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분홍 비단신과 나비의 꿈
1926년생, 그녀의 이름은 '서정(抒情)'이었다. 이름의 결을 따라 살라는 아버지의 깊은 뜻이었을까.
평범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난 서정은 하얀 피부에 옅은 갈색 눈을 가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청초한 소녀였다.
아버지는 첫딸 서정이 유독 총명한 것을 볼 때마다 남모를 탄식을 내뱉곤 하셨다.
"네가 사내아이로 태어났더라면, 이 좁은 땅덩어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었을 텐데…."
일제강점기의 서슬 퍼런 공기가 마을 어귀까지 드리웠던 열일곱의 봄. 그런 어수선한 시절에도 서정은 늘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저고리를 입고, 책 냄새를 풍기며 제 안의 영민함을 꽃피우고 있었다.
어느 장날이었다. 아버지는 품 안에서 소중하게 싸인 보자기 하나를 내미셨다. 그 안에서 수줍게 얼굴을 드러낸 것은 코끝이 앙증맞게 올라간 분홍색 비단신이었다.
"서정아, 이 신을 신고 네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마음껏 가보거라. 너는 이 좁은 마을에 갇혀 지낼 아이가 아니란다."
서정은 차마 그 귀한 신을 신지 못하고 가슴에 꼭 껴안았다. 분홍색 비단신은 마치 곧 날아오를 나비의 날개 같았다. 그녀는 남몰래 마당 뒤편 목련 나무 아래로 가서 살짝 발을 밀어 넣어 보았다. 흙바닥에 닿는 비단의 감촉이 생소하면서도 설레었다.
그날 이후, 서정의 비밀스러운 산책이 시작되었다. 남들이 보지 않는 새벽녘이나 해 질 무렵, 그녀는 분홍 비단신을 신고 마을 뒷산 바위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저 산 너머엔 정말 내가 꿈꾸는 세상이 있을까? 나도 저 구름처럼, 저 나비처럼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 글을 쓰고 노래하며 살 수 있을까?'
분홍 비단신을 신은 서정의 발끝은 늘 세상을 향해 톡톡, 기분 좋게 튕겨 올랐다. 그때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고운 비단신이 진흙탕에 젖고, 신발 코가 해지도록 험난한 운명의 자갈밭을 걷게 될 줄은. 그리고 그 찬란했던 분홍빛이 긴 침묵의 세월 속에 바래갈 줄은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해 봄, 열일곱의 서정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홍빛 나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