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영혼

by 박규동

인간은 모두 원시 영혼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증오와 분노, 통제하려는 욕구는 거짓자아라는 기생충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기 전, 영혼으로 태어난다.

인종과 국가의 이전에 지구라는 땅 위의 영혼으로.

나이와 직업, 재정 상태, 거주 지역, 주민등록 번호 이전에 인간이란 존재는 순수한 영혼이다.


인간이 행성 위에 동물로 자유롭게 태어났음을 잊는 과정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지만 그것을 통제를 통하여 얻으려 한다.


오직 오감으로만 설명되는 물리적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안정을 위해.


가스가 뭉치고, 얼어붙어 땅이 생기고, 대기에 갇힌 유기물이 뭉쳐 세포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정자가 난자와 만나고, 아이가 태어나고, 물고기는 땅으로 나오고,

상품으로써 등록되어 번호가 매겨질 때 영혼과의 이별이 시작된다.


모든 것은 순환의 구조이며 인간과 땅과 하늘은 같은 성질을 갖는다.

우주의 티끌이 모여 빚어진 육체, 인간이 곧 우주와 다름이 없다.


우주에는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소유주는 나 자신이다.


그 어떤 천국의 대표자도 천국보다 밝을 수 없으며,

어떤 악마라도 지옥보다 어두울 수 없다.


인간은 아름다운 연민과 사랑을 통한 자유를 표현할 수도 있지만,

육체와 오감에 의해, 피와 살을 위해 움직이는 거짓 자아의 풍족을 위해 통제라는 지옥을 그려낼 수도 있다.


언어는 이해의 한계를 설정한다.

소우주와 대우주에 상응하는 신성을 찾는 여정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

나의 육체에 가해지는 분노와 증오, 생존 욕구에

거짓자아는 끊임없는 영양분을 요구한다.

생존 너머를 향한 질문은 사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시작점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뱀을 바라보는 나의 눈을 감는 것이다.

그렇게 뱀 또한 눈을 감는다.


태초, 신, 빅뱅, 초신성, 탄생, 출생 등으로 표현되는 시작은 엔트로피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시작을 찾는 법은 끝을 찾는 것이며, 끝을 찾는 법은 시작을 찾는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지옥, 나의 정신이라는 지옥의 깊이가 어두운 만큼,

우주의 지옥 역시 심연만큼 공허하다.

나를 살리는 법은 우주를 살려야 함이며,

우주를 살리는 법은 나를 살려야 함이다.


소우주와 대우주의 신성을 찾는 길에서 포식의 질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에게 분노를 느낀다.

타인이 내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타인을 통제하고 싶다. 타인의 자유를 포식하고 싶어 한다.

자유를 빼앗는 것은 나의 통제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꼬리를 문 뱀, 엔트로피의 지옥과 유사하다.


우주의 시작, 신이라는 질문, 진정한 자유.

답은 바깥이 아닌 안에서 찾아야 한다.

멀고 방대한 우주에 진실이 있다는 것은,

나의 내면에 진실이 있다는 뜻이다.


매일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듣는 세상은

내가 살아 숨 쉬는 만큼 실존한다.

모든 실존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는다.

나의 분노, 나의 집착은 타인의 분노와 집착이며

세상의 분노와 집착이다

사랑과 연민 역시 다르지 않다.


나는 하나의 세포이며 소우주이며 대우주이다.

오감을 넘어선 대우주 역시 하나의 세포이며 하나의 생명체이다.

크고 작음은 모두 착시에 불과하다.


별들이 갖는 성질이 내가 갖는 성질과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자연은 나라는 인간의 현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서 거짓자아의 기만, 문명과 법이라는 족쇄에 속게 된다.

집착을 내려놓지 못함에 나 자신을 향한 끝없는 거짓말이 시작된다.


지구라는 땅에 인간 동물로서 자유롭게 태어난 나와,

내 직업, 혹은 내 주민번호가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분명 이해할 수 있다.


엔트로피의 시작, 집착의 시작. 착취의 시작점부터 인간이라는 동물은 '소유'되었다.


제도, 종교, 정치와 법에 대한 신념과 그 아래 붙여지는 이름들.

그 고찰을 포기할 때 훌륭한 시민이 되며, 좋은 사유품이 될 수 있다.


내가 약자를 통제하듯, 고찰하지 않는 사람인 나는 누군가의 자유를 위해 통제당한다.

착취의 사슬은 풀기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다.


결국 현대의 언어가 정의해 낸 '자유'와 태초의 동물로서의 자유가 얼마나 다른지 고찰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고찰을 방해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통제하고 착취하는가?

착취의 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육체는 생존만을 갈망한다.

생존에 대한 갈망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나오며

불안과 두려움을 심는 착취자는 분명히 존재한다.

역설적이게도 생존만을 위한 삶의 태도는 전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를 또 다른 착취자로 만들 뿐이다.


돈과 금융, 법, 질서라는 지배자들의 논리는 인간의 믿음을 포식할 때 힘을 갖는다.

그 믿음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포와 불안을 심는 것이다.


집을 짓지 못하고 먹을 수 없는 화폐의 힘은 믿음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믿음은 개인의 자유의지의 범주를 떠나고 말았다.


착취자가 정한 행복의 제한은 분노와 공포를 낳고

분노와 공포는 믿음이라는 착취자의 먹이가 된다.

두려움과 증오에 기반을 둔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게도 행복과 지구 위의 지구인으로서의 자유의 의미를 잊게 만든다.


인간들의 믿음을 충분히 포식한 착취자들은 거짓 우상과 이상을 건설한 후, 계급을 설계한다.

억압자들이 정의한 성공이란 신화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내면을 향한 응시를 포기한다.

그들이 지은 미로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을 나누며 통제와 분노, 또 다른 연료를 생산하게 된다.

이것은 역시 남을 향한 통제로 이어지며 남을 향한 통제는 그 주체의 당연한 권리인 자유의 실각을 의미한다.

그 주체가 통제하는 나 자신임을 잊어선 안된다.


미로에서 정체성을 얻는 과정이 통제나 증오가 되어선 안된다.

적을 만들어 바라보는 거울에 담기는 인간상은 본인이 가장 증오하는 존재뿐이다.

계급 구조의 하급 착취자가 되어 얻은 정체성과 자유는 더욱 큰 불안을 야기할 것이며,

그 불안은 폭력이라는 연료를 요구할 것이다.


물론 뉴스가 보여주는 지옥과 한 생명이 갖는 인생은 다르다.

오직 고난이라는 공통점만 보였을 뿐, 인간의 고난은 의미를 낳는다.

그 고난은 육체나 직업, 돈과 거주 지역에 관한 것이 아닌 권세와 신성을 찾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본인의 추구하는 정체성에 관한 이해의 과정에서, 그 길을 닦은 자가 누구인지,

그 길의 생김새는 어떠한지, 혹시 그 길을 걷는 와중 나와 우주의 연결고리를 잃지는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소우주라는 지옥과 대우주라는 지옥.

엔트로피의 감옥.

착취자의 설계.

꼬리를 무는 뱀.


우주의 지옥을 제거하는 방법은 나를 놓아주는 것이며

타인을 향한 통제와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


거짓자아는 절대 개인의 영혼보다 거대하지 않다.

그것은 오직 기생충에 불과하며 신성을 가로막는 넓은 길의 티끌에 불과하다.


세상을 향한 공포와 혐오는 실재한다.

그만큼 내 안의 기생충 역시 실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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