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는 안개꽃
그가 숨을 죽이며 다가가자, 인기척에 놀란 그녀가 눈을 떴다.
"...... 왔어?"
원망도, 분노도 섞이지 않은 무색무취의 목소리. 그 무심함이 오히려 그의 가슴을 날카로운 제도 펜촉으로 긋는 듯 아팠다.
"왜 여기 있어. 집으로 가자."
"내 집은 이제 없어. 당신 작업실엔 꽃그림뿐이고, 거실엔 가구들뿐이잖아. 내가 있을 자리는... 그집 어디에도 없어."
그녀가 무릎 위의 안개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 이거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난 날 당신이 나한테 준 꽃. 안개꽃은 다른 꽃을 돋보이게 해주는 조연이라서 좋다고 하던 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식물세밀화가가 된 후, 그는 주인공인 장미나 백합의 화려함보다 그 곁을 묵묵히 지키는 안개꽃의 질감을
사랑하게 되었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안개꽃처럼 "당연한 배경"으로만 여겼던 실수를 하고 만것이다.
배경은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소리 없이 나를 받쳐줘야 한다고 믿었던 오만함이 오늘 밤의 결과를 불러왔음을 깨달았다.
"당신은 항상 나를 "배경"으로만 그렸지. 하지만 나도... 나 자신이 주인공인 그림이 되고 싶었어."
그녀가 일어서려다 힘이 풀린 듯 휘청였다. 그는 얼른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에 닿는 그녀의 어깨뼈마디가 너무나 앙상했다. 세밀화가로서 매일같이 꽃잎의 두께를 재던 그였지만, 정작 아내의 몸이 이토록 가벼워진 것은 알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마치 놓치면 다시는 그릴 수 없는 귀한 꽃잎이라도 되는 양.
"다시 그릴게."
"......?"
"배경이 아니라, 당신이 주인공인 그림. 안개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얼마나 치열하게 피어 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아주 천천히, 세밀하게 다시 그릴게. 그러니까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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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녀의 잘못이었다.
어느 날 그녀의 옷깃에서 묻어난 낯선 남자의 향수 냄새, 그리고 늦은 밤 누군가와 나누던 낮은 전화 목소리.
그것은 분명 그녀가 만든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그는 하루에 열두 시간씩 돋보기를 들여다보며 꽃잎의 주름을 세었지만, 정작 아내의 얼굴에 깊어가는 수심의 주름은 단 한 번도 세어보지 않았다.
그는 죽은 식물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데 빠져 있었고, 아내는 살아있는 채로 그 집에서 천천히 사그러들고 있었다.
그녀가 밖으로 눈을 돌린 것은 누군가에게 '살아있는 존재'로 확인받고 싶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음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당신의 방황은 결국 나의 부재(不在)였다고, 그러니 제발 이 가정을 깨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그녀의 잘못은 맞았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자신의 무심함이 더 큰 죄처럼 느껴졌기에 그는 기꺼이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밖에는 어느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대합실의 창문 밖으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함박눈이 안개
꽃송이처럼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