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 호미(2화)

노란 꽃의 유혹과 민들레 잔혹사

by 하얀 나비
뒤뜰

나 김 호미 솔직한 내 마음을 얘기해도 될까유?

27년 전 비즈니스 클래스 비행기 타고 귀빈 대접받으며 태평양을 건너올 때만 해도, 내가 이나이 먹도록 캐나다 밴쿠버 정원에서 잡초나 뽑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슈.


멋진 장식장에서 조명받으며 곡선 몸매나 뽐내고, 쇠날에 광이나 내고 누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쥬.


내가 밴쿠버 간다고 하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내 고향 대장간 동기들은 지금쯤 한국 동네 어귀에서 떵떵거리며 껌 좀 씹고 있을 텐데 말이쥬.


공항 보안 요원이 나를 보고 당황할 때, 시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로

"이건 그냥 흙 파는 도구"

라며 갑자기 나를 확 깎아내리대유?

그때 내 신분을 눈치챘더라면 이렇게까지 상처가 크지는 않았겄쥬.


내가 시차 적응도 하기 전에 바로 다음 날 현장에 투입되더만유. 며느리인 지금 주인님은 나를 움켜쥐면 기진맥진할 때까지 일을 시켜유.


요즘은 다행히 얇고 시커먼 걸(스마트폰) 옆에 두고 다니다가 소리가 나면 장갑을 벗고 한참 들여다봐유.


그 소리는 내게 '쉬는 시간' 알려주는 학교 종소리 같당께유.

주인님이 생긴 건 곱상한데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


오늘은 캐나다 잔디밭의 무법자,

뿌리가 지구 반대편까지 닿아 있다는 '민들레' 녀석을 격리하는 현장에 투입됐슈.

기싸움에서 밀리면 안 되니까 한마디 던졌쥬.


"야, 노란 꽃 피웠다고 네가 무슨 귀한 난(蘭)이라도 된 줄 아냐?

땅 밑에선 문어발처럼 사방팔방 뿌리 뻗고 있는 거 내가 다 봤거든. 예쁜 척 그만해라, 네 속셈 이미 다 들켰으니까!"


"너 뭐야? 너도 나처럼 한국에서 왔니?

나도 노랗고 예쁘지만 우리 아가들이 하얀 날개를 달고 동그랗고 폭신한 볼을 만들어 사람들이 후하고 불면 얼마나 재밌는데. 우리 함을 합쳐서 이 정원을 온통 노랗고 하얀 솜털 밭으로 만들자 "


"무슨 소리 내가 오늘 너를 뽑으려고 날 끝을 얼마나 갈았는지 알아? 미안하지만 그 털들이 날아다니면 주인님 눈과 코에 문제가 생기거든. 나는 주인님 손에 달렸으니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인생은 실전이야, 민들레야.

네가 아무리 '나 잡아봐라' 하고 예쁘게 흔들려도, 내 주인님 손에 잡힌 이상 네 운명은 이미 '바구니행' 직행열차라고.

자, 이제 그만 흙 털고 나오시지!"


옆에 있던 바구니 형님한테도 미리 신호를 보냈쥬.


"야, 바구니! 너도 오늘 입 단단히 벌리고 있어라.

저기 담장 밑에 노란 꽃 피우고 예쁜 척하는 '대물' 하나 포착했응께."


"호미야, 쟤는 좀 독해 보이는데?

뿌리가 장난 아니게 깊을 것 같아."


바구니 형님이 걱정스레 입을 벌리며 민들레 들어올 자리를 확보하대유.

주인이 내 허리를 꽉 쥐고 민들레 옆구리를 푹 찔렀슈.

아뿔싸, 이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네유.

땅바닥을 아주 껌딱지처럼 움켜쥐고 버티는 모양새가 아주 고약해유.


"이것 봐라? 지금 지구 끝까지 버틸 기세지?

착각하지 마. 내가 여기까지 비행기 타고 건너온 건, 너 같은 '독한 녀석'들 전문으로 상대하려고 온 거니까.

내 날 끝맛 좀 볼래?"


주인이 손목에 힘을 빡 주더니 나를 더 깊숙이 밀어 넣었슈. '뿌지직' 소리와 함께 흙이 들썩였쥬.


"주인님! 조금 더 왼쪽요! 거기, 거기! 자, 이제 간다! 하나, 둘, 셋!"


마침내 민들레 녀석의 하얀 속살(뿌리)이 항복하듯 지상으로 끌려 나왔슈.

무려 팔뚝만 한 뿌리를 달고 말이유.

나는 의기양양하게 녀석을 바구니 안으로 휙 던졌쥬.


"봤냐? 이게 바로 'K-기술'이다.

야, 바구니 형님! 이 녀석 입주하신다.

구석자리에 잘 모셔드려. 다음은 저기 옆에 있는 어린 민들레들이다. 긴장들 해라!"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슈.

바람이 휑 부니 옆집 마당에서 하얀 낙하산(씨앗)들이 떼거지로 우리 집으로 날아오대유?

망명이라도 온 모양인데, 나는 헛웃음이 났슈.


"어허, 하얀 낙하산 타고 망명 가시게? 네 자식들 멀리 퍼뜨려봤자 소용없어.

내가 이 정원에 버티고 있는 한, 걔들도 내일이면 다 이 바구니 형님 안에서 정모(정기모임) 하게 될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은 실전이야, 민들레야!"


주인은 땀을 닦으며 자랑스럽게 나를 다시 바구니 옆에 내려놓았슈.

오늘도 밴쿠버 정원은 평화롭게 보이지만, 나 김 호미의 날 끝은 쉴 틈이 없구먼유.


내눈엔 잡초도 잔디도 토끼풀도 민들레도 다 그게 그거 같은데 사람들도 그 사람이 그사람 같지만 범죄자라고 판결도 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가두기도 하잖아유. 내가 뭘 알겄슈 하라면 하는거지.

역사는 돌고 돌아 언젠가는 민들레가 귀한몸이 될지도 모르쥬. 민들레야 미안타 네 팔자라고 생각하거라.


내일은 또 어떤 녀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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