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는 이름의 평화

소가 풀을 다 먹고 떠난 자리

by 하얀 나비
어느 생일에 받은 꽃

어느 화가가 텅 빈 캔버스를 전시회에 내놓았다. 제목은 '폭풍 속에서 평온하게 풀을 뜯는 하얀 소'.
황당해하는 관객이 물었다.

"풀은 어디 있습니까?"


화가가 답했다. "소가 다 먹었지요."
"그럼 소는 어디 있나요?"


화가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풀을 다 먹었는데 소가 거기 왜 서 있겠습니까?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지요."


이 실겁잖은 농담 같은 이야기가 내 마음에 남은 건, 우리네 인생도 이 백지와 닮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캔버스에 무언가 꽉 차 있기를 기대한다. 화려한 인맥, 넘치는 일감, 시끌벅적한 모임들. 하지만 내 인생의 캔버스는 갈수록 여백이 넓어진다.

전화번호부는 단출해지고, 주말의 방문객은 뜸하다. 남들이 보기엔 '소가 떠나버린 빈 벌판' 같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안다. 소가 배불리 풀을 뜯고 만족스럽게 떠난 그 자리가 얼마나 평온한지. 소음이 떠난 자리에 비로소 내가 앉을자리가 생기고, 남의 시선이 떠난 자리에 나만의 상상력이 피어난다.


비어있다는 것은 부족한 게 아니다. 소가 풀을 다 먹고 떠난 뒤의 그 '명료한 고독'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비싼 그림인 셈이다.


살면서 마주하는 가장 차갑고도 명료한 진실이 하나 있다. 결국 인생은 혼자라는 점이다.
젊은 날엔 이 문장이 서글픈 고립처럼 느껴졌지만, 인생의 굽이굽이를 돌아 코코를 안아주는 일이 일상이 되고 보니 이 말은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한 위로가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삶의 '전화번호부'가 간결해지는 과정이다. 한때는 인맥이 곧 능력이라 믿으며 누군가로 빼곡히 채우려 애썼던 리스트가 이제는 손에 꼽을 만큼 단출하다.


마당의 잡풀을 솎아내듯 내 생의 이름들을 하나둘 솎아내었다 한때는 빽빽한 숲이라 믿었던 인연들이 사실은 한 철 머물다 가는 그늘이었음을 지는 꽃잎을 보며 깨닫는다.


아이들의 결혼식이나 집안의 큰 조사 때 연락할 사람이 회계사나 일로 얽힌 몇 명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내 삶에서 불필요한 소음이 그만큼 소거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밴쿠버, 우리 집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이웃들이 많이 산다. 주말이면 아이들이 찾아오고 평일엔 적막할 만큼 고요한 풍경. 국적은 다르지만 그들의 삶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멀리 온타리오에 사는 가족을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그들을 보며,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섬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몇 년 전 한국의 친구들과 연락이 닿아 반가운 마음에 근황을 전한 적이 있었다.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했을 뿐인데, 어느덧 나의 평온한 일상은 누군가에게 '자랑'으로 곡해되어 돌아왔다.


나중에 유튜브에서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라는 영상을 보니 내가 한 말이 죄다 해당되어 헛웃음이 났다. 그 후로 자연스레 멀어진 인연들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수많은 인간의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질투와 집착, 허무와 상실감이라는 리스크를 감내하기보다, 나는 기꺼이 고독을 선택하기로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독으로부터 두 가지 이점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첫째는 나 자신과 함께할 기회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남과 함께하지 않을 기회를 얻는 것이다.


혼자라는 것은 세상에 버려진 것이 아니라 나라는 섬으로 돌아와 비로소 주인이 되었다는 선언, 누군가의 시선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내 안의 '하얀 나비'가 날아오를 때 고독은 더 이상 추위가 아니라 가장 따뜻하고 명료한 옷이 된다


이제 나의 하루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오직 나의 취향으로 채워진다. 정원의 흙을 만지고, 재봉틀 소리에 몰입하며, 하얀 종이 위에 글을 써 내려가는 시간. 남의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는 일상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어차피 끝을 향해 달릴수록 혼자가 되어가는 삶이라면, 나는 지금 가장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다. 고독은 외로움이라는 벌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오롯이 대접하는 가장 우아한 사치다.


오늘도 나는 내 전화번호부보다 더 간결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나만의 평화로움을 바구니에 담는다.

매거진의 이전글막걸리 향에 실려온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