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꽃 사랑 2화

안갯속 안개꽃

by 하얀 나비

식탁 위 종이에 적힌 글자는 몇 글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식물세밀화를 그릴 때 쓰는 루페(확대경)를 가져다 댄 듯, 글자 하나하나가 그의 망막을 찌르고 가슴속으로 아프게 뚫고 들어왔다.


"짐은 천천히 가져갈게. 찾지 마."


급하게 쓴 흔적이 역력한 필체.
끝부분이 살짝 번진 것은 볼펜 잉크가 마르기 전,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스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종이를 코끝에 가져다 댔다. 세밀화가는 눈보다 후각과 촉각이 먼저 반응하는 법이다.
종이에서는 희미한 라벤더 향이 났다. 그녀가 외출할 때마다 손목 안쪽에 톡톡 두드리던 그 향수였다.


그 향기가 미세하게 남아 있음은 그녀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집어 들었다.

서둘러 그녀를 찾아야 한다.


"가지 마, 제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구두 뒤축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까 들어올 때 보았던 희미한 가로등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밤공기는 아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그는 그녀가 갈만한 곳들을 머릿속으로 세밀하게 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도화지 위에 잎맥을 채워 넣듯, 그녀의 동선을 하나하나 추적했다.


친정? 아니,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그곳으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 집? 그녀에겐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동네 어귀의 작은 간이역 앞이었다. 지금 시간이면 막차는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멀리 가지 못하고 그 근처에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역 대합실의 차가운 유리문을 밀었다.
텅 빈 의자 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그녀였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그가 한 번도 그려준 적 없는, 하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마른 안개꽃 한 다발이 안쓰럽게 놓여 있었다.


대합실의 낡은 플라스틱 의자 위, 그녀는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마른 안개꽃 다발이 담요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가 침실 서랍장위 바구니에 두고 항상 바라보던 그꽃 이었다.


그는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스무 살의 그녀가 떠올랐다.

대학 교정 뒷길, 흐드러지게 핀 안개꽃 사이로 환하게 웃던 나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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