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안녕~안녕~서울이여 안녕~

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

by 하얀 나비
캐나다집 뒷마당

나는 서울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열심히 목수일을 하셔서 번돈으로 도림동에

조그만 단독주택을 사셨다.


50만 원에 아주 싸게 샀다고 좋아하셨다.

우린 부자가 된 것 같았고 너무 행복했다.


우리만 들어갈 수 있는 대문이 있어서 제일 좋았다.



나는 새엄마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 맛있는 반찬은 많이 먹지 않고

조금만 먹었다.


청소도 하고, 밥 짓는 것은 연탄불을 쓰는 거라서 못하지만 쌀은 미리 씻어놓았다.


이사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버지와 새엄마 그리고 오빠가 갑자기

가방을 싸고 허둥지둥 시골에 간다고 했다.


너무 바쁘게 집을 나가서 정신이 없었다.


나도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구석에 서있는 나의 존재를 잊은 듯이 보였다.


밥은 옆집 아줌마 집에 부탁했다는 말만 하셨다.


갑자기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혼란스러웠다

얼마 후 옆집 아줌마가 찾아와서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가 와서 엄마 아빠가

시골에 가셨 으니 우리 집에서 밥을 먹어라”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몹시 놀랐다.


할머니의 거칠었던 숨소리가 생각났다.

어릴 적 어느 날 밤에 나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해서

자꾸 뒤척이며 잠이 들려는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하셨다.


"자꾸 이러면 할머니 죽는다”

나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건 할아버지가 혼내실 때보다 더 무서운 말이었다.


다음부터는 할머니가 깨지 않게 숨도 작게 쉬고

움직임도 조심하며 잠을 청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머니가 제일 보고 싶어 하실

사람은 분명 나일 텐데 어떻게

나만 두고 갈 수 있을까?


할머니가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았다.


새엄마가 할머니와 나를 미워해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까지도

힘없는 어린 나와

죽음을 눈앞에 둔 힘없는 할머니를

못 만나게 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난 후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슬픈 노래가

귀에 온종일 맴돌았다


“안녕~ 안녕~서울이여 안녕~ “


그 가락이 이별인사처럼

할머니의 숨소리처럼 가슴속에

아프게 맴돌았다.


장례를 마치고 가족이 돌아오는 날까지가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꿈속에서라도 할머니를 보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뭐가 그리 바쁘신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세상에 내편도 이제 없어졌다.


나를 그때 못 데려간 이유는

기차표가 3장밖에 없어서였을 테고

내가 어려서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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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새엄마는

나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오빠는 서울에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서울에 남겨졌다.



도착한 시골집에 나를 반겨줄 할머니는 더 이상 안 계셨다.


종갓집 산에 묻혀계셨다.

어린 내가 혼자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시골에는 할아버지도 계셨고 땅도 아직 남아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 땅의 일부를 아버지 모르게

작은엄마에게 주셨다고 아버지가 어이없어하셨다..


그건 아버지가 벌어서 산 아버지의 땅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가엾은

둘째 며느리를 위해 아들에게 욕먹을 각오로

용기를 내신 거였다.



아버지는 혼자 남겨지신 할아버지를 모셔야 했고

무엇보다도 그 남은 땅을 할아버지로부터 지켜야 했다.



아버지가 그냥 서울에서 집을 지으셨더라면

우리는 큰 부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서울 개포동은 논밭인 땅을 개발하고 있었고

아빠가 목수일로 돈을 벌어 쉽게 집을 사신 것처럼

더 많은 집을 싼값에 사셨을지도 모른다.



작은엄마는 할아버지가 주신 땅을 팔아

그 돈을 들고 아들을 데리고 서울의 우리 집으로 가셔서

오빠의 밥을 해주면서 지내셨다.


작은엄마가 떠나시고 혼자 남은 할아버지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새로운 시골학교에 할아버지와 함께 갔다.

나는 젊고 똑똑한 새엄마가 같이 갔었으면 했었다.


할아버지가 교무실로 들어가시고

나는 교무실 앞에 서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

나를 둘러싸고 구경했다.


하얀 얼굴에 가방과 도시 옷차림이 신기했나 보다.


아이들은 그을린 피부에 맨발이었고

흙이 묻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옷은 깨끗하지 않았다.

나에게 시선이 몰려들었고

나는 그 애들이 바라보기만 했는데 울었다.


선생님이 나오셔서 애들에게 교실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고

매일매일 아침 교실 조회 때마다

이유도 없이 칭찬을 해 주셨다.



“우리 희경이 오늘은 더 예쁘네”


나는 매일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다른 남자 선생님들도 나만 보면

두 팔로 나를 벽에 잡아두고 못 도망 가게 장난을 치셨다.

아이들도 서울에서 전학을 온 나에게 잘해주었다.



매해 가을이면 운동회를 했는데

달 전부터 무용 연습을 해야 했다.


교장 선생님이 조회 때 올라가는 강단에

나와 남자애 하나가 올라가서

무용 시범을 보여주면 운동장에 있는

친구들이 똑같이 율동을 따라 했다.


더운 여름날 햇빛이 쏟아지는 운동장에서

매일매일 오랫동안 무용 연습을 했다.


내가 캐나다에 이민온 후 시골 국민학교

동창회에 연락이 닿아 우연히

그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유난히 나를 예뻐하셨다고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 친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손녀를 잘 부탁한다고

그날 담임 선생님에게 3천 원을 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그 선생님이

편애를 하셔서 싫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 3천 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러셨다는 게 통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 내가 알고 있던 할아버지가 그러실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늦게나마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미안함을 느끼시고 할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돌봐주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할아버지가 된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는 손녀가 얼마큼 예뻐?”

남편이 말했다.

“아휴 하늘만큼 땅만큼 예쁘지.


그리고 어디선가 나의 할아버지도 똑같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하늘만큼 땅만큼 손녀를 예뻐했다”



그 이듬해에 할아버지는

밤나무에 팔을 긁혀 작은 상처가 난 뒤 갑자기 많이 아프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별일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말도 못 하시고

위독해지셨다.

그리고 유언도 한마디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동네 사람들은 파상풍이라고도 했고

어디선가 농약이 발견되었다며

자살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장례를 치렀다.

그 후로 방구석 한쪽에 하얀 커튼으로

조그만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새엄마는 아침저녁으로 그곳에

향을 피우고 먼저 밥과 좋은 반찬을 올리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내가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봤던 것이랑 똑같았다.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 커튼은 치워졌다.



얼마뒤 동네에는 옛날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돌아다녔고 새엄마는 할머니가 쓰시던

예쁜 가구를 아주 비싼 값에 팔았다.


그 가구는 내 키만 했고 신기한 동물들이 추상적으로

자개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동물들은 십장생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래되어선지 문쪽에 움푹 들어간 상처도 있었다.


나는 그 장식을 가끔 들여다보며 이게 무슨 동물일까?

하고 신기하게 봤었다.


새엄마는 그 사람들이 제시한 가격에 놀라셨고

마침 치우 려고 했던 가구를 비싼 값에 팔았다고

아주 기뻐하셨다.



한참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뒤에

뉴스에서 문화재급 가구가 발견되었다고

할머니의 가구가 사진으로 보였다.


나는 눈에 익숙한 그 가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할머니가 부잣집 큰딸이었으니 시집올 때

그 시대의 최고급 가구를 사 오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 결혼을 하시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하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안 계시다.



그동안 나는 너무 어렸고 떨어져 살아서

엄마를 잊고 있었는데 시골로 내려오고 나니

엄마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분이 나를 낳아 준 사람이구나.


성격도 온화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엄마의 잔소리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고운 피부

갸름한 얼굴 나도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겠구나.


나는 마주 앉아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고

하시는 말을 들어주려고도 노력했다.



엄마는 엉뚱한 말을 항상 중얼거렸다.

그러다 나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시려는 듯 속삭였다. “식모살이를 하면 돈을 많이 번다더라”.


나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으나

금세 다른 말을 하셨다.


진심을 나눌 대화는 힘들었다.



친구들이 놀러 왔는데 엄마가 부끄러웠다.


다음부터는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혹시 이사실이 알려져 애들이 나를 무시할까 두려웠다.

학교에서도 모두 새엄마를 내 엄마로 알고 있었으니

그게 오히려 다행이고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구들 모두가 이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네에서 우리 집 가족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고

그 집에는 내 나이 또래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친구도 나에게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겐 그게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둘이지만 정작 나는 기댈 엄마가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는 내게 숨겨야 할 존재가 되었다.



시골 우리 집 근처에는 나와 동갑인 친구가 살고 있었다


새엄마는 그 애를 예뻐하셨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어느 날 새엄마는 나를 밭으로 데려가 잡초를 뽑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떤 풀이 잡초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되었다.



결국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풀들을 대충 뽑아 버렸다


잠시 후 돌아오신 새엄마는 내가 뽑아 놓은 것들을

보더니 어이없어하며 몹시 화를 내셨다


그날 이후 새엄마는 나에게 다시는 밭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농사일을 마치고

밤이면 방에 모여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엄마는 그 아이 엄마가 옆에 있는데도 늘

나 대신 그 아이를 무릎에 앉혀 두시고

그 아이의 머리에 턱을 고이고 계셨다.


나는 부러운 눈길로 새엄마 무릎 위에 앉은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아이는 내가 못하는

잡초 뽑기도 잘했고 마당도 먼지가 일지 않게 참 잘 쓸었다.


그 애는 언제나 나의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 아이는 중학교에 가지 않고 공장에 들어갔다


공장 사장이 그 애를 예뻐해서 출퇴근할 때마다 오토바이로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내가 직장에 다니던 시절 명절에 내려가면


새엄마는 늘 그 아이 이야기를 하셨다


“그 애는 이번 명절에 자기 엄마한테

50만 원을 갖다 드렸 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자신감이 떨어졌다



명절 때 고향에 간다고 하면 내가 모시는

전무님은 나에게 10만 원을 주셨다.


그 돈은 내 월급보다도 많은 돈이었다.


나는 그 10만 원을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라디오도 사다 드렸다.



그러나 새엄마 앞에서 그 아이는 내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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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장학생으로 뽑혔다.

나는 장학금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다.


새엄마가 나의 입학식에 오셨었고 내가

장학금을 받는 걸 보고 놀라셨다.


입학식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선생님이

갑자기 나의 이름을 부르시고 앞쪽으로 자라를

옮겨 앉으라고 하셨다.


장학금으로 받은 봉투 속에는 제법 큰돈이 들어 있었고

새엄마와 나는 너무 좋아서 추운 줄도 모르고

빗속을 걸어 집으로 왔다.


그 후에도 1등 2등을 놓치지 않았다

공부는 내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학교에서 글짓기 그림 그리기 만들기

상이란 상은 다 받았다.


상품으로 영어사전 한문사전 공책 문구류를 받아서 차곡차곡 쌓였다.


오빠에게도 나눠주었다.


나에게 학교는 자신감이 만들어지는 나의 놀이터였다.



시골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학교가 끝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드렸고

해가 떨어지면 등잔불을 켜고 숙제를 해야 했다.


그런 친구들과 경쟁을 하는 것 자체가

불공평한 것이었지만 어느새 나도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드리고 등잔불 아래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입학식 이후로 새엄마의


나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그 돈으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사셨고

계속해서 새끼를 낳아 파셨다.


“얘 학비는 이 돼지가 다 내준다”라고

새엄마가 말하셨다.



시골에 가서 뛰어놀다가도 크게 자란

엄마 돼지를 슬쩍 보곤 했다.

젖꼭지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새엄마는 새벽 5시면 우리가 깰까 봐

조용히 일어나서 나를 위해 새벽밥을 하셨다.


도시락도 멸치를 맛있게 볶아서 싸주셨다.


4km는 걸어가야 중학교가 있어서 일찍 집에서 나가야 했다.


항상 텅 빈 교실에 제일 먼저 들어가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나는 어버이날에 새엄마를 엄마의 이야기로 써서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새엄마를 엄마로 바꿔 썼기 때문에 상을 받고도

마음이 떳떳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나는 거울을 자주 보며 나의 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친구들 교복에서는 늘 샴푸 냄새 같은 향기가 났다.

근데 내 교복에서는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는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아버지는 방에서 늘 담배를 피우셨다.

나는 그 냄새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들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버지 방에서 담배 좀 안 피우시면 안 돼요?

교복에 냄새가 배요.”


그 말이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할 줄 몰랐다.


아버지는 얼굴을 굳히더니 밖으로 나가

한참을 말이 없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년 키워 봤자 아무 소용없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반응에 몸이 얼어붙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나를 멀리 했고

담배는 심각한 표정으로 밖에서 피우셨다.


아버지와의 사이에는 어쩌지 못할 커다란 벽이 생겼다.



엄마는 반복해서 나에게 하시던 이야기가 있었다


열흘 넘게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새엄마가 자신을 묶어 놓고


매를 들었다고 하셨다.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눈가가 촉촉해지며

생생하게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엄마의 눈에 담긴 깊은 슬픔만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엄마의 입에서 여러 번 흘러나오던 그 말들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나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엄마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보았다.


전부터도 그러셨지만 그날만은 부당한 대우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사춘기였던 나는 새엄마에게 따졌다

“왜 엄마한테 그렇게 하세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새엄마는 깜짝 놀라셔서 나를 보시더니

울분이 터진 듯 소리쳤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새엄마는 자식도 없는데 살아서 뭐 하냐며

산 쪽으로 뛰쳐나가셨다.


아빠가 달려 나가 겨우 붙잡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를 생각하며

멍하니 서있었다.



그날 이후 집안에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한 달쯤 지나 나는 아무런 예고 없이 다시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새엄마가 말했다


“나는 얘랑은 하루도 못 살겠어요”



그로 인하여 나는 엄마와의 생활도

더 이상 함께하지 못했고

불쌍한 엄마를 지켜주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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