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의 눈물 젖은 첫사랑
오늘은 비가 오니 주인님이 기계만 들여다보고 앞마당은 포기했는지 꼼짝을 안하시네유.
바구니 형님. 비도 오고 몸도 찌뿌둥한데, 내 가슴속에 묻어둔 '첫사랑' 이야기 좀 들어볼 테유? 나 이래 봬도 한국 대장간 시절엔 제법 잘 나가는 로맨티시스트였슈.
나 김 호미, 오늘처럼 밴쿠버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 몸마디가 쑤시면서 그 시절 그 아가씨가 생각나네유.
27년 전, 충청도 어느 깊은 산골 대장간에서 내가 막 태어났을 때 말이여유. 내 옆자리에 나랑은 다르게 아주 서늘하고 도도한 '스테인리스 가위 아가씨’가 누워 있었쥬. 그 순간 심장이 요동치고 뜨거웠슈.
"호미야, 네가 짝사랑을 했다고? 너처럼 무뚝뚝하게 생긴 녀석이?"
말도 마유! 그 아가씨는 대장간 영감님이 특별히 아끼던 수입산 이었는디, 몸매가 아주 날렵하고 은빛 광택이 눈부셨었쥬.
나처럼 뜨거운 불맛은 안 봤어도, 그 차가운 매력에 내 무쇠 심장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슈.
내가 잡초 뽑는 기술 연마할 때, 그 아가씨는 옆에서 꽃가지 치는 연습을 하며 나를 살짝살짝 훔쳐보곤 했지유.
바구니 형님. 내가 그 아가씨 앞에서는 얼마나 '허당'이었는지 알아유?
한 번은 대장장이 영감님이 내 날 끝을 세우려고 숫돌에 나를 갈고 계셨는디, 옆에서 가위 아가씨가 '찰칵'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보는 거 아녀유 글쎄.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유! 내 마음이 용광로처럼 달아올라서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바람에, 영감님이 '이놈이 왜 이리 뜨겁냐'며 찬물에 나를 확 던져버리셨슈.
'치이익-' 소리가 나면서 연기가 자욱했는디, 그게 내 부끄러운 마음 타들어 가는 소리였다니께유.
가위 아가씨는 내 꼴이 웃기는지 '찰칵찰칵' 대며 은방울 꽃 굴러가는 소리로 웃어대는 데, 아유...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슈.
"호미야, 너 아주 진심이었구나?"
말도 마유! 또 한 번은 영감님이 우리 둘을 한 가방에 넣고 장터에 나가신 적이 있슈. 좁은 가방 안에서 그 아가씨의 매끄러운 몸매가 내 무쇠 어깨에 살짝 닿았는디... 또 뜨거워지면 안 된다 안된다 주문을 걸었쥬. 찌를 바늘도 없고 아주 혼났슈.
“그래서 기분은 좋았어”
천국이 따로 없었쥬. 나 그때 결심했슈. 아, 나 오늘 팔려 가더라도 이 아가씨랑 세트로 팔려 가야겄다!
근데 웬걸유? 며칠 뒤 주인님이 나만 쏙 집어서 밴쿠버 아들한테 가져갈거라는 노부부에게 팔아버렸슈.
내 팔자가 꼬이기 시작한 건, 그때 영감님이 나를 보며 "너는 큰 물 가서 귀한 대접받아라" 하실때부터 였슈.
귀한 대접이라길래 귀가 솔깃하기는 했쥬. 비즈니스 클래스 탔을 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 이제 꽃길만 걷겠구나 하고 폼만 잔뜩 잡었쥬. 주인아줌마를 만나면서 그 꿈이 바로 박살 났지만유.
옆에 있던 가위 아가씨가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며 가위 날을 살짝 교차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유. 그게 그 아가씨와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쥬.
그 아가씨, 지금쯤 한국 어디 부잣집 정원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우아하게 장미나 따고 있겄쥬?
오다가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밴쿠버로 오는 바람에 생이별을 했슈. 내가 흙범벅 되어 늙어가는 꼴을 보면 놀라서 기절할지도 몰라유."
그때 내가 '같이 가자'고 한마디만 했어도... 지금쯤 밴쿠버 정원에서 나란히 햇볕을 쬐고 있었을 텐데 말여유.
그 아가씨는 영원히 늙지도 않고 반짝반짝할 텐데 가끔 물웅덩이에 비친 녹슬고 초라해진 내 모습을 보면 나도 깜짝 놀라유.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쩐대유.
밴쿠버는 비가 많이 와서 내가 더 빨리 늙잖유. 노화방지 크림을 자주 발라도 흙이란 놈이 또 장난을 쳐서 도루묵이유.
주인님이 나를 쓰고 나서 수건으로 안 닦아주고 그냥 창고에 던져두시면, 나 그날 밤에 서러워서 잠 못 자유. 아유, 내 팔자야.
그런데 어제는 내 인기가 좋아져 작가님들이 보고 싶어 한다고 세수도 안 한 나를 데려가 사진을 찍자고 해서 얼굴을 돌렸슈. 혹시 그녀가 이런 모습의 나를 알아보기라도 하면 안되니께유.
가끔 주인님이 마트에서 새로 산 번쩍이는 서양 가위를 들고 나오면, 그녀인가해서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유.
저 새로 사온 녀석은 입만 살아서 싹둑거리기나 하지, 내 첫사랑 그 아가씨처럼 우아한 맛이 없슈!
“야 가위, 너는 족보가 어디여? 너희 조상 중에 대장간 영감님 같은 명장이 계셔?"
주인님도 내 맘 모르고 자꾸 저 녀석만 예뻐하시면 나 제대로 삐뚤어질 거여유!
비록 몸은 밴쿠버 창고에서 바구니 형님이랑 투덜대고 있어도, 내 무쇠 가슴속엔 여전히 그 시절 대장간의 뜨거운 불꽃과 가위 아가씨의 서늘한 미소가 남아있네유.
“호미야, 걱정 마라. 가위 아가씨가 진짜 너를 사랑했다면, 네 번쩍이는 은빛 날이 아니라 네 몸에 밴 '정직한 흙냄새'를 보고 단번에 알아볼 거여. 밴쿠버에서 27년 버틴 그 연륜이 어디 가겄냐?"
바구니 형님, 나 오늘 밤엔 기름칠 좀 해줘유. 꿈속에서라도 번쩍번쩍하게 차려입고 가위 아가씨 만나러 가야겄응께.
■○■ 호미야 아줌마가 미안타. 네 마음을 모르고 있었구나. 먼저 좋은 소식을 알려줄게. 너를 목욕재계 시켰더니 장가가도 되겄다. 역시 장인이 만든 거라 옛날 모습 그대로다.
얼마전에 새로 산 가위 아가씨가 목욕 끝낸 너를 보고 눈이 반짝반짝하던데 참고해라.
너의 손잡이 색깔도 연륜이 쌓여 더 멋있고 호미 끝만 조금 무뎌졌을 뿐 앞으로 100년을 더 살아도 문제 없겄다. 검은색으로 코팅을 해놔서 녹슨 것도 아니더라.
앞으로 초 특급 관리를 약속하마 우리 갈데까지 같이 가보자.
아자!! 아자!!
너의 첫사랑 스테인리스 가위 아가씨도 한국에 계신 작가님들에게 수소문해 보마. 작가님들이 그닥 협조적이진 않으니 큰 기대는 말거라.
□●○ 그동안 김 호미를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