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 장현광의 『역학도설서』에서 배운 사유의 방식
여헌의 『역학도설易學圖說』 서문 첫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수십 년간 고민해 왔던 역(易)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이 마치 안개 걷히듯 풀리는 순간을 맞이했다.
夫易卽天地也
“역이 바로 하늘과 땅이다.”
이 한 문장은 곧, 역이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으며,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역이 아니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곧 역이란 특정한 누군가의 사유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 자체를 통찰하고자 하는 길임을 말한다.
물론, 여헌도 조선왕조라는 시대와 공간의 범주 안에서 살았기에, 그는 자신이 존재하던 그 시기까지의 역과 관련된 서적들을 읽고 고민하고 취사선택했을 것이다. 나 역시 많은 역 관련 서적들을 읽었지만, 자구해석에만 매달리는 글들 속에서 '역의 본질적인 시원(始原)'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러던 중, '1정8회1貞8悔'를 고민하던 차에 여헌 장현광 선생의 「16괘 배진소16卦排陳疏」를 접하고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글의 사연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추적하게 되었을 때, 나는 우리 선조들의 학문에 대한 정확함과 세밀함, 철두철미한 태도와 사유의 깊이와 행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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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 역(易)은 곧 만물 그 자체였고, 우주에 내재한 법칙이며, 인간이 따라야 할 삶의 길이었다.
天地焉而萬變萬化、萬事萬物在其中矣
“하늘과 땅이 거기 있어 만 가지 변화가 일어나며, 모든 사물은 그 안에 있다.”
여헌은 묻는다.
聖人所以必有易之書,何也?
“성인이 반드시 『역』이라는 책을 남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분명하다.
人固莫不有其身,其至近者莫此身若也。而能知其耳、目、口、鼻之所以爲耳、目、口、鼻,四肢、百骸之所以爲四肢、百骸,五臟、六腑之所以爲五臟、六腑者,鮮矣。
“사람은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으나, 그토록 가까운 자기 몸조차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는 그의 말은, 더 큰 원리와 질서를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일깨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聖人是憂之,不得已而作《易》,模象出方冊上天地,然後神明之德以之通焉,萬物之情以之類焉。
“성인은 이를 근심하여 부득이 역을 지었고, 천지의 형상을 본떠 방책(方冊)에 나타냈으며, 그로써 신령한 덕과 만물의 실상이 통하고 연결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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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나는 멈췄다. 단순한 괘상卦象과 괘사卦辭로 해석되는 『역易』이 아니라, 우주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본뜬 기호체계를 통해 자기 존재를 성찰하고, 삶의 길을 모색하는 사유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여헌은 또한 이렇게 탄식한다.
不知其所立,無以知所行,安得論參三之道哉?
“사람이 서야 할 자리를 알지 못하고, 걸어야 할 길을 알지 못하면, 어찌 참삼지도參三之道를 논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단순한 철학적 경구(警句)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늘 마주해야 할, 삶의 근본을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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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정보들이 과연 삶의 진정한 ‘자리’를 찾아주고, ‘길’을 밝혀줄 수 있을까? 나는 여헌의 글에서 배운다. 진정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나를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理之精麁大小,無有焉。橫縱千萬,皆一貫也。
“이치에는 정밀하고 조잡함, 크고 작음이 없다. 가로세로로 얽히고, 천 갈래 만 줄기로 이어지되, 모두 하나로 꿰뚫려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주의 직관인가. 진리는 고정된 틀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다양한 모습이지만 본래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변화, 그 맥을 읽어내는 것—그것이 바로 역이었다.
『역학도설』은 단순한 주석서가 아니라, 삶의 철학이자 존재론적 질문을 담은 성찰의 기록이었다.
나는 여헌을 읽으며 단순히 고전을 연구한 것이 아니다. 그 사유 방식으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시대를 돌아보았다. 디지털과 인공지능, 무한한 선택지 속에 사라져가는 ‘인간다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사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책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다시 길어 올려야 할 삶의 태도이다.
이 글은 그 사유의 여정을 따라가려는 기록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