닦고 커피를 마시는 민혁을 바라보던 준호는 꺼내기 어려웠던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은? 진짜 안 만날 거야?"
"면회 와서 나한테 말했잖아. 찾지 말라고. 찾지 말라는데 왜 찾아. 아니, 어떻게 찾아. 그래도 너는 부모님은 잘 만나서 다행이다."
"잘 만나기는 지랄하네. 집안 망한 거 뉴스에도 다 나오는데."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하지 않냐."
"그래. 집에 보일러는 나온다. 시발놈아."
둘은 웃으며 담배 연기를 흘려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민혁과 준호처럼 어린 시절 친구들은 더 이상 용건 없이는 만나지 않게 되었다. 할 이야기가 없다면, 무언가를 실행할 계획이 없다면 만나지 않게 되었다. 민혁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들은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아도 늘 함께 놀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오면 골목에서 놀고 있는 서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나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곤 했다. 문방구 앞에 앉아서 하루를 보내던, 소독차를 따라다니던.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해가 지고 집에 들어가 자고 일어난다 해도, 다음 날 같은 골목에서 서로를 볼 수 있음을.
민혁은 가끔 괜히 준호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이 새끼가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놀자고 불렀나.'
"그래서 뭐, 왜 불렀어?"
"너 여기 오는 길에 밑에 클럽 봤지?"
"클럽 가자는 소리 하면 진짜 죽여버린다. 서른이 넘었는데."
"그냥 봤냐고 물어본 거야. 그리고 서른 넘으면 클럽 못 가냐? 우리 중학교 때 같은 학원 다니던 애들, 걔들은 아직 몰려다니더라."
"너랑 미국에서 학교 같이 나온 애들? 걔네가 클럽에 있다고? 너 아직 걔네랑 다니냐?"
"내가 그 새끼들하고 진짜 친구겠냐. 아버지 회사 거덜 났다는 이야기 듣자마자 날 대하는 태도가 다르더라."
"어떻게?"
"심부름시키고, 무시하고."
"안 만나면 되잖아."
준호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민혁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문을 나서는 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예전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머리 스타일, 똑같은 걸음걸이. 하지만 민혁은 준호가 지쳐 보인다는 것을 느꼈다. 민혁은 준호가 단지 가난해져서 힘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을 강하게 거부했다. 자신한테는 몰라도, 적어도 남에게 돈이 전부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았다. 인생이 더러워도 친구의 지갑에 얼마가 있는지는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온 민혁이었다.
준호가 돌아오기 전, 서둘러 그의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혼자서 고작 몇 분의 시간에 민혁은 무력감을 느꼈다. 바깥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는 생각조차 얼어붙었던 것일까? 모든 것이 괜찮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카페의 따뜻함과 커피 향, 그리고 담배 연기 속에서 민혁에게 다시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카페 문이 열리며 걸어오는 준호의 모습이 금세 반가울 뿐이었다. 민혁의 코트에 찢어진 부분을 발견한 준호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준호는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며 말을 꺼냈다.
"저번에 일자리 구했다고 하지 않았어?"
"일자리가 있기는 했지. 근데 그냥 노가다더라. 뭐, 몸 쓰는 건 상관없어. 머리 쓰는 것보다 훨씬 낫지. 그런데 과장이라는 새끼가 반말로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
"욕을 한다고? 요즘도 그런 회사가 있냐?"
"대기업도 아니고, 어리고 무식한 새끼한테 욕 좀 할 수 있지."
"그래서? 관뒀냐?"
"그날 퇴근하고 과장한테 길에서 마주치면 죽여버린다고 했거든. 뭐, 나름 사표를 낸 거지."
"너도 진짜 또라이다. 아무리 그래도 직장 상사한테 죽여버린다고 하냐."
"사람들이 좀 친절했으면 좋겠다."
준호의 비싼 옷과 곱게 넘겨진 머리, 민혁의 뜯어진 코트와 정리 안 된 수염과 장발. 보기에는 몰라도, 분명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친구가 된 둘이었다. 라이터의 불을 바라보던 준호는 민혁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아니면 나랑 같이 알바 같은 걸 해보던가."
"약 팔고, 훔치고 이런 거 이제 안 한다. 빵에서만 5년이었어.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모르겠다. 이제 나쁜 생각은 해도 나쁜 행동은 안 하고 싶어."
"나라고 다르겠냐. 아버지 사업 망하고, 부모님 보기가 쪽팔려서인지 철든 척은 하는데, 나쁜 짓만 하고 살던 옛날이 그립다."
민혁은 라이터로 장난치는 준호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자신감이 사라진 준호의 모습은 거울을 보는 듯했다. 친구의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고 싶던 민혁이었다. 거울을 바라보듯 민혁은 준호에게 물었다.
"무슨 알바인데?"
"너 여기 오는 길에 클럽 봤지?"
"또 클럽 얘기냐."
"들어봐. 너는 알 거 아니야. 우리랑 같은 중학교 나온 새끼들 매주 클럽에서 약 빨고 술 마시고 노는 거. 클럽에서 놀고 끝나는 게 아니야. 애프터 파티가 있어."
"애프터 파티?"
"응. 클럽이 있는 호텔, 옥상 바로 아래층은 몇 년째 공사 중이라는데. 걔들은 클럽을 가는 날마다 공사 중인 층에 들락날락하거든."
"뭐, 거기서 애프터 파티한다고? 그게 뭐."
"그 새끼들이 아무리 부자여도 자기들 계좌로 약을 직접 사지는 않을 거 아니야? 약이랑 현찰이랑 전부 관리해 주는 인간이 있는데, 그 현찰이 어디 있는지 알거든?"
"뭐, 그래서 그 돈을 훔치자고?"
"그래. 훔치면 어때? 걔네가 경찰에 신고하겠냐? '우리가 마약 사려고 모아놓는 돈을 누가 훔쳤어요' 하고 신고를 하겠어 뭘 하겠어."
민혁의 헛웃음에 담배 연기가 섞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러면 너는 그걸 다 어떻게 아는데?"
"내가 말했지? 아버지 사업 망하고 그 새끼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 변해버렸다고. 심부름하다 보니 보게 되는 게 많더라."
"나 빵에 있을 때 너는 거기서 그것들이랑 그 지랄하고 있었냐. 아무튼, 그렇게 쉬우면 너 혼자 하지 그랬어. 왜 나를 끌어들이는 건데?"
"13층. 거기에는 CCTV도 뭐도 없다. 말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현찰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내가 없어진 날 돈도 없어지면 그 새끼들이 바로 눈치채지."
준호는 답답하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나 카페 문으로 향했다. 민혁은 급하게 담배를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야, 어디 가?"
"따라와 봐. 못 믿겠으면 직접 보여줄게. 얼마나 쉬운지."
빠르게 움직이는 준호를 따라 민혁은 코트를 부여잡고 길을 나섰다. 어두운 골목에서 빠르게 걷는 준호의 뒷모습에는 사라졌던 자신감이 다시 보이는 듯했다. 도시의 소음과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준호를 보러 오는 길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아직 같은 모습이었다. 클럽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과 진동, 얇은 옷을 입고 줄을 서 있는 여자들까지 모든 것이 차가웠다. 준호는 높은 호텔의 꼭대기를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민혁 역시 친구의 눈길을 따라 호텔 옥상을 바라보았다. 준호의 말이 맞았다. 옥상 바로 아래층, 불이 켜진 방은 하나도 없었다. 준호는 귀신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새벽 3시, 4시만 지나면, 저 방에 불이 켜진다. 그러고선 누가 커튼으로 방을 가리고, 커튼 뒤에 그림자들이 보인다."
민혁은 화려한 호텔을 올려다볼수록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듯 자신이 개미처럼 느껴졌다. 호텔 앞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 사이, 오직 자신만이 개미만큼 작게 느껴졌다. 호텔 로비에는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클럽 손님들로 정신이 없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한데. 도박이랑 약에 쓰려고 세탁한 돈을 신고도 못 하고. 13층엔 CCTV도 없고. 로비에는 어차피 사람이 넘쳐나는데. 준호 말대로 돈을 쥐고 걸어 나오면 그만이겠는데.'
민혁은 아직 호텔을 바라보는 준호의 어깨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야, 저녁 좀 사주라."
"만 원 이하로."
"길 건너에 김밥이나 먹자."
검은 옷을 입은 두 청년은 클럽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클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클럽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가진 무엇인가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 가장 다른 것은, 그들은 상당히 추워 보였다. 준호는 횡단보도의 하얀 부분만 밟으며 길을 건넜다. 민혁은 매섭게 부는 바람 때문에 얼른 김밥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곳은 지나치게 평범한 김밥집이었다. 매주 금요일만 되면 지나치게 꾸며 입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이기도 했다. 민혁과 준호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김밥 두 줄을 주문한 후, 밖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담아 온 준호는 자리에 앉으며 민혁에게 물었다.
"너는 돈 있으면 뭐 하고 싶냐?"
"월세 내고, 아니다. 조금 더 괜찮은 원룸으로 이사 가고. 핸드폰 요금 밀린 거 내고. 밥솥도 사고. 넷플릭스도 구독하고. 아니다, 치과 먼저 가야겠다. 어금니가 깨졌는데 때우는 데 50만 원이 넘게 든대. 의사가 안 볼 때 튀었어. 너는 뭐 하고 싶은데?"
"그냥 지갑에 넣어두고 싶어."
"안 쓰고?"
"필요할 때는 쓰겠지. 그래도 일단 지갑에 돈이 좀 있으면 좋겠어."
그들의 허무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 김밥 두 줄이 놓였다. 둘은 아무런 대화 없이 김밥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천천히 입에 욱여넣을 뿐이었다. 식사를 먼저 끝낸 준호에게 민혁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거기에 얼마나 있을 것 같은데?"
"몰라. 몇천."
휴지로 입을 닦고 물을 마시는 준호의 모습은 민혁에게 무책임해 보였다.
"안 하련다."
"하지 마라."
배부르지 않은 식사를 마친 둘은 김밥집 문을 열고 다시 한번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매서운 바람 때문에 담배에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준호는 집으로 갈 택시를 부르고 있었다.
"경기 좋다. 택시도 타고 다니고."
"타고 싶어서 타냐. 가는 길에 내려줄게."
"가는 길이 다른데 어떻게 내려줘. 난 먼저 들어간다."
준호는 추위에 떨며 굽은 등으로 걸어가는 민혁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준호는 민혁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걸 알고 있었다. 친구가 아닌 시점으로 봐도, 민혁은 나쁜 놈이 아니었다. 교도소에는 나쁜 놈들만 있을 것 같지만, 살다 보니 그곳에 가게 된 인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나쁜 놈이 된다. 준호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는 준호를 작년보다 좁아진 그의 집 앞에 내려놓았다. 굶어 죽을 일은 없는 준호였지만, 그렇다고 감사할 수 있는 현실은 아니었다.
민혁이 30분쯤 걸었을 때, 그가 숨을 수 있는 동굴에 도착했다. '주인'이라는 존재가 사는 주택 아래 작은 공간이 있었다. 샛길을 통해 지하로 내려온 민혁은 방의 불을 켜고 이불속에 숨었다. 코트를 벗지도 않고, 손을 씻지도 않고. 일단은 이불속에 숨어든 민혁이었다.
'겨울이 없는 나라에 살면 좀 살만했을 텐데.'
민혁은 이불속에 숨어 핸드폰으로 일자리를 알아봤다. 일자리를 발견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일할 수 없는 이유를 떠올렸다.
'자격증이 없다.' '여기는 멀어서 못 간다.' '전과자는 안 받아줄 것 같은데.' '경력이 없으면 안 된다.' '여기도 경력이 없으면 안 된다.' '이런 일도 있나? 뭔지도 모르겠다.' '교육 이수해야 한다고? 그럴 돈 없다.' '여기는…. 나쁘지 않은데?'
성의 없이 낙서된 이력서를 구겨 넣은 민혁은 TV를 켰다. 그곳에는 마치 자신처럼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TV 속 인물들의 집안을 보던 민혁은 다시 한번 담배를 물었다. TV와 거울, 그 어떤 것도 민혁의 모습을 비춰 주지 않았다.
아침이 찾아왔다. 하지만 민혁의 작은 지하방에는 햇살 한 줄기 들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시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15시까지 면접. 그는 자신이 어디에 지원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민혁은 이불을 개고 면접에 입을 낡은 하얀 셔츠와 찢어진 코트를 챙겼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찬물로 몸을 씻으며 엉뚱한 상상을 했다.
'이러다 추위를 못 느끼는 병에 걸리면 어떡하지?'
샤워기에서 나오던 따뜻한 물은 고작 몇 분 만에 차갑게 변했다. 민혁은 이미 익숙했다.
'처음부터 차가운 물만 나오는 건 괜찮은데. 따뜻하다가 차가워질 때, 그때가 진짜 억울하고 서럽지.'
개운하게 씻고 나온 민혁은 이불을 둘러 싸맨 채 면접장 위치를 확인했다.
'걸어갈 만하겠네. 버스 왕복 삼천 원인데.'
민혁은 겨울의 무자비함을 잊은 채 햇살을 받으며 걸었다. 인생이 쉽지는 않지만, 이렇게라도 노력하는 자신에게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면접장이 있는 건물 앞에 선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옥상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면접장에 들어선 민혁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다단계네. 씨팔.'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기석에 앉아 회사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며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다단계라고 못 할 게 뭐야? 내가 잘하면 돈은 벌 수 있잖아? 이게 이력이 돼서 나중에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을 거고.'
면접장의 안내원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민혁은 안내를 받아 면접관 앞에 앉았다. 분홍색 스웨터와 붉은색 안경을 쓴 마른 남자. 민혁은 그의 모습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면접관 역시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건들거리는 민혁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예."
"자기소개... 아니, 인간적으로 면접을 보러 오는데 면도는 하고 와야 하는 거 아냐? 머리도 좀 자르고?"
민혁은 입술을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의 상사가 아니었다.
"야, 이 씨발놈아."
"예?"
"네가 벌써 내 상사냐?"
그날 민혁은 면접에 떨어졌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인간들보다는 자신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모순. 그것이 그의 문제였다. 더럽고 보잘것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는 남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면접을 보고 나온 세상에는 똑같은 햇빛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경제력에 맞는 자존감을 가져야 하려나.' '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 때문에 머리를 자를 순 없지.'
그는 어두운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거미줄과 곰팡이, 노래진 하얀 벽지와 낡은 TV. 민혁은 준호와 함께 바라보았던 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른 목적은 없었다. 그저 집에 가기 싫었을 뿐이다. 한 시간은 되는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뛰놀던 거리를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여기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는데. 저기에는 태권도장이 있었고. 집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애들은 여기서 놀고 있었지. 생각해 보면 한 번도 약속을 잡고 만난 적이 없네. 이곳 전봇대 앞에서. 준호랑 나은이랑 다른 애들은 기억이 잘 안 나네.'
민혁은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아이가 분홍 스웨터를 입은 남자에게 욕을 먹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민혁의 발걸음이 호텔에 도착했을 즈음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치 어렸던 그날처럼 민혁은 호텔 앞에 서 있는 준호를 볼 수 있었다. 준호는 어제와 같이 호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혁은 준호의 뒤로 다가가 장난스럽게 놀라게 하며 말을 걸었다.
"와, 너 진짜 돈 필요한가 보네."
"뭐냐? 여긴 왜 왔냐?"
"몰라. 너는?"
"나도 몰라."
준호는 언제나 그랬듯이 말없이 민혁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그들은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이며 호텔 뒤로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준호는 로비에서 수건이 가득 담긴 카트를 끄는 직원을 발견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분명 하얀 피부를 가졌지만 어두운 얼굴. 항상 땅을 응시하는 습관. 턱에 있는 큰 흉터까지. 준호는 민혁을 팔꿈치로 찌르며 로비를 손으로 가리켰다.
"야, 쟤 걔 아니야? 중학교 때 승은인가 승훈인가?"
"맞는 것 같은데? 쟤는 아직 이 동네 사나?"
"여기서 일만 하는 거 아니야? 너 쟤랑 대화해 본 적 있어?"
"한 번도 없어.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나는 쟤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신기하네."
민혁은 아는 얼굴이 그곳에 있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의 마음은 준호의 제안을 이미 받아들인 듯했다.
"문제가 될까?"
"뭐가?"
"아는 얼굴이 있잖아."
"아무도 쟤를 기억 못 할걸? 쟤는 우리를 기억하려나? 왜? 내 말대로 하려고?"
"언제 할 건데?"
"크리스마스이브."
"얼마 안 남았네. 위치는?"
"13층 비상구 옆, 수리 중인 세탁기 안."
"그렇게 허술한 곳에 돈을 뒀다고?"
"말했잖아. 13층은 아무도 못 간다니까."
설렘에 추위도 잊었던 민혁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 후에야 다시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준호와 함께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