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 호미 (3화)

보라색 환상과 춘추전국시대

by 하얀 나비
나 쌩얼인디 어째유

야, 바구니! 너 몇 년 전에 그 보라색 꽃 기억나냐?

그 녀석 씨주머니가 터지더니 앞마당에 기적이 일어났었잖여. 온 마당이 깨알 같은 초록 떡잎으로 덮였었잖여!"


나 김 호미, 27년 밴쿠버 인생 통틀어 이런 경사는 처음이었쥬. 잔디가 다 타 죽어서 맨땅뿐이었는데, 글쎄 꽃대궐이 차려질 모양이대유?


주인님이 아침마다 눈을 반짝이며 사진을 찍어대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서 창고 구석에서 날 끝을 반짝이며 대기하고 있었쥬.


"호미야, 근데 옆집 샌드라 아줌마 표정이 좀 묘하지 않아? '두고 보면 알겠지(We will see)'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눈치 빠른 바구니가 옆구리를 쿡 찔렀슈. 하지만 나는 콧방귀를 꼈쥬.


"에이, 서양 바구니 출신이라 시샘하는 겨?

저 예쁜 떡잎 좀 봐유. 저게 자라면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주인님한테 꽃 얻으러 줄을 설 텐데 말이유."


그런데 말이쥬... 며칠 지나 떡잎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내 날 끝이 싸해지더구먼유. 보라색 도라지꽃이라기엔 잎사귀가 너무 억세고, 모양새가 어딘가 낯이 익었쥬.


아뿔싸! 꽃은커녕, 이건 그냥 떼거지로 몰려온 '위장 취업' 잡초 군단이었쥬!


"거 봐, 호미야. 내가 뭐랬어.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꽃이 피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라니까."


바구니의 팩트 폭격에 나 김 호미는 할 말이 없었쥬. 우리 주인님도 기가 막힌 지 한참을 실실 웃으시더니, 드디어 나를 꽉 쥐었슈. 인적이 드문 시간, 주인님의 손엔 배신감과 민망함이 잔뜩 서려 있었쥬.


"주인님, 속상해 마유. 원래 인생이 그런 거 아녀유? 화려한 환상보다 무서운 게 정직한 맨땅이래유. 자, 이제 이 비즈니스 클래스 탄 호미가 나설 차례지유! 이 죄 없는(?) 사기꾼 녀석들, 내가 다 정리해 드릴게유!"


그렇게 잡초 군단을 싹 쓸어버리고 나니, 앞마당이 아주 민망할 정도로 '생(生) 맨땅'이 됐쥬.


주인님이 미안했는지 이번엔 옆집 샌드라 아줌마랑 머리를 맞대더만유. 원래 앞뜰이 샌드라와 연결되어 있거든유. 잔디깎기에 지친 그녀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돌을 강물 모양으로 깔아버리고 남은 땅에는 꽃을 심었쥬. 주인님은 우리쪽이라도 녹색으로 두려다 이런 사단이 난거쥬.


"야, 호미야! 이번엔 진짜래. 샌드라 아줌마가 '토끼풀' 씨앗을 추천했대. 동글동글하니 귀엽고, 잔디보다 생명력도 강하다나 뭐라나."


바구니 형님이 전해주는 소식에 나도 다시 희망을 품었쥬. 얼마 뒤, 진짜로 마당이 온통 초록색 클로버로 덮였슈.


꽃이 피니까 밴쿠버 벌들이란 벌들은 다 우리 집으로 원정 온 것 같대유? 윙윙거리는 소리에 우리 집이 무슨 양봉장인 줄 알았당께유.


그런데 말이유... 이 토끼풀 녀석들이 알고 보니 '온실 속 화초'였던 거여! 밴쿠버 겨울 추위 한 번에 싹 다 전멸했슈. 봄이 왔는데 초록은커녕, 다시 누런 맨땅만 남았지 뭐유.

샌드라 아줌마는 또 그 '의미 모를 미소'만 짓고 있고 말이유.


"호미야, 이제 어쩔 거야? 다시 맨땅이잖아."


바구니의 한숨 섞인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아유... 지금 우리 집 앞마당은 초록이긴한데 '춘추전국시대'가 열렸슈! 잔디도 죽고 토끼풀도 가버린 빈 땅에, 이제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잡풀들이 "이 땅은 이제 내 거다!" 하고 떼거지로 몰려와서 싸움이 났슈.


민들레는 깃발 꽂고, 엉겅퀴는 가시 세우고 점령군 행세를 하는데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슈. 주인님은 이제 해탈하셨는지 나를 멍하니 바라만 보시는데, 아유... 워쩌면 좋대유?

"주인님! 뭘 그렇게 넋을 놓고 계셔유! 어차피 인생은 다시 맨땅에서 시작하는 거여유. 저 춘추전국시대 녀석들, 내가 오늘 다 평정해 드릴게유. 씨 안 뿌리고 꽃 기다린 게 우리 주인님만 그렇겄슈? 세상 사람들 다 한 번씩은 그러고 사는 거여. 안 그류?"


나는 오늘도 주인님 손에 꽉 쥐여, 정원의 평화를 위해 다시 '칼춤'을 출 준비를 마쳤슈. 춘추전국시대? 웃기지 마유. 27년 경력의 비즈니스 클래스 출신 김 호미가 있는 한, 이 땅의 진정한 승자는 결국 우리 주인님이지유! 아자! 아자!


●□■ 김 호미 씨와 바구니씨는 출연료가 저렴하고 촬영을 펑크 내는 일도 없어서 계속 작품을 찍고 있슈.

한국에 계신 김 호미 씨의 첫사랑 그녀가 혹시 알아볼까를 염려하는 관계로 사진에 옆모습만 노출한 점 양해 바래유.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잖유. 우리는 의리로 뭉친 관계라 김 호미 씨가 이빨이 다 빠져도 함께할 거구먼유.

매거진의 이전글내 이름은 김 호미(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