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매의 창세기
2. 설산
북쪽으로 향하는 작은 배 위, 조슈아는 솔로몬을 향해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설산에, 어려서부터 함께 지낸 수도사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우르고스 출신이지만, 지금은 설산에 처박혀 명상이나 하고 있지.”
“그렇다면 그분이 원로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겠습니까? 명국의 병사들이 제집 드나들 듯 북쪽의 땅을 밟는데, 철학자라는 작자들은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으니까요.”
“예전에 설산의 친구와 함께 전장에 나선 적이 있었어. 우리는 수평선 너머에서 쇄도하는 붉은 명국의 군함들을 보았지. 그 위용에 비하면 우리 배는 썩은 나뭇잎처럼 초라했어. 나와 친구는 간절히 기도했지. 거대한 파도가 저들을 덮쳐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시길.”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파도가 치긴 했지. 하지만 그들의 군함을 향하지 않았어. 해일은 명국의 해안도시를 휩쓸었어. 마치 신의 저주처럼. 죄 없는 아이들만 수장됐어.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약자들 말이야. 명국의 함대는 뱃머리를 돌렸어. 국가적 재난 앞에서는 전쟁도 사치였으니까. 그날 이후 내 친구는 기도를 멈췄고, 우르고스를 떠났어.”
“사령관님은 신이 잔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심해의 괴수가 해일을 일으킨 건 아닐까요?”
조슈아는 대답 대신 망원경을 들어 폭풍 너머 동남쪽의 불길을 쫓았다. 렌즈 너머로 명국의 해안에서 퇴각하는 불타는 선단과 야만인들이 어른거렸다. 솔로몬 역시 불타는 배 중 하나, 그 갑판 위에 선 선장을 주시했다.
폭풍이 가로막은 아득한 거리였지만, 솔로몬은 야만인 선장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느꼈다. 거구에 붕대를 감은 얼굴, 화염에 휩싸인 창을 든 괴인.
솔로몬은 반사적으로 가슴의 흉터를 움켜쥐었다. 공포가 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내 뜨거운 공포는 서늘한 분노로 바뀌었다. 조슈아가 잡담으로 그의 분노를 흐트러뜨렸다.
“명국 놈들에게 깨지고 도망가는 길인가 봅니다. 불타는 숲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사가 있길래 침략을 멈추지 않는 겁니까? 전선을 이중화할수록 승산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저들은 왜 저토록 폭력과 전쟁에 미쳐 있는 겁니까?”
“글쎄,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니까. 비가 내리고 나무가 자라듯, 혼돈과 폭력이 곧 자연의 섭리라 믿는 거지.”
“짐승처럼 본능에만 휘둘리는 놈들인 줄 알았는데, 지휘관도 있는 걸 보면 나름의 체계가 있나 봅니다.”
조슈아의 말에 솔로몬은 다시 한번 불타는 배의 선장을 향해 망원경을 들었다. 렌즈 위로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북쪽의 땅이 머지않았다는 신호였다.
추위에 떨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든 조슈아는 악몽에 시달리는 듯했다. 솔로몬 역시 갑옷 위에 두꺼운 천을 덧대었다.
뱃머리에 앉은 늙은 뱃사공 곁에서, 솔로몬은 다가오는 설산을 응시했다. 눈 덮인 하얀 봉우리와 바람에 울부짖는 침엽수림. 배는 땅에 닿기도 전에 얼어붙은 강에 부딪혀 멈춰 섰다. 노인이 솔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더는 배로 갈 수가 없습니다.”
“걸어가야겠군. 자네도 따라오게. 여기 남았다간 얼어 죽을 거야. 철학자들이 자네가 잠시 몸을 녹일 곳 정도는 내어줄 거야.”
거울처럼 투명하게 얼어붙은 강 위로, 세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해를 삼킨 구름 탓에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했다. 그들은 묵묵히 침엽수림을 뚫고 전진했다. 정적을 깨고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오히려 숲속에 들어오니 강 위보다는 덜 추운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조슈아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가파른 산세가 바람을 막아주는 탓일까? 숲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솔로몬은 위화감을 느꼈다. 배에서 보았던 숲은 분명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보다 날카로운 무엇이 솔로몬의 귓가를 스쳤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늙은 뱃사공이 차가운 설원 위에 무릎을 꿇었다. 명치에 꽂힌 화살을 붙잡은 노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조슈아는 매의 문양이 새겨진 은색 대방패로 솔로몬의 등을 감싸며 주위를 살폈다. 솔로몬의 시선이 숲의 어둠을 파고들었다. 붉은 천을 두른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활과 검으로 무장한 그들은 순식간에 일행을 포위했다. 북쪽 경로를 통해 우르고스 침투를 시도하다 낙오된 명국의 패잔병들. 솔로몬은 철학자들을 설득해야 할 이유를 뼈저리게 다시 한번 느꼈다.
솔로몬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노인을 뒤로, 적장으로 보이는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든이 넘은 노인이다. 무장한 전사 둘과 노인이 걷는데, 노인에게 활을 겨누다니. 이 산의 추위가 너희를 미치게 했구나.”
적장은 머리를 덮은 천을 걷어 목에 걸쳤다. 검고 붉은 머리카락, 뱀을 닮은 이목구비. 명백한 명국인이었다. 여섯 명 남짓한 부하들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적장이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사무치게 증오하다 보면, 그 대상을 결코 편히 보내줄 수 없는 법이지. 인사라도 나누고 싶었다. 네놈 목을 가져간다면, 왕께서 우리를 다시 받아주실지도 모르니. 듣자 하니 우르고스의 전사들은 죽는 순간 황제를 만난다지?”
순간, 숲을 가르는 파열음에 적장의 말이 끊겼다. 화살 하나가 적장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명국의 병사들이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조슈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대방패를 휘둘러 적들의 활을 쳐내고, 번개같이 검을 뽑아 두 명의 목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솔로몬 앞에도 적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솔로몬의 검에 관통당한 채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숲으로 도망치는 마지막 패잔병을 향해 조슈아가 적의 활을 들어 조준했다. 솔로몬이 조용히 조슈아의 팔을 내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짧은 안도를 교환했다. 숲의 그림자 속에서 갈색 로브를 입은 사내가 활을 든 채 걸어 나왔다.
“사슴이나 잡을까 했는데, 거물이 걸려들었군. 살아 있었나, 솔로몬?”
“수도사들은 살생을 금하는 줄 알았건만.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네.”
조슈아는 갈색 로브의 사내를 훑어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금갈색 머리카락, 솔로몬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얼굴. 조슈아는 직감했다. 이자가 바로 솔로몬의 옛 친구이자, 철학자들의 산에 은둔한 그 수도사임을.
솔로몬은 눈밭에 쓰러진 노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내가 따라오라고 했지. 분명히. 배에 남아서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수도사는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노인의 시신을 덮어주며 무심하게 말했다.
“수도원의 아이들을 보내 합당한 장례를 치러주겠네.”
“분명 저 쓰러진 패잔병 놈들의 장례도 치러 주겠군.”
“그래. 태어나고 죽는 게 어디 우리의 의지이던가.”
“...마음대로 하게. 내 알 바 아니니.”
세 남자는 다시 숲을 지나 설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슈아가 보기에 두 사람 사이엔 오랜 친구라기엔 묘한 거리감이 흘렀다. 눈 덮인 산길은 길잡이 없이는 한 발짝도 떼기 어려워 보였다.
로브를 벗어준 탓에 얇은 옷차림이 된 수도사를 위해, 조슈아는 방패로 앞서 바람을 막아주려 했다. 그러나 수도사는 괜찮다는 듯 앞장섰다. 수도사는 조슈아를 통해 솔로몬의 안부를 물었다.
“자네들이 명국 놈들과 마주쳤을 때, 솔로몬의 표정을 보았네. 녀석은 아직도 삶에 큰 미련이 없나 보군.”
“사령관님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죽는 게 상관없다는 거겠지.”
매번 주교를 만나러 탑을 오르던 솔로몬, 산을 집처럼 여기는 수도사와 달리 조슈아의 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살을 에는 바람과 눈보라를 뚫고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안개가 걷히자, 잿빛 하늘 아래 웅크린 회색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의 은총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석조 건물이었다.
척박한 설산에 박힌 수도원은 거대한 짐승의 백골처럼 앙상하고 기괴했다. 세 남자는 육중한 철문 앞에 섰다. 솔로몬은 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을 느꼈다. 이내 철문은 끊어지는 현악기처럼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수도원의 내부는 더욱 볼품없었다. 얼어붙은 분수와 말라죽은 나무를 지나 그들은 예배당에 들어섰다. 황제의 동상도, 명왕의 제단도 없는 텅 빈 공간.
조슈아는 예배당 벽난로 앞에 주저앉아 언 몸을 녹였다. 장의자에 걸터앉은 솔로몬이 오래된 친구, 수도사에게 입을 열었다.
“이삭, 원로들과 이야기를 해야겠네.”
“누가 말렸나? 2층 서재에서 책이나 읽고 있겠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그들을 설득해야 하네.”
“이번엔 꽤 무거운 요청을 들고 온 모양이군.”
“우르고스 군이 이 땅에 주둔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우르고스의 새로운 식민지라도 만들 셈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르고스의 모든 인간은 자유야.”
이삭은 불을 쬐고 있는 조슈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자네는 자원입대했나?”
“제가 직접 지원한 것은 아니지만, 우르고스의 남자라면 마땅히...”
이삭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걸렸다. 솔로몬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가롭게 철학적 논쟁을 벌일 시간은 없었다. 솔로몬은 의자에 놓인 철학서를 툭 치며 말했다.
“명상이든 영혼 탐구든, 자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대신 우리가 자네들을 지키게 해줘. 명국 놈들이 제집처럼 이곳을 드나들며 우르고스를 침략하는데, 철학자들의 책임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말할 텐가?”
“우리는 속세의 정세에 관여하지 않아.”
“생존이 정세와 무슨 상관인가. 오늘 나도, 자네도 명국 패잔병들에게 죽을 뻔했어. 여기 있는 늙은이들도 매일 그런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다고.”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네. 내가 먼저 올라가서 늙은이들에게 귀띔해두지. 잠시 후에 올라오게.”
이삭은 의자에서 일어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참으로 볼품없는 수도원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함도, 성인을 기리는 동상도 없는, 그저 ‘비어 있는 공간’에 불과했다. 난로 앞에서 언 몸을 녹이던 조슈아가 강단 의자에 홀로 앉은 솔로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들이 명국 병사들의 우르고스 침공을 방관한다면, 이곳 철학자들 역시 우리의 적이 되는 것 아닙니까.”
솔로몬은 조슈아의 곁으로 다가와 갑옷을 벗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답했다.
“판단은 황제께서 하실 것이다.”
솔로몬은 허리춤의 단검마저 풀어놓은 채, 이삭을 따라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돌계단은 걸음마다 미세한 돌가루를 흩뿌렸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로운 난간을 짚으며, 솔로몬은 어렴풋이 그들의 삶을 이해했다. 원로들의 방 앞에서 그는 이곳의 삶을 되짚어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야말로 가장 무가치한 허상이라...’
문을 열자, 세 명의 노인이 나지막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곁에 선 이삭이 솔로몬에게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 금이 간 회색 벽, 천장에 드리운 거미줄, 그 아래 놓인 낡은 참나무 테이블. 솔로몬은 그 초라한 탁자에 앉아 노인들과 마주했다. 솔로몬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하얀 수염과 초점 잃은 눈동자. 세상과 단절된 채 너무 오랜 세월을 보낸 이들이었다. 그가 노인들을 판단하듯, 노인들 역시 그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솔로몬은 숨이 막혀왔다.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결정하셨습니까. 우르고스는 이곳, 섬의 동쪽에 진지를 구축할 것입니다. 명국이 다리를 완성하게 둘 순 없습니다. 혹시 모를 산속 명국 패잔병들의 기습에 대비해, 수도사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자네는 무엇을 믿나? 황제를 믿나?”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경고를 무시했다간, 붉은 천을 두른 병사들의 칼에 당신들의 목이 날아갈 것입니다.”
솔로몬의 직설적인 화법에 이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삭은 서둘러 낡은 테이블에 합석했다. 혹여나 언성이 높아질까 노심초사했으나, 나머지 두 노인은 입을 열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대화를 주도하던 원로가 솔로몬의 팔에 새겨진 흉터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속세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네. 게다가 명국 패잔병들이 이곳을 공격하리란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우르고스의 사령관이라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의 허락 따윈 무시하고 군사를 배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나?”
“당신들의 동의 없이 군기지를 세운다면, 우르고스가 명국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이미 알고 있네. 자네에겐 남은 가족도, 친구도 없다는 걸. 이제는 황제를 향한 신앙마저 이곳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지. 죽음을 갈망하는 사령관의 말을 따르라는 건가? 신앙 없는 자의 제안은 공허할 뿐이네. 모두가 자네처럼 생을 하찮게 여기진 않아.”
노인의 말에 솔로몬의 이성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머리끝이 뜨겁게 열기가 치솟았지만, 그는 깊은숨을 토해내며 감정을 눌렀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명국 군대가 이 땅을 짓밟고 지나간다고 가정해보세. 자네는 그저 우르고스가 전장이 되는 게 싫은 거야. 이 보잘것없는 철학자들의 땅은 전략적 요충지니까. 숲이 불타고 수도원이 무너져도 자네 알 바 아니겠지. 무고한 우르고스 시민들만 다치지 않는다면 말이야. 자네는 우르고스 사람들이 자네처럼 신앙을 잃고 타락하는 게 두려운 거야.”
노인의 통찰이 정곡을 찌른 탓일까, 솔로몬은 붙잡던 분노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두 노인을 노려보았다. 이곳에 오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이곳에 오느라 죄 없는 뱃사공이 목숨을 잃었다.
솔로몬은 낡은 의자를 집어 들어 촛대를 향해 내던졌다. 굉음과 함께 방 안이 암흑에 잠겼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이삭이 난처한 듯 말했다.
“꽤... 인상적인 토론이었군요.”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솔로몬의 등 뒤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털며 말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이야기해보지. 자네와 부관이 머물 곳을 마련하겠네. 종이 울리면 서관 식당으로 오게.”
솔로몬은 대꾸 없이 방을 나섰다.
1층 예배당으로 내려왔을 때,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예배당의 촛불은 더욱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자리를 지키던 조슈아는 위층의 소란을 들었는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부관으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곁을 지키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조슈아는 의자에 주저앉는 솔로몬을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대화가 순탄치 않았나 봅니다. 무기를 두고 가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솔로몬은 묵묵히 예배당의 철학 서적을 뒤적였다. 설득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솔로몬이 일어섰다.
“식사나 하러 가지.”
“그래도 밥은 주나 봅니다.”
매서운 설산 등반과 격렬한 언쟁이 끝나자,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의 마음에도 평온이 찾아왔다. 그들은 예배당을 나와 어둠이 내려앉은 안뜰을 가로질러 걸었다. 조슈아에게 이곳의 적막은 몇 년 만에 느껴보는 평화와도 같았다.
눈을 치우는 수도사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네며, 그들은 서관의 낡은 나무 문을 열었다. 길게 뻗은 테이블에 수도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솔로몬은 배식대에서 스튜를 푸고 있는 이삭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이삭은 두 사람에게 그릇을 건네며 짓궂게 웃었다.
“많이 들게. 노인네들이 더 들들 볶을 테니. 손님 대접하는 것도, 손님 노릇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솔로몬과 조슈아는 빵과 스튜를 받아 들고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공교롭게도 맞은편에는 아까 언성을 높였던 그 원로가 앉아 있었다. 솔로몬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세월의 지혜인지 눈치인지, 노인은 솔로몬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밥 먹을 때만큼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편히 들게.”
조슈아는 식전 기도를 해야 하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솔로몬과 수도사들이 아무런 의식 없이 숟가락을 들자, 그제야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접시가 비워질 무렵, 노인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뭐 하는 곳인지, 그걸 알아내려고 모인 사람들일세.”
따뜻한 스튜와 포만감에 나른해진 솔로몬이 되물었다.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바꾸려는 게 아니야. 그저 알려고 하는 거지. 자네가 황제와 신의 일체를 믿듯, 우리는 지식을 신앙할 뿐이야.”
“그래서 얼마나 알아내셨습니까. 이 수많은 책과 명상을 통해서.”
“태초에 우린 모두 야만인이었지. 생각해보게. 황제의 마천루와 비록 소박하지만 따뜻한 이 수도원, 그리고 명국의 뜨거운 문명까지. 한낱 짐승에 불과했던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나?”
“우르고스에선 황제께서 신의 말씀을 전해주셨기에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우린 자네들의 믿음을 존중해. 진심일세. 빈말이 아니야. 우린 자네 생각보다 훨씬 세속적이고 건조한 족속들이야. 뜬구름 잡는 이상만 바라보며 사는 건 아니라네.”
“예배당에 놓인 책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지식의 돌’이 있다고 하더군요. 허나 구원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 돌에 닿을 수 없다고.”
“그래. 그 돌은 무한한 지식을 주지. 하늘에 닿을 탑을 쌓을 만큼의 지식. 그뿐이겠나? 영생을 얻을 지혜까지 준다고 전해지지.”
“영생이라는 걸, 믿으십니까.”
노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 돌을 목격한 이들이 있다고 해. 개중 한 명은 우리도 익히 아는 자야. 명왕의 선조 중 한 명이지. 허나 그는 신화 속에서나 살아 숨쉬지 않는가. ...영생이란 건 허상이겠지. 만약 있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형벌이겠나.”
노인은 식기를 챙겨 일어날 채비를 했다. 솔로몬은 목적을 달성해야 했지만, 노인의 평온을 깨트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솔로몬은 침묵했다. 그때, 접시를 닦으러 가던 노인이 툭 던지듯 말했다.
“우르고스 놈들은 죄다 불같은 성미를 가졌다더군. 자네는 의자 하나와 촛대 세 개를 우리에게 빚졌네.”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솔로몬을 돌아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땅의 동쪽에 정규군 진지를 구축하는 건 허락할 수 없네. 하지만... 자네가 이끄는 군단의 사설 훈련소를 짓는 것이야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니지 않나? 누가 알겠나? 풋내기 훈련병들이 불의 제국의 군대를 막아설지.”
노인이 문을 나서고 나서야, 솔로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노인의 저의를 뒤늦게 깨달은 조슈아 역시, 그제야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슈아는 이삭의 안내를 받아 서관 2층, 온기가 감도는 벽난로 곁에서 잠을 청했다.
홀로 남은 솔로몬은 식탁에서 글을 적어 내려갔다. 우르고스의 대주교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바다의 폭풍은 우려할 것이 아닙니다. 소규모 병력을 순차적으로 보내십시오. 조슈아가 그들을 통솔할 것입니다. 저는 동쪽으로 향하여, 충분한 병력이 집결할 시간을 벌겠습니다.'
마침표를 찍으려는 찰나, 갈색 로브 자락이 시야를 가르며 이삭이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그는 편지를 힐끔 살펴보았으나, 내용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주교에게 건네는 편지인가?”
“그래.”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는 전쟁터를 확보했다는 편지를 보내는 건가? 자네는 진심으로 황제를 믿나?”
“믿는 게 아니야. 아는 거지. 진정한 우르고스인들은 죽음의 순간에서 신과 황제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죽어 본 적이 없으니 믿지 못하겠지. 이렇게 다시 한번 언쟁을 펼치겠군. 예전과 같이.”
“무엇이 문제인가? 이삭, 자네는 황제를 믿지 않아. 황제가 신과 대화한다는 사실조차도 믿지 않지. 그래서 우르고스를 떠났네. 나는 붙잡지 않았어. 그렇게 떠났으면 남의 신앙은 내버려 두겠나?”
“황제가 진정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 거라 믿는 것인가? 황제를 한 번이라도 알현한 적은 있는가?”
“이미 만드셨지. 앞으로 만들어가실 세상도, 명왕의 피와 불로 넘치는 땅보다는 나을 거야. 남쪽의 야만인들이 지배하는 폭력으로 가득 찬 땅보다는 나을 것이네.”
솔로몬의 얼굴에 드리운 짙은 피로를 읽은 이삭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청춘을 내내 이어진 논쟁을 더 이어갈 수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삭은 이내 침구류를 가져와 솔로몬에게 툭 던졌다.
“2층에 올라가면 코를 골고 있는 자네의 부관이 보일 거야. 그 옆 침대를 쓰게.”
솔로몬은 서신을 곱게 접어 품에 숨긴 뒤, 육중한 침구를 들고 2층 계단을 밟았다. 예배당보다는 나은 형편이라지만, 계단이든 천장이든 당장 무너져내려도 이상할 것 없는 낡은 건물이었다.
잠든 젊은 수도사들을 지나치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조슈아의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밝음이 묘한 위안이 되는 순간이었다. 자리에 누운 솔로몬의 뇌리에 이삭과 노인의 말들이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선인가? 우르고스의 황제를 진정한 선이라 칭할 수 있는가. 그가 약속한 세상은 과연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가. 답 없는 목소리들 속에서 솔로몬은 서서히 잠들었다.
꿈에서 눈을 뜬 솔로몬 앞에 불타는 우르고스가 펼쳐졌다. 검은 연기가 시야를 차단하고, 시민들의 비명이 고막을 찢었다.
북쪽에서 쇄도하는 명국의 군대는 눈에 띄는 모든 인간을 창에 꿰어 전시했다. 남쪽에서는 화염에 휩싸인 야만인들이 곡도를 휘두르니, 우르고스는 화염과 비명이 뒤엉킨 생지옥으로 전락해 있었다. 대지를 뒤덮은 화염과 연기에 하늘의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은 압도적인 무력감에 짓눌렸다. 그는 황제가 기거하는 탑을 향해 기도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순간, 탑의 정점에서 거대한 매가 날아올랐다. 그 울음소리는 지옥으로 변한 우르고스 전역을 뒤흔들었다. 매의 포효와 함께 거대한 해일이 들이닥쳐 지옥불을 집어삼켰다. 솔로몬은 기적을 목도했다. 황제는, 그리고 신은 멸망 직전의 우르고스를 구원해냈다.
솔로몬이 눈을 떴을 때, 수도원의 새벽은 이미 밝아 있었다. 부지런한 수도사들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옆자리에서 군화 끈을 조이던 조슈아가 물었다.
“악몽을 꾸셨나 봅니다.”
“악몽이 아니다. 계시다.”
다시 갑옷을 두르고 방패를 짊어진 두 남자는 떠날 채비를 마쳤다. 수도원 한켠의 건물 굴뚝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솔로몬은 직감했다. 늙은 뱃사공의 장례가 시작되었음을.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아는 이 하나 없었다. 허나 수도사들은 이름 모를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삭과 솔로몬은 서로를 좋아하진 않았으나, 서로를 읽어내는 데는 탁월했다. 연기를 응시하는 솔로몬에게 이삭이 괜스레 어깨를 부딪혔다.
“사공이 필요하겠군. 우르고스와 이곳의 길을 잘 아는.”
솔로몬은 이미 짐을 챙겨 나온 이삭을 확인했다. 녹슨 철문 앞에서 솔로몬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예배당 앞에 선 세 명의 원로에게 목례를 건넸다. 철문은 다시 한번 쇠 긁는 비명을 지르며 닫혔다.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올라왔던 날과는 달리, 하산하는 세 남자 위로 따스한 햇살이 축복처럼 내리쬐었다. 원로들과의 협상이 성사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된 조슈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이삭은 솔로몬의 미소 뒤에 감춰진 짙은 그늘을 읽어냈다.
셋은 가파른 설산에 꽂힌 소나무를 지지대 삼아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그들이 숲에 당도했을 때, 얼어붙은 강가로 향하는 희미한 발자국이 햇빛에 드러났다. 세 남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발자국은 얼어붙은 강변의 작은 배로 향해 있었다. 두 남자의 거대한 군화 발자국은 조슈아 일행보다 한발 앞서 배에 당도해 있었다.
도망쳤던 명국의 패잔병들이었다. 그들은 솔로몬의 배를 불태울 심산이었다. 패잔병 중 하나가 어둠 속에서 입꼬리를 비틀며 속삭였다.
“더 좋은 생각이 있어.”
솔로몬 일행은 얼어붙은 강가로 이어지는 숲의 남쪽에 다다랐다. 솔로몬이 이삭에게 물었다.
“동쪽의 해안은 어느 방향이지? 노인들이 준비했다는 배가 있는 쪽.”
“왼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죽은 나무들이 보일 걸세. 그 고목들 아래로 밝은 흙길이 나타나면 그대로 따라가게. 해안가에만 닿으면 배를 찾기는 어렵지 않을 테니.”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조슈아가 끼어들었다.
“저희는 우르고스로 돌아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자네와 이삭은 우르고스로 돌아갈 거야.”
“사령관님은 가지 않으십니까?”
솔로몬은 품에 넣어둔 서신을 꺼내 조슈아에게 건넸다.
“우르고스에 도착하자마자 주교에게 달려가라. 진지를 구축할 자재와 무장한 병사들을 작은 배에 나눠서 이곳의 동쪽 해안으로 보내야 한다. 주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 사령관님은 동쪽의 해안에서 기다리시는 겁니까?”
“아니. 나는 더 동쪽으로 간다.”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명의 왕과 대화를 나누러 간다. 운이 좋으면 시간을 조금 더 벌 수도 있겠지.”
“그들은 사령관님을 발견하는 즉시 칼을 꺼낼 것입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저의 의무를 다하게 해주십시오.”
“너의 의무는 이 편지를 주교에게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삭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군에 남았다면 나보다는 나은 장군이 되었을 사람이니.”
솔로몬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매 문양이 새겨진 방패가 나무 사이로 멀어져 갔다. 조슈아는 근심 가득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쫓았다. 해안에 닿기도 전에 솔로몬이 숲속의 패잔병들에게 기습당하진 않을까, 불안이 엄습했다.
이삭은 조슈아의 마음을 알았지만, 솔로몬의 결단을 존중해야 했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강한 남자이니 걱정하지 말게. 따라오게.”
이삭을 따라 얼어붙은 강으로 향하면서도, 조슈아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설산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그의 금발과 수염은 꽤 자라 있었다. 이삭은 얼어붙은 강을 마주하고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매일 오가던 길이 평소와 낯설게 다가왔다.
“자네 검을 좀 빌리겠네.”
조슈아는 방패 안쪽에 수납된 검을 이삭에게 건넸다. 이삭은 검자루를 쥐고 얼음 표면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단단한 얼음은 금조차 가지 않았다. 이삭은 검을 돌려준 뒤 조심스레 얼음판 위로 발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고향으로 데려다줄 겸손한 목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삭은 여전히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오랜만의 귀향이 주는 긴장감 탓이라 여기며, 배에 올라탄 그는 얼음을 노로 밀어냈다.
조슈아는 뱃머리에 서서 멀리 바다를 응시했다. 배의 하부, 과거 밀항자들이 숨던 비밀 공간. 그 어둠 속에는 두 명의 패잔병이 숨을 죽인 채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은 복수의 때가 도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솔로몬은 바스라지는 고목 가지들을 밟으며 숲을 헤쳐 나갔다. 이삭의 말대로 죽은 나무들을 따라가자 황색 흙길이 드러났다. 흙빛이 변하자 솔로몬은 혹여나 다른 발자국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하산길에는 왜 이토록 신중하지 못했는지, 그는 자조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다시금 태양이 높이 솟았다. 눅눅했던 나뭇가지들이 바짝 말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솔로몬은 바닷바람이 실려 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눈앞에 아름다운 해안이 펼쳐졌다. 솔로몬은 발치에서 기어가는 게를 무심하게 건드리며 생각했다. 전장이 되기엔, 지나치게 과분한 풍경이다. 해안가 한편에, 그가 타고 왔던 것보다 더 작고 초라한 목선 한 척이 놓여 있었다. 돛이라도 달려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남은 여정은 단순했다.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것. 바람을 머금은 돛은 그를 명국으로 인도했다.
칠흑 같은 망망대해 위에서도 솔로몬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문득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심해의 괴수, 레비아탄에 대한 전설을 떠올렸다. 거대한 문어라느니, 고래나 상어를 닮았다고 말하는 어부들의 허풍들. 허나 그 괴물이 바다의 심장부이자 폭풍의 근원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솔로몬은 죽음 앞에 초연했다. 설령 지금 전설 속 괴수가 나타나 자신을 집어삼킨다 해도, 그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허나 조국을 위해, 그는 명국 땅에서 맞이할 죽음이 더 값지리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