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행자의 침묵

산의 끝에서

by 하얀 나비
동네 어귀의 동백꽃

마지막 걸음을 딛고 서니
길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더는 갈 곳 없는 벼랑 끝,
오직 내려가는 길만 발치에 눕는다.
무엇을 기대했던가,
허기가 밀려온다.

죽을힘 다해 올라선
그리 높지도 않은 산꼭대기엔
기대했던 비석도, 보물도 없이
텅 빈 바람만 스쳐 간다.

숨 가쁘게 긴 시간을 바쳐 온

이 굽잇길을
누군가는 경비행기(AI)로

가로지르고

선두라 믿었던 나의 자부심은
흩어지는 구름 앞에 무색해진다.

이제 막 산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정상의 허무보다
내리막의 막막함이
더 깊은 그늘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상이 가깝냐고 물었을 때
“다 와갑니다”
하고 미소 짓던
정상을 보고 온 사람들이 해준
그 말의 깊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행복을 말하던 이는

스스로 무너지고
복권을 팔던 이는

복권을 믿지 않으며
주식을 권하던 이는

시장을 외면하고
병을 고치던 이는

그 병으로 쓰러진다.

이 산이 아니고
저 산이라도

꼭대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을 알기에
길을 묻는 이,

앞에서 끝내 말을 잃는다.

그래도, 그 내리막 끝 어딘가엔
들꽃이 수줍게 자리하고
먼 길을 날아온

하얀 나비가 유영하는,


잠시 숨을 고를 자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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