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와의 협업
생각해 보면 새엄마와 같이 몇 년 살지도 못했지만 새엄마와 나의 협업의 시간이 더러 있었다.
(협업 1)
밤이면 등잔불 아래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양은으로 만든 둥근 접이식 상위에 농사지어 수확한 까만 콩을 깔아놓고 보물 찾듯이 눈에도 불을 켜고 벌레 먹거나 찌그러진 콩을 골라내는 일을 했다.
“단 하나라도 나쁜 콩을 놓치면 안 된다.”
그땐 우리가 가족임이 분명했다. 새엄마도 돋보기를 쓰고 눈을 크게 뜨고 까만 콩에 집중하셨다.
나쁜 콩을 골라내는 단순한일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고 중독성이 있었다.
콩은 생각보다 많았고 밤은 점점 깊어져 갔다.
다음날 새엄마는 그걸 장에 가지고 나가 파셨고 좋은 값을 받았다고 기뻐하시며 서울에서 공부 중인 오빠에게 그 돈을 보내야 한다고 하셨다.
(협업 2)
가을날 새벽안개가 하얗게 드리워져 10미터 앞도 뿌옇고 아직 날이 밝기도 전인데 새엄마는 나를 깨우셨다.
이른 새벽에 나가는 이유는 누군가가
새벽어둠을 틈타 알밤을 주워가기 때문이다.
밤송이들이 크게 자란 밤들을 더 이상 품지 못하고 항복을 하면서 밤송이 안에 있던 밤들이 줄줄이 탈출을 시작했기 때문에 여기저기 어슴푸레 광택이 나는 알밤들이 보였다.
조그만 산이 집뒤쪽으로 있었고 그 나무들 사이사이에 밤나무도 있었다. 한 번도 가꾸거나 관리를 안 했지만 가을이면 나무들이 알아서 밤송이를 만들고 스스로 터뜨렸다.
누가 집어가기 전에 이것들을 수확해 와야 한다.
하나둘 주운 밤이 금방 바구니에 채워지고 무거워져 내일 아침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한다.
날이 밝아오면 아무도 남의 집 알밤을 주워 가지 못한다.
검은 손들은 어두울 때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날은 밝아오고 처음으로 맞는 이른 새벽 공기가 안개와 섞여 촉촉 신선하다.
집에 있는 항아리가 반짝이는 알밤들로 가득 채워진다.
내일도 일찍 나가서 해뜨기전 촉촉 신선한 새벽 공기를 가슴가득 채워오리라.
(협업 3)
명절 전날 남자들이 큰 당숙네 집에 제사를 지내러 떠나면 새엄마와 나 둘이 남아 제사상을 차렸다.
큰 당숙 집에서 먼저 제사를 지내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모두들 우리 집으로 오셨다.
새엄마는 솜씨를 뽐낼 수 있는 이 기회를 위해 급한 대로 나를 하루전부터 보조로 쓰셨다.
상위에 올릴 제사 음식을 제기위에 예쁘게 쌓는 일이나 잔 심부름들을 시키셨다.
무대 커튼이 올라가기 전처럼 왠지 나도 마음이 두근거렸고 시계를 보며 긴장감이 맴돌았다.
드디어 그들이 도착하고 우리 집 마당은 차들로 가득 차고 잘생긴 멋쟁이 육촌 오빠들의 남자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큰 당숙이 새엄마에게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새엄마가 고대하셨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새엄마와 나의 협업으로 조상님들께도 임무를 무사히 마쳤고 우린 뿌듯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 기억 어디에도 남동생이 안 보인다.
남동생은 도대체 어디에 소리 없이 있었을까?
호랑이를 만나면 뒤에 있던 작은 새는 그냥 풍경이 되어버리듯
내가 살아남기 위해 신경썼던 사람들만 크게 확대되어 기억의 화면을 덮을 뿐이다.
“내 남동생의 모습이 기억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생모의 모습도 기억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건이 아닌 풍경만 나오는 기억을 꼭 찾아야만 한다.
그들은 분명 나와함께 거기 있었고
그들은 풍경속 어딘가에 분명히 있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