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매의 창세기
4. 소각의 숲, 남쪽에서
사혈과 솔로몬의 거대한 군함은 성난 폭풍 속에서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돛은 너덜너덜해졌고, 돛대는 힘없이 부러졌다. 갑판에 선 솔로몬은 사혈을 응시하며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나는 손님일 뿐이네.”
솔로몬의 능청에 사혈은 미간을 찌푸리며 바다를 노려보았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는 순간,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벼락이 묻은 허공으로 향했다. 다시금 어둠이 하늘을 덮고, 벼락이 바다 위로 쏟아졌다. 비바람과 천둥의 광란 속에서 배는 방향 감각을 잃고 표류했다. 붉은 머리칼이 흠뻑 젖은 채 갑판에 선 사혈이 홀로 중얼거렸다.
“젠장, 동서남북조차 알 수 없군.”
솔로몬이 비바람을 뚫고 소리쳤다.
“배가 거대한 만큼, 바다의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야. 배를 우현으로 돌려, 폭풍이 부는 방향의 사선으로 포를 발사해.”
갑판의 병사들은 사혈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즉시 키를 돌리고 포를 장전했다. 화포가 폭풍의 눈을 향해 불을 뿜었다. 발포의 반동으로 거함이 조금씩 밀려났다. 포성은 천둥소리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귀를 멀게 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사혈이 병사들에게 고함쳤다.
“닻과 배 안의 모든 짐을 배의 왼쪽으로 밀어내라. 내가 말하기 전까지 발포하지 말아라.”
병사들은 사혈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다시 한번 천둥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사혈과 솔로몬은 혼란 속에서도 직감했다. 이번 천둥소리 직전에는 그 어떤 섬광도 없었다. 두 사내는 배의 우현 끝에 서서 폭풍의 중심을 응시했다.
그들은 해수면 위로 솟아오른, 탑처럼 거대한 무언가를 목격했다. 뱀의 꼬리 같기도, 문어의 촉수 같기도 한 그것은 정체를 관찰할 틈조차 주지 않고 배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거인이 하찮은 벌레를 쳐내듯 배를 강타했고,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켰다. 배의 잔해와 함께 사혈과 솔로몬은 검은 바다로 튕겨 나갔다.
해변 위, 무릎 꿇은 채 바닷물을 뱉어내던 솔로몬은 뒤로 결박된 팔을 움직여보려 했다.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포박된 사혈과 병사들이 보였다. 일렬로 무릎 꿇려진 그들 앞에서 야만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혈은 물을 뱉어내는 솔로몬을 보고 이유를 추측하기 힘든 밝은 웃음을 보였다.
“드디어 깼군. 그러면 이제 계획대로 하지.”
“무슨 계획?”
사혈은 뒤로 묶인 밧줄을 괴력으로 끊어냈다. 동시에 감시하던 야만인에게 황소처럼 돌진했다. 사혈의 어깨가 야만인의 명치에 깊숙이 박혔다. 쓰러진 야만인 위에 선 사혈은 손가락을 세워 모욕했다. 그 소란에 다른 야만인들이 창과 곡도를 들고 그를 포위했다.
사혈은 자신을 향해 찌르는 창을 가볍게 잡아채 반으로 부러뜨렸다. 이어 쏜살같이 창 주인의 등 뒤로 돌아가 그를 들어 올려 바닥에 메다꽂았다. 솔로몬은 자신의 뒤쪽에서 타오르는 나무를 확인한 후 뒷걸음질쳤다. 불붙은 나뭇가지에 손목을 묶은 밧줄을 가져다 댔다.
생사의 기로에, 화상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결박이 풀리자, 솔로몬은 사혈이 떨어뜨린 부러진 창을 주워 결박된 명국 병사들을 풀어주었다. 야만인의 섬 해안 경비병들은 사혈과 솔로몬, 그리고 훈련받은 정예 명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야만인들의 시체 앞에 선 사혈은 자신의 갑옷을 갖춰 입고 도끼창을 들어 올렸다. 솔로몬 역시 은빛 갑옷과 검, 매 문양의 방패를 착용하며 사혈에게 따졌다.
“이렇게 목숨을 건 도박이 계획이었다고? 야만인들과 소란스럽게 씨름해서 탈출하는 게 계획이었다고? 이제 다음 계획도 말해보게.”
“우리는 섬의 동쪽에서 좌초한 거야. 숲의 중앙으로 향한다. 돌을 찾아야지.”
“그렇게 쉬울 거라면 왜 혼자 하지 않았나?”
“좋은 지적이군.”
사혈은 부관에게 자신의 무거운 도끼창을 던져 들게 했다. 그들은 불타는 숲에서의 행군을 시작했다. 명국의 병사들은 화염에 휩싸인 나무들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었다. 혼란스런 병사들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질문이 맴돌았으나, 앞장서 걷는 사혈의 등 뒤에 대고 물을 용기는 없었다.
솔로몬이 걸음을 멈추고 검으로 땅을 두드려 보았다. 그는 불붙은 나무가 비교적 적은 쪽을 가리켰다.
“암석 지대군. 이쪽이야.”
“괜히 북쪽으로 우회했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어쩔 셈이지?”
“앞을 봐. 나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땅의 암반층이 저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고. 그곳에 분명 야만인들의 거주지가 있을 거야. 그들의 우두머리가 누구든, 그곳에 돌이 있을 확률이 높아.”
“어떻게 확신하지?”
“너의 아버지가 건네준 돌이 보여줬다. 이런 암석들이 박힌 땅을 파고 있는 야만인들을.”
아버지의 이름을 들은 사혈은 솔로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남쪽 섬의 열기는 지독했다. 밤이 되었음에도 불타는 숲 때문에 하늘은 주홍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갔다.
사혈은 정말 이 방향이 맞는지 재차 묻고 싶었으나, 눈앞에 나타난 야만인 경비병 둘에 솔로몬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사혈과 솔로몬은 병사들에게 대기 수신호를 보낸 뒤, 신발을 벗었다. 소리 없이 경비병에게 다가간 사혈은 순식간에 야만인의 목을 꺾어버렸다.
동시에 솔로몬은 다른 야만인의 경동맥을 압박해 소리 없이 쓰러뜨렸다. 그들은 다시 신발을 신은 뒤, 경비병들이 지키던 방향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혈이 산을 오르며 솔로몬에게 물었다.
“명에는 산이 많지 않아. 보통 이런 경우에는 경비병들이 산의 입구만 지키나?”
솔로몬은 사혈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거대한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솔로몬이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사혈은 암벽을 타듯 거침없이 바위를 올랐다. 두 사내는 바위 위에 엎드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솔로몬의 환시는 정확했다. 넓고 불타버린 황야에 수많은 야만인이 땅을 파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질의 천막들이 즐비했다. 솔로몬은 가장 거대한 천막 옆을 주시했다. 그곳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맹렬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명국에서 신이라 불리는 운석의 위치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솔로몬은 사혈에게 운석의 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천 명의 야만인이 지키는 곳에 거대한 돌이 있구먼. 어쩔 셈이지? 일단은 그냥 돌아가는 게 맞지 않겠나?”
“그렇다면 명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뭐라 말하지? 돌이 있습니다. 이자의 말이 맞습니다. 하고 모든 것을 끝내라는 소리인가?”
두 사내는 일단 엎드려 있던 바위에서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을 따라오던 명국 병사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었다. 흉측한 흉터로 뒤덮인 야만인들이 그들의 목에 검과 창을 겨누고 있었다. 사혈이 다시금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때, 솔로몬이 사혈의 귀에 속삭였다.
“이번에는 내 방식대로 하지.”
솔로몬은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를 미련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사혈은 그런 솔로몬을 노려보며 분노와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솔로몬과 사혈, 그리고 병사들은 밧줄에 엮여 야만인들이 파헤치는 평야를 지났다. 그들은 구덩이를 파는 야만인들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깊게 팠는지, 어째서 파헤치는지 알 길은 없었다. 깊은 구덩이에서 기어나오는 야만인들의 형상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아귀와도 같았다.
사혈과 솔로몬은 불타는 돌의 곁, 거대한 천막 앞에 묶인 채 무릎을 꿇었다. 사혈은 솔로몬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다니, 이것이 너의 방법인가? 우르고스인들의 방법인가?”
“자네가 무기를 잡는 순간 자네를 따르는 병사들이 모두 죽었을 걸세. 그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무능한 사령관으로서?”
“명예로운 죽음이다. 전쟁에서 죽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야.”
“명예와 승리를 구분해야지. 이곳 야만인들의 수를 보게. 행여나 기적이 일어나 이겼다고 한들, 옆의 불타는 돌의 크기를 보게나.”
“나에게 다 계획이 있었어. 너만 아니었어도.”
“계획? 다시 한번 병사들에게 황소같이 달려드는 계획 말인가?”
그들을 감시하던 야만인들은 시끄럽다는 듯이 그들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순간 진지의 야만인들이 모두 엎드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천막이 열리며 솔로몬은 불타는 창을 든 자를 목격했다.
불붙은 창을 든 거대한 야만인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야만인들을 이끄는 자는 높은 굽에서 내려와, 얼굴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붕대가 풀리며 작아지는 몸집과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 큰 눈과 오뚝한 코를 가진 여인이 솔로몬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바다에서 헛것을 본 줄 알았더니, 정말로 살아있었군.”
“여자일 줄은 몰랐네. 나를 죽여 본 경험은 어떻던가?”
옆에 있던 사혈은 비웃으며 말했다.
“여자에게 전투에서 패배했던 것이군. 그래서 이곳에 오는 것이 그렇게 무서웠던 것이냐? 아름다운 야만인이여, 이름을 알려주게.”
“아시아. 마녀 아시아다. 돌을 찾아온 것이냐.”
아시아는 솔로몬과 사혈의 밧줄을 창으로 끊어냈다. 아시아는 천막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솔로몬과 사혈 역시 그녀를 따라 천막의 안으로 들어섰다.
솔로몬과 사혈은 천막 안에 있는 지도와 무기들, 그리고 돌의 파편들을 발견했다. 돌을 발견한 사혈의 눈은 반짝였다. 그는 아시아에게 말했다.
“큰 바위가 아니라, 저렇게 작은 돌들을 모아서 가져가면 되겠군. 아시아, 나의 아이를 잉태할 기회를 주겠다. 돌을 넘겨라.”
아시아는 사혈에게 다가가 돌과 같이 단단한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사혈은 거칠게 기침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솔로몬은 그 모습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솔로몬은 아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계속해서 우르고스와 명을 침략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왜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거지.”
“마법에 윤리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아. 철저히 배제하고 행하는 것이 마법이다. 내가 아니었으면 너희들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다가 진작에 멸망했을 거야. 그것이 돌이 나에게 준 사명이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
“마법? 균형? 헛소리를 쉽게도 하는군. 네가 아니었다면 우르고스에는 평화와 발전뿐이었어.”
“너희 두 멍청이가 나의 군을 막는 데 힘을 쓰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수가 죽었을 거야.”
“말도 안 되는 논리군.”
“그러면 보여주지. 사명이라는 것을. 너희 둘은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들인가? 그렇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와라.”
아시아는 천막을 걷어 밖으로 나갔다. 솔로몬과 사혈 역시 그런 아시아를 따라 불타는 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천막 앞에 묶여 있는 병사들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시아는 솔로몬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돌을 만져라. 손이 불타 화상 입은 이곳의 일개 야만인 중 하나가 되거나, 아니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겠지.”
솔로몬은 천천히 돌에 다가갔다. 돌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에 심각한 화상을 입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에 손을 올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솔로몬은 천천히 돌 위에 손을 올렸다.
돌은 따뜻했다. 그 따듯함은 그의 눈을 편히 감게 만들었다. 그는 다시 한번 스스로가 불타는 돌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빛이 우주 멀리 한곳으로 응집하는 것을 목격했다.
솔로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시아도, 사혈도, 묶여 있는 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빛이 응집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가 빛의 앞에 서서 눈부심에 눈을 가릴 때 그는 눈을 목격했다.
우주의 아버지, 혼돈과 조우했다.
솔로몬은 모습이 없는 어머니의 품을 느꼈다. 어머니의 손은 따뜻했다. 솔로몬은 느낄 수 있었다. 우주의 모든 지혜가 어머니의 손에 있음을. 그때 어머니가 그의 손을 놓으니 솔로몬은 끝없이 추락했다.
어딘가에 떨어져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우르고스나 명이라는 국가가 세워지기도 전, 원시 그 자체의 푸른 땅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손은 바다를 찢고, 산을 부수며 파괴를 즐겼다. 손은 이내 땅 위의 진흙을 빚어 거대한 뱀을 만들어 바닷속에 던져냈다. 바닷속의 거대한 뱀이 몸부림을 치니 푸른 땅 위에 해일이 쏟아졌다.
해일은 땅 위의 짐승들을 덮쳐 모든 것을 부수니 거대한 손은 뱀을 길들일 동물을 빚어냈다.
거대한 매는 뱀이 바다에서 머리를 들 때마다 발톱으로 뱀을 공격하니, 바다는 잠잠해졌다. 땅 위의 생물들은 영생을 누리나, 진흙은 떨어져 나가고,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영생의 모습은 추하기 그지없었다.
솔로몬은 하늘의 별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니 거대한 손의 존재가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별을 뚜렷이 바라볼수록 별의 빛은 진해졌다.
그제야 땅 위의 생물들은 고통스러운 영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늘은 바다를 반사해 바닷속의 뱀의 모습을 비추었다. 반사된 하늘의 뱀은 땅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니 솔로몬은 죽음이 두려웠다. 뱀은 운석의 모습으로 땅에 떨어지고, 짐승들은 불타는 운석에 매료되었다.
솔로몬은 돌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는 자신이 본 환영이 진리라는 사실에 무릎을 꿇었다. 그 허망함은 솔로몬의 모든 삶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우르고스의 황제는 누구인가. 신은 매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니, 매가 창조주라 믿으며 살아왔다. 매를 빚어낸 손은 누구인가. 매를 자청하고 살아가는 황제는 누구인가. 솔로몬은 분명 대주교만이 이 질문에 답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시아는 혼란에 빠진 솔로몬을 바라보며 놀라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혼란에 빠진 솔로몬을 본 사혈은 아시아를 의심했다. 돌에 손을 올리라는 마녀 아시아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사혈 역시 돌 위에 손을 올렸다.
사혈은 자신의 주변 모든 것이 불타오름을 느꼈다. 불은 한곳으로 모여 응집되니, 불이 사라진 자리는 그저 우주의 어두운 공허처럼 어두울 뿐이었다. 그는 한곳에 모인 불, 그 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는 별과 하나가 되어 원시 상태인 푸른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의 짐승들은 악신의 횡포에 영원한 고통을 받으며 몸부림쳤다. 영생이라는 저주에 녹아내리는 흙을 붙잡으며 사는 모습, 거대한 뱀이 짐승들의 땅에 물을 쏟아내는 모습, 인간들의 영혼을 삼키는 매의 모습까지.
별과 하나가 된 사혈은 그들에게 불을 내렸다. 악신을 태울 수 있는 불을.
짐승들은 불을 이용해 집을 만들어 본인을 지키고, 악신의 겨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혈은 본인의 사명을 깨달았다. 그는 명뿐만 아니라 우르고스, 북쪽과 남쪽에 존재하는 모든 짐승에게 계몽을 가져다줄 존재였다.
사혈은 땅 위, 본인이 떨어트린 운석으로 다가갔다. 그때 한 마리의 붉은 뱀이 운석을 베어 물었다.
이후 짐승들은 불을 이용해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불타는 창과 검은 서로의 팔다리를 잘라내었으며 피와 혼란의 시간은 억겁과도 같았다. 사혈을 느꼈다.
누군가는 이 돌을 이용해 짐승들을 인도해야 한다. 야생의 지혜는 가시 돋은 나무와도 같아, 무지한 짐승들의 피를 쏟아내게 할 것이다.
환영에서 깨어난 사혈은 돌에 자신의 창을 찔러넣었다. 창은 돌의 불을 품은 채 빠져나왔다. 그는 솔로몬과 아시아에게 말했다.
“돌의 일부를 명으로 가져가겠다. 계속해서 군사를 보내어 돌을 전부 명으로 옮길 거야. 돌은 과거와 진리를 보여주는군. 이 돌의 지혜라면 이 땅 위의 한 명의 사람도 굶고 고통을 받고 살 일이 없어.”
솔로몬은 사혈의 창을 잡았다.
“너만 진리를 목격한 게 아니야. 하나의 땅, 하나의 국가, 하나의 가문이 갖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힘이다.”
“그러면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갈 것인가? 내가 장담하지, 이 돌이 건네준 지혜를 우르고스에게 나누겠다고, 우르고스의 모든 사람을 계몽시킬 거야. 진리를 목격한 이후에 더 이상의 분쟁은 없을 거야.”
“그 권한을 누가 갖지? 네가? 너의 아버지가? 그도 그의 선왕들과 똑같은 침략자일 뿐이야. 네가 이 돌을 취하려고 하는 것도, 너를 그들과 같은 침략자로 만드는 거야.”
“함부로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아라. 생각해라, 솔로몬. 악인이 없는 세상을. 모두가 진리를 깨달은 세상. 인간 한명 한명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아는 세상 말이야.”
“너의 선한 의도는 이해하지만 결국 지혜라는 힘을 사유물로 만들겠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지금처럼 모든 인간이 서로를 베고 죽이는 전쟁을 이어가는 것?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손의 자손, 그 자손들도 전쟁에서 죽어가는 인생을 살 거야. 태평성대를 막는 자는 악인이다. 나는 악인을 살려둘 수 없다.”
아시아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논쟁을 파고들었다.
“지금처럼 너희 둘이 으르렁대니 이곳에선 누구도 죽어 나가지 않는군. 내 임무는 균형이다. 이 땅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 그것이 별이 내린 사명이야.”
아시아는 말을 멈춘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몽의 돌에서 피어난 연기가 오히려 별빛을 가렸다. 자연에서 비롯된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 것. 흐름을 지속시키는 것. 어쩌면 이들의 방문도, 앞으로 내릴 선택과 빚어낼 세상마저도 하늘의 뜻일지 모른다.
아시아가 그녀의 불타는 창을 솔로몬에게 건넸다.
“기회를 주지. 당장 너희 목을 베어도 내겐 잃을 게 없다. 솔로몬, 어찌하겠느냐?”
“돌의 파편인 이 창을 황제와 주교에게 보이겠다. 내가 믿어온 황제가, 악신이 빚어낸 짐승에 불과한지 두 눈으로 확인할 것이다. 그 후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선택을 하겠다.”
“사혈, 너는 어떠냐?”
“아버지인 명의 왕에게 돌을 가져가겠다. 폐하께서 돌의 지혜를 목격하신다면, 분명 의로운 길을 택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불이 붙은 네 창을 가져가면 되겠군. 좋다. 시간을 주겠다. 각자 주군의 뜻을 받아와라. 결판은 그때 짓도록 하지.”
아시아는 차갑게 덧붙였다.
“야만인의 군대는 끝없이 기어 나올 것이다. 저들이 곧 창조주의 의지다. 돌은 어차피 이곳에 있으니, 이 땅을 정복할 허황된 꿈은 버려라.”
솔로몬과 사혈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황제의 뜻을 받아오지.”
“아버지의 말을 전하러 오겠다.”
두 사람은 야만인들의 진지를 빠져나왔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괴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사혈이 낮게 읊조렸다.
“흙과 바위, 돌의 불꽃만으로 생명을 빚어내다니. 마녀 아시아를 믿나? 우린 죽을 뻔했어. 그녀는 명백한 악이다.”
“선악의 경계는 희미해졌어. 허나 그녀는 자연재해와 같다. 지진과 해일에 사람이 죽고 폭풍에 나무가 꺾이듯, 그저 존재할 뿐이야. 태초의 균형이란 그런 모습이겠지.”
둘은 섬 북쪽 해안으로 향하며 각자의 속내를 감췄다.
솔로몬은 확신했다. 주교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그는 야만의 땅을 정복하라 명할 것이다. 우르고스는 자유를 인도할 것이다.
사혈 역시 확신했다. 아버지께 고하면, 전군을 동원해 돌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그 돌로 모든 땅을 하나로 묶는다면,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열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