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관리가 성장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

by 씨알

맹자(孟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의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날마다 논으로 나가 벼 싹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자라는 속도가 성에 차지 않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끝내 논으로 들어가 싹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조금씩 뽑아 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오늘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 놀란 아들이 급히 논으로 달려가 보니, 벼 싹은 이미 모조리 말라 죽어 있었다.


조장(助長). 자람을 돕는다는 뜻의 이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오래된 일화가 오늘까지 살아남은 까닭은, 단지 성급함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짧은 이야기는 더 본질적인 무언가를 건드린다. 돕겠다는 마음이 어떻게 망치는 손이 되는가. 선의가 어떻게 파괴의 형식을 입는가.


그 농부는 악인이 아니었다. 벼를 미워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벼가 잘 자라기를 바랐고, 그 바람이 클수록 기다림을 견디지 못했다. 생명에는 저마다의 리듬이 있다는 것을, 그 리듬을 가로막는 손이 가장 위험한 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며 그가 느꼈을 뿌듯함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 우화는 이상할 만큼 낡지 않았다. 논은 사라졌지만 그 농부의 조급함만은 여전히 살아남아, 다른 말들을 두르고 나타난다. 관리, 평가, 피드백, 역량 강화, 성과 점검. 이름은 훨씬 세련되어졌지만, 그 밑바닥에는 종종 같은 불안이 놓여 있다. 사람은 그냥 두면 충분히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 그러니 더 자주 들여다보고, 더 세밀하게 측정하고, 더 촘촘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믿음.


그러나 사람의 성장이라는 것은, 본래 타인이 대신해줄 수 없는 종류의 일에 가깝다.


20세기 초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Taylor)는 공장 생산 라인 옆에 관리자를 세웠다. 손에는 초시계가 들려 있었다. 나사를 조이는 데 몇 초, 상자를 포장하는 데 몇 초. 그는 그것을 과학적 경영이라 불렀다. 전제는 단순했다. 사람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측정하지 않으면 느슨해지고, 관리하지 않으면 제멋대로가 된다.

이 냉소적 인간관은 이념의 경계를 가뿐히 넘어 20세기를 관통했다. 레닌도, 무솔리니도, 자본가도 이 전제만큼은 기꺼이 공유했다. 당근과 채찍. 그것만이 인간을 움직인다. 깃발은 달랐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눈은 같았다.


물론 관리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초보자에게는 기준이 필요하고, 위험한 일에는 규율이 필요하며, 공동의 방향을 위해 구조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문제는 관리가 어느 순간 타인의 자율과 판단을 대체하기 시작할 때다. 방향을 제시하는 것과 끌고 가는 것은 다르고, 기준을 세우는 것과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없애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그 경계는 쉽게 흐려진다. 그 순간부터 지원은 간섭이 되고, 구조는 압박이 되며, 성장은 제출물이 된다.


공장의 초시계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자리를 다른 것들이 메웠다. 경력도 역할도 다른 사람들을 같은 날 같은 강의실에 앉히는 일률적 교육이 들어섰고, 성찰보다 제출에 가까워진 월간 회고가 들어섰고, 빈도 높은 피드백이 들어섰다. 형태는 부드러워졌지만 그 안의 전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의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로 시키는 만큼만 하게 만든다.


이스라엘 하이파의 작은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은 이 역설을 더 또렷하게 보여준다.


아이를 늦게 데리러 오는 부모들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퇴근을 미룬 채 기다려야 했고, 원장은 고민 끝에 한 가지 조치를 내놓았다. 정해진 시간을 넘기는 부모에게 3달러의 지체 요금을 부과하기로 한 것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대책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도가 도입된 뒤 늦게 오는 부모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40퍼센트가 늘었다.


제도가 생기기 전, 부모들에게는 제시간에 데리러 와야 한다는 암묵적인 책임감이 있었다.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는 감각,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할 예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작동하던 무게였다. 그런데 3달러라는 가격표가 붙는 순간, 그 관계의 성격이 바뀌었다. 미안함은 거래로 번역되었고, 책임은 옵션이 되었다. 늦는 일은 더 이상 미안한 일이 아니라 돈을 내고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연구자들이 이후 벌금 제도를 폐지했을 때, 지각률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번 거래가 된 관계는 다시 신뢰로 돌아가지 않았다. 제도는 사라졌지만, 제도가 심어놓은 마음은 남았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는 평생의 연구를 통해 이 현상의 이름을 붙였다. 내재적 동기의 구축 효과(crowding-out effect). 외부의 개입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스스로 하려는 이유를 잃는다. 악의가 없어도, 오히려 선의에서 비롯된 개입이라도, 그 효과는 같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말없이 감지한다. 그리고 조용히 적응한다. 시키는 만큼만.


농부는 싹을 아꼈다. 너무 아꼈기 때문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바로 그 손끝에서 자람은 멈추었다.


그래서 좋은 조직은 때로, 더 많은 개입이 아니라 개입의 한계를 아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네덜란드의 가정간호 조직 뷔르트조르흐(Buurtzorg)는 이 믿음 위에 서 있다. 1만 4,000명의 직원이 있지만 관리자가 없다. 콜센터도, 기획자도 없다. 12명으로 구성된 각 팀이 스스로 일정을 짜고, 동료를 고용하고, 무엇을 배울지 결정한다. 누구에게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그 현장 자신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이 조직은 믿는다. KPMG의 컨설턴트는 이 조직을 두고 "직원과 고객의 만족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고, 비용은 저렴하지만 돌봄의 질은 평균을 능가한다"고 평가했다. 인사팀 없이 5회 연속 네덜란드 최고의 고용주로 선정된 이 조직의 창업자 요스 드 블록(Jos de Blok)은, 직원들에게 어떻게 동기를 부여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한다.


"그러지 않습니다. 동기부여를 한다는 것은 윗사람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짧고 불편한 문장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 안에 이 조직의 철학 전체가 담겨 있다.

프랑스 자동차 부품 회사 파비(FAVI)의 이야기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1983년 CEO로 부임한 조브리스트(Jean-François Zobrist)는 취임 직후 연달아 낯선 결정을 내렸다. 시간기록계를 없애고, 창고 자물쇠를 치우고, 보너스를 줄이고, 퇴직한 관리자의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책임을 빼앗는 대신 현장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사람을 잠재적 태만자로 취급하는 대신,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대하는 것. 그 전환 이후 회사 인력은 5배로 늘었고, 핵심 부품의 생산시간은 11일에서 하루로 단축되었다. 경쟁사들이 인건비를 이유로 공장을 해외로 이전할 때도, 파비는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 그는 훗날 이 경험을 담은 책을 썼는데, 부제는 이것이었다. '사람이 선하다고 믿는 회사.'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타인을 바라볼 때 거의 습관처럼 빠지는 착각 때문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칩 히스(Chip Heath) 교수가 법대생들에게 법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을 때, 많은 학생이 오래된 관심과 사명감 같은 내면의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렇다는 대답은 크게 줄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의미와 가치를 말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돈과 인센티브를 먼저 떠올렸다. 최근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응답자의 74퍼센트가 부나 지위보다 도움, 정직, 정의 같은 가치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런데 거의 같은 비율인 78퍼센트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실제보다 훨씬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오해 위에 조직을 설계하고 있다. 잘못된 전제 위에서 설계된 제도는 시간이 지나며 실제 인간의 행동마저 그 기대에 맞게 바꾸어버린다. 의심은 예방이 아니라 예언이 된다.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은 신뢰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게 되고, 끊임없이 점검받는 사람은 끝내 스스로 점검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결국 조직의 수준은 제도의 정교함보다도, 인간을 어떤 존재로 가정하는가에서 갈린다. 그 한 문장의 차이가 보고서 양식 하나보다 훨씬 깊게 조직의 문화를 결정한다.


정원을 오래 가꿔본 사람은 안다.


꽃은 정원사가 피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흙을 고르고, 물길을 내고, 햇빛을 가리는 것들을 치우고, 어린 싹이 꺾이지 않도록 살피는 일. 좋은 정원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는 어디까지가 자신의 몫이고, 어디서부터는 생명 스스로의 몫인지 안다. 조건을 만드는 일과 결과를 대신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안다.


142개국 23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직장에서 업무에 진정으로 참여한다고 느끼는 비율은 13퍼센트였다. 나머지 87퍼센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강의실에서 시계를 보고 있거나, 월간 회고 양식에 좋게 보이는 말을 채워 넣고 있거나, 아무도 읽지 않을 피드백을 작성하고 있을지 모른다. 선의로 설계된 시스템 안에서, 조용히 말라가면서.


맹자의 농부는 벼가 자라기를 바랐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간절함이 손을 뻗게 만들었고, 그 손이 논을 망쳤다. 그는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다리는 것도 일이라는 것을. 믿는 것도 경영이라는 것을.


정원사의 일은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꽃이 스스로 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더 이상 손대지 않는 것이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에 등장하는 내용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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