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매의 창세기
3. 불과 뱀의 왕국
명국은 낮이 긴 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밤하늘의 별 무리가 솔로몬의 배를 띄운 검은 바다 위로 빛났다. 수평선 너머에서 명국의 불빛이 어스름하게 번져올 때, 솔로몬은 그 ‘긴 낮’의 의미를 깨달았다. 해변에 가까워질수록 문명이 만든 불빛에 밀려 하늘의 별들은 자취를 감췄다.
배에서 내린 솔로몬. 육중한 은빛 갑옷과 매 문양의 방패, 그리고 등 뒤의 거대한 검은 그가 이방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명국의 해안 경비대는 이방인을 주시할 뿐, 앞길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솔로몬은 직감했다. 명왕은 이미 자신의 방문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정보가 흘렀는지, 설산 패잔병들의 첩보였을지. 붉은 천을 두른 가벼운 차림의 경비대는 창끝 하나 겨누지 않았다. 공격도, 포박도 없는 이 기묘한 환대에서 솔로몬은 오히려 혼란스런 모멸감을 맛보았다.
이방인 솔로몬은 설산의 원로들이 건네준 지도를 쥐고 왕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안의 모래가 풀밭으로, 풀밭이 다시 정교한 석조 도로로 변했을 때, 솔로몬은 고개를 들어 도시를 올려다보았다. 명왕을 설득하거나 군대와 맞부딪치기도 전에, 압도적인 패배감이 그를 덮쳤다.
명국의 석조 건물들은 구름을 뚫을 듯 치솟아 있었고, 도시 곳곳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은 밤의 어둠을 지워버렸다. 거대한 건물 사이를 오가는 행인과 아이들의 얼굴 위 짐승 형상을 한 기괴한 가면들이 거리를 메웠다. 솔로몬은 이 화려한 도시에 정체 모를 역병이라도 창궐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솔로몬은 우르고스야말로 낙원이자 문명의 정점이라 믿어왔다. 허나 거대한 석탑 숲을 거니는 동안, 그는 거리의 오물도, 구걸하는 걸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득 우르고스의 시장에서 아이들에게 과일을 건네던 기억이 스쳤다. 이곳에서 그런 추억은 낡아빠진 전설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비록 풀과 나무, 모래는 적었으나, 솔로몬은 ‘끝나지 않는 낮의 문명’이라는 단어를 씁쓸하게 되새겼다.
지도를 따라 왕궁으로 향하는 동안, 가면을 쓴 어른과 아이들이 솔로몬을 구경하듯 힐끔거렸다. 비단옷을 입고 책을 낀 사람들 틈에서, 육중한 은빛 갑옷의 사내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아이를 불러세웠다.
“여기 사람들은 왜 모두 탈을 쓰고 다니는 것이냐?”
아이는 여우를 닮은 탈을 벗으며 솔로몬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모두 평등하거든요. 모두 원하는 동물이 될 수 있어요. 아저씨는 분명 이곳 출신이 아닌 것 같네요. 설마 북쪽에서 온 철학자인가요?”
“아니란다. 왕이 있는 건물이 어느 방향인지 알려줄 수 있겠니?”
“앞으로 계속 걷다 보면 붉은 벽돌로 높게 지어진 담벼락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문도 찾을 수 있겠죠 뭐.”
“너희의 왕은 어떤 사람인지 말해보거라.”
“모르죠. 만나본 적이 없으니.”
아이는 다시 탈을 눌러쓰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반듯하게 닦인 석조 거리를 걷던 솔로몬의 눈에, 붉고 거대한 담벼락이 들어왔다. 거칠면서도 매끄러운 붉은 벽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솔로몬은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정문의 입구, 그 위에는 전쟁터에서 지겹도록 마주했던 적의 상징, 뱀 문양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과 서로를 응시하는 상황이 묘한 어색함을 자아냈다. 붉은 천을 두른 적국의 전사를 보고도 검을 뽑지 않는 상황은 그에게 어색하기만 했다.
정문 안쪽, 붉은 카펫 위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붉은 로브를 걸친 노인이었다. 솔로몬은 우르고스의 대주교를 떠올렸다. 주교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무엇이라 평했을까. 붉은 로브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검은 그곳에 두고 따라오시지요.”
“방패도 두어야 합니까.”
“본인을 지킬 권리는 내려놓지 않아도 됩니다.”
은빛 갑옷의 이방인은 붉은 천을 따라 명왕의 궁으로 들어섰다. 솔로몬은 위화감을 느꼈다. 평범한 시민조차 마천루에 사는 명국이건만, 정작 왕의 거처는 소박한 목조 건물이었다. 그저 문화적 차이려니 짐작했다. 노인이 정문을 두드리자, 거대한 두 짝의 나무 문이 열렸다. 드디어 명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천의 끝, 정면에는 명왕의 옥좌가 놓여 있었다.
소문대로 창백하고 마른 몸, 작지 않은 키, 그리고 긴 적색 머리카락. 수염 또한 붉었고, 비단 옷자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팔다리의 털조차 붉었다. 우르고스인과 다른 생김새에, 솔로몬은 왕의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명왕의 곁에는 참모들로 보이는 원로들이 도열해 있었다. 솔로몬의 오른편에는 왕의 두 아들, 사혈과 사손이 서 있었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솔로몬이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임을 증명했다.
거구의 호위병들이 몇 있었으나, 솔로몬은 품에 단검 하나만 숨겼더라도 왕의 목을 베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계산했다. 그러나 곧 주교의 경고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오히려 이 허술함이 덫은 아닐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날카로운 굉음이 궁을 울렸다. 솔로몬은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혈이 도끼창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입을 열었다.
“왕과 대화하고 싶다면 당신의 황제가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전장 너머에서만 바라보던 적장, 사혈과의 첫 대면이었다. 솔로몬 또한 왜소한 체구가 아니었으나, 도끼창을 꼬나쥔 사혈의 위용은 거대한 사자를 연상케 했다. 이내 명왕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는 옥좌 아래 계단에 털썩 주저앉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솔로몬을 응시했다. 솔로몬이 침묵을 깼다.
“제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나봅니다. 왜 저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대화하러 온 것 아닌가? 내가 야만인인가? 왜 자네를 죽이겠나. 만나서 영광이네.”
“...”
“황제의 말을 전하러 왔는가?”
“황제가 아닌 제가 하고픈 말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궁 안의 모든 시선이 화살처럼 솔로몬에게 꽂혔다. 명왕의 차남 사손은 무언가를 질겅거리며 자신의 장검을 닦고 있었다. 누구보다 뱀을 닮은 그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여전히 계단에 앉아 붉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명왕이 웃으며 물었다.
“여태까지 몇 명의 명군을 죽였는가?”
“셀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대답에 사혈의 살기가 치솟았다. 명왕이 그를 응시하자, 사혈은 분을 삭이며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명왕이 말을 이었다.
“자네도 전투에서 죽은 적이 있다지? 석공의 아들이 한 나라의 총사령관이 되려면 죽음 정도는 겪어야 하나보군. 그래, 죽음의 순간에서 무엇을 봤나?”
“신을 봤습니다. 매의 형상을 한 신은 저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사혈이 들으라는 듯 구시렁거렸다.
“내가 전쟁에서 야만인의 망치에 머리를 맞았을 때 나도 새를 보긴 했지. 나는 닭을 보았다. 닭의 머리에 뱀의 다리를 한 것이 나보고 돌아가라 하더군.”
궁 안의 사람들이 사혈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명왕 또한 피식 웃으며 사혈에게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명왕은 다시 솔로몬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북쪽 설산과 남쪽 야만인들의 숲을 향한 다리의 건설을 멈춰주십시오. 또한 때때로 북쪽을 통해 우르고스를 공격해오는 군사들의 습격을 물러주십시오.”
“북쪽의 패잔병들은 나의 알 바가 아니지. 내가 왜 다리를 짓는 것을 멈춰야 하는가?”
“명왕께서는 북쪽 철학자들의 신앙을 존중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학살하고 서쪽의 우르고스를 향해 칼을 돌릴 것입니까. 결국 목적은 우르고스의 풍부한 광물이 아닙니까.”
“이곳에 오면서 명의 건축물과 기술들을 보았는가? 왜 우리가 우르고스의 하찮은 기술과 물질을 탐내겠는가.”
“이곳의 길과 건물, 그리고 모든 빛이 위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을 억압하여 얻은 부와 평화 아닙니까.”
“멋대로 판단하는군. 하비브! 그것을 가져오라.”
명왕의 명령에 붉은 로브의 노인이 옥좌 뒤편의 문으로 사라졌다. 솔로몬은 명왕이 말한 ‘그것’이 처형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뒤이어 든 생각은, 과연 우르고스의 황제라면 시종의 이름을 기억이나 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명왕이 솔로몬에게 물었다.
“그대들의 신앙은 무엇인가?”
“황제를 통한 구원입니다.”
“황제가 곧 신이며 창조자, 그리고 메시아라는 소리겠지.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해하고 있나?”
“하늘에서 내려온 뱀이 전해준 불과 지식으로 악신에게서 벗어나는 것.”
“우르고스인들이 믿는 신이 악신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 벽을 바라보게,”
솔로몬의 시선이 벽면에 빼곡히 적힌 이름과 숫자들로 향했다. 명왕이 말했다.
“선대 왕들의 이름과 통치 기간이다. 초대 왕들은 천년이 넘는 시간을 살기도 했지. 진정한 뱀의 지식, 그 불의 원류를 이해한 거다.”
“저는 종교 논쟁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초월적인 동물인 뱀, 그는 우리를 위해 추락했다. 운석의 모습으로 말이야. 우리는 운석에서 떨어져 나온 조금의 파편 조각으로 이 정도의 문명을 일궜다. 뱀의 파편에는 진리가 담겨있다. 뱀의 가르침은 간단했어.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땅에서도 일어나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나는 자네의 요청에 대한 답을 하는 거야. 뱀의 추락 이후, 파편이 아닌 운석 그 자체의 불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어. 몇 명 되지 않지. 원석의 진리는 전해지며 선대왕들은 영생은 아니더라도 천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갈 수 있었지. 뱀의 불꽃은 운명을 알려주었어. 그 운명은 우르고스의 황제가 이 땅 위에 멸망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말해.”
“점성술은 전쟁의 충분한 명분이 되지 않습니다. 명의 시민들이 고작 점성술과 신앙이 전쟁의 명분인 것을 알면 폭동을 일으킬 겁니다.”
“별을 보고 지은 자리에선 풍년이 나더군. 명의 시민들은 뱀의 기적을 진심으로 믿어. 자네가 황제에게 의구심을 갖는 것과는 다르게.”
솔로몬의 동공이 흔들렸다. 옥좌 아래 계단에 앉아 담담히 이야기를 읊조리는 자가 적국의 왕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할 지경이었다. 오른편의 사혈은 기둥에 삐딱하게 기대어 무심한 미소를 흘리며, 흔들리고 있는 솔로몬을 감상하고 있었다. 솔로몬의 약해지는 신앙에 혀를 차던 주교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그는 부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완벽한 뱀을 믿고 따른다고 해도 아직 우르고스를 멸망시키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신화 속에나 나오는 거대한 바다의 짐승이 두려워서입니까?”
“다른 짐승도 있지. 들판 위의 짐승, 베헤모스. 우리는 그 짐승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그것이 깨어날 때 우르고스는 한 줌의 재가 될 거야.”
“제정신이 아니군. 별과 신화를 빌미로 시민과 군인들을 학살하려 하다니.”
“진리를 거부하는구나. 불타는 뱀은 아직 이 땅 어딘가에 있어. 네가 찾고 싶다면 찾아봐라. 그러나 그 불을 끄기 위해 너의 황제는 이 땅을 멸망시킬 것이다. 너의 신은 인간을 위하지 않아.”
“다리의 건설을 중단하는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군.”
옥좌 뒤편의 문이 열리고, 하비브가 붉은 천에 싸인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는 상자를 솔로몬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솔로몬이 명왕에게 물었다.
“무엇입니까.”
“이곳에서 너의 목을 자르는 대신에 선물을 주기로 선택했다. 가져가라.”
솔로몬은 상자를 낚아채듯 집어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죽음을 갈구할수록 그것은 신기루처럼 멀어져 갔다. 적국의 왕이 있는 궁전에서 목청을 높이고도 살아 돌아가는 솔로몬. 치욕이었다.
붉은 천의 끝, 경비병들의 대열에 다다랐을 때 불청객이 앞을 막아섰다. 언제 빠져나왔는지, 뱀처럼 소리 없이 나타난 사손이 솔로몬에게 압수했던 무기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약해지긴 했지. 당신을 살려 돌려보내다니. 예전이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나에게 할 말이 있습니까.”
“물러진 왕의 치하 아래, 시민들이 살아갈 수 있겠소? 시민들은 아무런 죄가 없지 않소.”
“하실 말이 없는 줄로 알고 가겠습니다.”
찰나의 순간, 사손은 장검의 칼등으로 솔로몬의 흉갑을 가볍게 쳐냈다. 쇳덩이와 쇳덩이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기를 갈랐다. 솔로몬은 힘겹게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사손은 검을 천천히 거두며 비웃었다.
“멋진 갑옷과 방패군. 우르고스의 광물로는 그런 작품들을 만들어내는구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하지만 진정 죽음이 눈앞에 닥친 순간에, 네가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까? 네가 공포에 질려 죽어가는 그 순간에 내가 너의 앞에 있겠다.”
솔로몬은 사손의 차가운 장검을 맨손으로 쳐냈다. 우르고스의 검과는 다른 예리함에, 천천히 쳐냈음에도 손바닥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 나왔다. 솔로몬은 피 묻은 손으로 상자를 움켜쥐고 다시 해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그는 곱씹었다. 충분한 시간을 벌지 못했다. 솔로몬은 명왕이 하사한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불타오르는 운석의 파편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맹렬한 불꽃을 품고도 나무 상자에는 그을음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솔로몬은 그제야 명왕의 거처가 목조로 지어진 이유를 짐작했다. 그는 홀린 듯 불타는 돌을 응시했다.
순간, 솔로몬은 자신의 육신이 화염에 휩싸이는 환각에 빠졌다. 스스로가 거대한 불길, 그 자체로 변했음을 자각했다.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야만인 무리가 있었다.
솔로몬이 팔을 휘두르자, 불꽃이 맹렬하게 춤추며 야만인들을 집어삼킬 듯 쳐냈다. 솔로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원히 불타오르는 숲, 끝나지 않는 형벌처럼 노동에 시달리는 야만인들. 그곳은 남쪽 야만의 땅이었다.
밀려드는 야만인들을 불길로 쳐내던 솔로몬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있는 화상 입은 무리들. 그중 유난히 키가 큰 자가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온몸을 붕대로 감은 괴인. 그가 쥔, 화염에 휩싸인 창을 보는 순간 솔로몬은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야만인이 고개를 돌려 솔로몬을 응시했다. 그는 솔로몬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솔로몬은 돌이 보여준 환시에서 깨어났다. 자신은 불이었다. 자신은 불타고 있는 돌이었다. 솔로몬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운석의 파편을 매개로 원석의 위치를 엿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보로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솔로몬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휘몰아쳤다. 명왕이 내게 이것을 준 저의가 무엇인가? 그는 알고 있었던가? 내가 환시를 볼 수 있음을? 환시를 통해 원석의 좌표를 찾아내길 바란 것인가? 그렇다면 왜 나에게 준 것이지? 자신의 아들들이 아닌, 적국의 장수에게? 이 운석을 손에 넣는다면 우르고스는 명국을 압도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야만인들의 소굴 한복판에 있는 거석을 어떻게 탈취한단 말인가. ...잡념을 버리자. 내가 이곳에 온 목적, 오직 그것 하나만 생각하자.
솔로몬은 상자를 닫고 다시 명왕의 궁궐을 향해 질주하듯 걸었다. 붉은 담벼락을 따라 궁의 입구에 다다른 솔로몬이 경비병에게 외쳤다.
“왕을 만나야 한다. 급한 문제다.”
“왕께서는 침소에 드실 시간입니다.”
그때, 궁 안쪽에서 사손이 검을 빼 들고 걸어 나왔다.
“결국 네 화를 못 이겨서 죽으러 돌아왔구나.”
솔로몬이 방패를 고쳐 잡고 사손을 향해 묵직하게 발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창끝이 솔로몬의 목을 겨눴다. 검만큼 날카로운 상황에 궁의 문이 열리며 아까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솔로몬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경비병들이 길을 트자, 솔로몬은 붉은 천을 밟고 옥좌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솔로몬은 명왕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것의 원석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 원석의 파편인 이 작은 돌이 저에게 환시를 보여줬습니다.”
“역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군. 하지만 너의 말을 내가 어찌 믿지? 너의 말을 듣고 원석이 있는 곳에 병사를 보내는 게 너의 함정일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운석, 당신의 신은 남쪽 야만인들의 땅에 있습니다.”
“그들의 불은 태우는 불이며, 우리의 불은 밝히는 불이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그렇다면 내가 같이 가겠습니다. 내가 운석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면 될 것 아닙니까. 당신과 함께.”
궁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원로들과 경비병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명왕이 붉은 로브의 노인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노인은 황급히 궁을 빠져나갔다. 명왕이 솔로몬을 쏘아보며 말했다.
“누구와 가든, 그곳에서 우리가 너를 죽이고 운석을 거머쥐면 어떡할 것인가?”
“그곳으로 인도할 테니 돌은 가지시오. 하지만 당신의 약속과 명예를 걸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돌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돌의 사용처를 명확히 하기 전까지는 다리를 건설하고 우르고스를 침략하는 것을 멈추시오.”
“그렇게 하지.”
“나와 함께 남쪽 야만인들의 땅으로 향할 것입니까.”
“나는 늙어 긴 여행을 가지 못하니. 함께 갈 사람을 보내주겠네. 그러나 누가 알겠나. 자네가 나에게 돌을 가져다주면 영생을 얻어 앞으로는 긴 여행을 다니며 여생을 보낼지. 자네와 함께 갈 남자는 궁의 문 앞에서 이미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솔로몬은 명국의 예법대로 왕에게 고개를 숙인 뒤, 왕의 처소를 나섰다.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을 벌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야만의 땅에서 생환할 확률은 다른 이야기였다. 야만인들에게 찢기지 않더라도, 돌을 찾은 직후 명국 병사들에게 당할 가능성 역시 농후했다. 그럼에도 솔로몬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명왕이 적어도 명예와 약속은 생명처럼 여기는 사내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명국의 침공의 시계를 잠시나마 멈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궁문 앞, 자신을 기다리는 동행자를 확인한 순간 솔로몬의 안도는 허망함으로 뒤바뀌었다. 명국의 사자. 붉은 갈기를 휘날리는 거구, 거대한 도끼창을 짊어진 사혈이 그에게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냈다.
“쉬지 않고 갈 것이니 지치지 말고 따라와라.”
두 남자와 명국 군사들의 기묘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붉은 천을 두른 병사들 틈에서 은빛 갑옷의 이방인, 솔로몬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마치 끌려가는 포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명국의 남쪽 해안에 도착한 솔로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화포로 중무장한 거대한 전함이었다. 사혈은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듯 군함을 바라보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적색 거함. 솔로몬이 사혈에게 나직이 쏘아붙였다.
“바보인 거냐.”
“뭐?”
“이 정도 크기의 군함은 바다를 건너지 못해. 바다 중앙의 폭풍으로 빨려 들어갈 거다. 작은 배에 군사들을 나눠서 보내는 것이 옳은 방법이야.”
“명의 기술을 얕잡아 보는군. 혹시 바닷속의 괴수 이야기라도 믿는 것이냐.”
“이렇게 눈에 띄는 군함으로는 온전하게 상륙할 수 없어.”
“온전하게 상륙하기 위해서, 이렇게 강한 군함이 필요한 것이다. 손님이면 손님답게 있어라.”
“이번 임무를 이끄는 자로서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이다.”
“명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지. 장군 사혈은 죽지 않는 존재라고.”
“너는 너에 관한 전설을 믿는 거란 소리군. 훌륭하네. 좋은 여행이 될 거야.”
사혈은 솔로몬의 말이 비아냥인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은 이어졌다.
“야만인들의 섬에 가본 적은 있나?”
“해안가에서의 전투만 있었지.”
“조심해라. 섬의 중앙에는 마녀가 있다는 소문도 있으니.”
“너는 불멸이고 남쪽의 섬에는 마녀가 있다는 소리군. 나는 이번 임무에서 죽게 되는구나.”
솔로몬과 사혈은 쪽배에 몸을 싣고 군함으로 향했다. 화포의 행렬을 지나 갑판에 오른 두 사내는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마주했다. 동상이몽. 두 사내는 같은 태양 아래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사혈은 태양을 보며 아버지를 그렸다. 현재의 명국을 초월하는 태평성대, 그 위대한 과업을 완수하리라.
솔로몬은 태양 너머의 신을 찾았다. 그는 분명히 목도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신의 형상을 보았고, 목소리를 들었다. 저 하늘에 뜬 태양조차 황제의 소유물일 뿐이다. 그는 황제에게 기도를 올렸다. 사혈과 솔로몬을 태운 거함은 태양을 등지고 남서쪽 바다로 미끄러져 나갔다.
점점 선명해지는 우르고스의 능선을 보며, 조슈아는 깊은 안도감에 젖어 들었다. 고작 며칠간의 여정이었지만, 그는 뼈저리게 고향을 그리워했다. 제국의 영웅, 솔로몬의 그림자와 같이 살아온 조슈아는 누구보다 뜨거운 우르고스의 애국자였다.
이삭 또한 가까워지는 해변을 응시했다. 고향. 이삭은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곱씹으려 했으나, 가슴 한편에서 차오르는 본능적인 기쁨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랜 귀향이 주는 설렘이었다.
작은 배가 모래톱에 닿기도 전, 조슈아는 대방패를 멘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삭 역시 가볍게 배에서 내려 모래를 밟았다.
두 사람의 발이 파도에 떠밀려 우르고스의 대지에 닿았다. 파도 소리가 요란하게 고막을 때렸다. 조슈아와 이삭은 주교가 머무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오랜 명상으로 단련된 이삭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내는 데 능숙했다.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래를 집어삼키는 파도, 그리고 바다로 돌아가는 물결. 이삭은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이질적인 발소리를 포착했다.
이삭이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명국의 패잔병 두 명이 조슈아와 이삭을 향해 검을 뻗었다. 살기를 감지한 이삭은 패잔병의 손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악력에 눌린 패잔병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이삭은 바닥에 떨어진 칼자루를 발로 차올려 낚아채, 그대로 패잔병의 심장에 내리꽂았다.
이삭이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는 적의 복부를 관통한 검을 움켜쥐고 패잔병과 대치 중이었다. 이삭은 안도했다. 어린 나이지만 사령관의 부관 자리에 걸맞은 실력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조슈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조슈아의 검이 적을 꿰뚫은 것과 동시에, 적의 검 또한 조슈아의 복부를 깊숙이 관통하고 있었다.
검을 쥔 두 남자는 동시에 해변의 모래 위로 쓰러졌다. 이삭은 조슈아에게 달려가 검이 빠져나간 자리를 필사적으로 압박했다. 이삭의 사고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살려야 한다. 험난하고 은밀한 지름길이 아닌, 숲의 대로로 가야 한다. 사냥꾼이나 행인들의 눈에 띄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로 도시를 향해야 한다.
조슈아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야가 검은 먹물처럼 번져갔다. 조슈아는 기이한 평안에 잠겼다. 어둠의 저편에서 눈부신 빛을 내뿜는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를 응시했다. 조슈아는 홀린 듯 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압도적인 신성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의 신앙이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평생을 우르고스의 황제와 신에게 바쳐온 삶이었으나, 그 실체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벅차오르는 환희가 그의 우주를 뒤덮었다. 조슈아는 자신의 키만 한 거대한 매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깃털을 어루만졌다. 매가 머리로 조슈아를 밀어내며 울음을 토해냈다. ‘우르고스의 영웅, 조슈아. 우르고스를 구원하라.’
조슈아는 주교가 머무는 탑에서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붕대가 감긴 배에는 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교가 조슈아의 곁에 앉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네의 서신대로, 북쪽을 향해 병력을 파견하고 있네. 자네가 우르고스의 영웅일세.”
주교의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었던 신의 음성과 겹쳐 들렸다. 다시금 밀려오는 신성함에 조슈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탑의 벽에 기대어 우르고스를 내려다보던 이삭이 등을 돌렸다. 이삭은 자신이 떠나온 신앙을 불태우고 있는 두 남자를 보며 복잡한 상념에 잠겼다. 조슈아의 목숨을 건져낸 것은 이삭이었다. 허나 이삭은 신앙에 대한 논쟁보다는, 조슈아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다.
조슈아 역시 탑 저편에 서 있는 이삭을 바라보았다. 이삭의 낡은 갈색 로브를 본 조슈아는 생각했다. ‘가엾은 자. 믿음을 잃은 이교도.’ 그러나 이삭을 향해 지어 보인 미소에 담긴 감사는 진심이었다.
조슈아가 벗어 놓은 갑옷 위에는 은빛 훈장이 놓여 있었다. 조슈아는 뼛속까지 맹세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지옥 불길이라도 뛰어들 것이다. 이삭은 솔로몬의 부친을 찾기 위해 탑을 내려갔다. 이삭의 부재를 확인한 대주교는 황제의 침소로 들어가 유골단지를 들고나왔다. 주교는 단지를 조슈아에게 건넸다.
“황제는 신과의 합일을 이루신 분이다. 이제 너의 믿음에는 한 점 의혹도 없겠지.”
“황제의 뜻은 무엇입니까?”
“황제가 계시기에, 신이 계시기에 작은 싹이 트고 나무가 자란다. 신과 황제가 계시기에 태양이 뜨고 생명이 잉태된다. 그렇다면 죽은 생명은 어디로 가는가? 육신은 진흙이나 돌처럼 썩어 문드러진다. 허나 영혼은 황제의 인도를 받는다. 이교도는 그 인도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칠흑 같은 허공을 떠돌 뿐이지.”
“이 단지는 무엇입니까?”
“황제가 인도하던 영혼들이 담겨있다. 전사와 현자들의 영혼이지. 유골을 들이마셔라. 황제의 은총을 입어 무한히 윤회하던 영혼들의 지식과 힘을 네게 계승하는거다. 조슈아. 전쟁이 다가온다. 황제께서 너를 선택하셨어. 오직 너만이 이 힘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 거야.”
“하지만 사령관님이 돌아오실 겁니다.”
“조슈아. 솔로몬은 명국의 땅으로 갔다. 그는 살아 돌아오지 못해.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난 거야. 새로 태어날 영웅을 위해, 우르고스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기 위해. 그를 위해서라도 자네가 이것을 받아들여야 해.”
조슈아는 주교에게서 단지를 받아 들었다. 그 안의 하얀 가루 속에서, 조슈아는 영웅이 되어 우르고스를 구원하는 자신의 환영을 보았다. 주교는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단지 안에 붉은 피를 떨어뜨린 후 조슈아를 응시했다.
조슈아는 단지를 입에 대고 고개를 젖혔다. 피와 뼛가루가 식도를 타고 쏟아져 내리자, 그 독함에 다시금 매와 조우했다. 밤하늘 같은 암흑 속에서, 빛나는 매와 조슈아는 함께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명국의 패잔병이 찌른 검이 조슈아 본인의 복부를 꿰뚫는 순간을.
조슈아는 어두운 우주를 유영하는 영혼들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영혼들은 밤하늘의 별 무리와 다름없었으나, 그들을 인도하는 혜성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르고스의 황제, 찬란한 빛의 매였다.
매의 날갯짓과 포효에 흩어져 있던 영혼들이 조슈아의 오른손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검의 형상을 갖춰가는 영혼 덩어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곁에 선 매의 발톱 아래, 뱀 형상의 꼬리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조슈아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구토하기 시작했다. 마치 육신에 갇힌 수만 개의 영혼을 내보내려는 듯 고통스러운 구역질이 이어졌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구토를 멈춘 조슈아는 자신의 오른손에 검이 들려 있음을 자각했다. 은빛 검은 우주의 별만큼이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검끝은 매의 발톱처럼 예리했고, 손잡이를 움켜쥔 감각은 검과 육체가 하나 된 듯한 일체감을 선사했다. 조슈아가 허공에 검을 그었다. 검이 지나간 궤적 위로 매의 잔상이 어른거리고,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고막을 꿰뚫었다.
조슈아는 탑 벽면에 걸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태양처럼 빛나던 금발은 죽음의 순간에 떠나 모두 하얗게 새었고,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자, 그의 몰골은 송장과 다름없었다. 조슈아는 갈라지고 짐승처럼 날카로워진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본 뒤, 거울 너머로 비친 주교를 응시했다. 주교가 조슈아의 등 뒤로 다가왔다.
“신을 목도하고, 신과 하나가 된 자. 이보다 강한 신앙을 가진 자가 어디 있겠나? 이제 자네도 알겠지. 우르고스의 신앙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걸. 이교도들의 군대가 북상하고 있네. 어찌하겠나?”
“황제께서 그들의 영혼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제가 황제를 돕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