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만든 하얀 감옥

달콤한 오디맛

by 하얀 나비
유럽 City Tour Bus

사랑방 가득 선반이 설치되던 날,
나의 여름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채반 하나였다.
그 안에는 이름 모를 작은 벌레들이 꼬물거리며 가득 차 있었다.

어린 눈에는 그저 징그럽기만 한 풍경이었다.
새어머니는 뽕나무 밭에서 연한 잎 몇 장을 따다 그 위에 살포시 덮어주셨다.

다음 날 아침, 채반을 들여다보면 초록빛 뽕잎은 간데없고 앙상한 뽕잎 줄기와 검은 모래알 같은 똥들만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벌레들은 무서운 기세로 몸집을 불렸다. 징그러웠던 몸체는 어느덧 투명하고 팽팽하게 차올랐고, 대나무 채반이 휘어질 만큼 묵직해졌다.

새어머니와 나의 손길도 그만큼 바빠졌다. 손바닥보다 크게 자란 뽕잎을 따고 또 따도, 허기진 누에들의 입놀림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누에들이 뽕잎 먹는 소리가 서걱서걱 조용한 사랑방을 가득 채우고 새엄마의 보람도 같이 자랐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무더위 속, 유일한 위안은 검게 익은 오디였다. 잎사귀 사이 숨어 있던 보석 같은 오디를 입안에 넣으면, 진한 달콤함이 온몸의 피로를 씻어내주곤 했다.
손가락에 보랏빛으로 오디물이 들고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새어머니는 달이 뜬 저녁에도 배고픈 누에를 위해 뽕나무 밭으로 향하셨다.
생각해 보면 당신이 낳은 자식도 없으신데 누에 키우기 부업까지 하시며 참 열심히도 사셨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뽕잎 따기.

나는 누에가 징그러워 만지지도 못하고 새엄마가 다하셨다.
누에가 싸놓은 똥 때문에 자주
바닥을 갈아주셨다.

한 달쯤 되었을까 괴물처럼 커진 누에들이 어느 순간 먹기를 멈추고 제 몸에서 1500 미터가 넘는 하얀 실크 단백질 실을 만들어 입으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마술이 아니겠는가? 초록의 잎들을 먹고 자랐는데 새하얀 줄을 입으로 꺼내어 8자를 그리며 동그랗고 새하얀 집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고 그 안에서 아무도 못 보게 허물을 벗고 번데기 모양으로 변신을 한다.

번데기로 변한 누에는 하얀 고치 안에서 15일 후 나방으로 변신을 하고 알칼리성 물질을 뱉어내어 고치를 녹이고 나와서 알을 까야하는데 그전에 사람들이 실크실을 벗겨가고 번데기도 먹어버린다.
슬픈 누에의 운명이다.

징그럽던 벌레가 사라지고 채반에 새하얀 고치가 가득해지는 그 신비로운 광경과 함께 나의 고된 여름도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

누에들이 각자 하얀 독방으로 들어간 뒤 찾아간 뽕나무 밭. 무성하던 잎사귀는 모두 누에 뱃속으로 사라지고 뜨거운 햇빛을 가려줄 그늘도 사라졌지만,
텅 빈 가지 사이로 검게 익은 오디들 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지난여름의 수고를 가만히 다독여주고 있었다.


연구소 실험실 같이 보였던 이름뿐인 사랑 없는 사랑방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선반들이 철거되고 오지도 않을 손님 맞을 준비를 마쳤다.


누에고치를 판 돈의 행방도 안갯속 미스터리로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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