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 홍양호의 우이동 가을 단상
삼각산 우이동 계곡에 마련한 별당이 완공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 음력 9월 보름 지난 다음날 필마를 몰아 어린 종과 함께 책 한 궤짝 술 한 통을 챙겨 바람같이 흥인지문을 빠져나왔다. 마음은 이미 이계당에 가있어, 소나무와 밤나무 숲을 굽이굽이 돌아 한숨 돌릴 틈 없이 달리는 말에 채찍까지 더하며 단숨에 도착했다. 싸리나무 삽작문 열고 흙 섬돌 디디니, 강기슭 단풍은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울타리 국화는 이미 노랗게 피어 나를 반긴다.
얼른 평상에 삿자리 깔고 문방사우를 정돈하니, 술잔에선 은은한 향기 가득 퍼지고 책상 위엔 책이 가지런하다. 매일 《주역》 한 괘를 읽으며 하도와 낙서의 이치를 탐구하고, 복희 씨의 선천도를 그리며 그의 사유방식으로 천지자연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역易의 시원始原을 깊이 생각해 본다.
아침식사 마치면 지팡이 짚고 시냇가로 나선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피라미를 바라보기도 하고, 하늘을 가르는 기러기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본다. 사방은 인적 없이 고요한데 가끔 저 숲 속 나무꾼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져 계곡을 타고 물소리와 오락가락 어우러진다. 나무 그림자가 점점 옮겨가더니 저녁이 되어 나 또한 느린 걸음으로 유유자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달이 동쪽 산봉우리에 떠오를 때쯤 세상은 고요 속에 잠기는데 나는 다시 지팡이 짚고 시냇가 위로 올라가니, 하얀 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달빛조차 어른거린다. 북두칠성이 물에 비쳐 손으로 주울 듯 반짝이니 결국 너럭바위에 앉아 술 몇 잔 기울이다 취흥에 《시경》의 「겸가」를 흥얼거리며 읊어댄다. “긴 갈대 푸른데, 흰 이슬은 서리되었네. 저기 저 伊人이 물 저편에 있어, 물길 거슬러 올라가려 하나 험한 길이 멀기도 하네......" 정적 속에 퍼지는 소리에 숲 속 새들이 깜짝 놀라 날갯짓하며 화답하는 듯하고, 물고기마저 바위 밑에서 고개를 들어 귀 기울이는 듯하다. 반딧불은 잎사이로 날아들며 옷소매에 앉아 반짝거리는 것이 유성처럼 빛난다.
자연과 하나 된 이 순간, 세상의 비방도 칭찬도 귀에 들리지 않고, 기쁨도 슬픔도 마음을 흔들지 않는다. 지금 내 마음은 보름달처럼 밝고, 맑은 물처럼 맑으며, 깨끗한 바위처럼 깨끗해진다. 세속의 탁한 기운은 티끌 되어 사라지니 굴원이 《초사》에서 “바람신이 길을 열어 청량함을 주도다”라고 말한 경지가 바로 이것이던가!
고요함은 온갖 소리가 모두 거두어진 듯하고, 탁 트인 마음은 하늘처럼 텅 비어 광활하다. 나의 육신은 유연하게 세속 바깥에 홀로 서 있고, 정신은 아득한 우주의 근원지에서 자유로이 노닐고 있다. 복희 씨를 태호太昊라 하는 이유일까? 맹자가 말한 ‘야기(夜氣)’와 굴원이 읊은 ‘한밤의 신령한 기운'이 이곳에서 살아 숨 쉰다.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도 이 평온과 바꿀 수 없지만, 이것조차 여전히 외부에 있는 자연에 기대고 있을 뿐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나는 아직 안자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안자는 초라한 골방에서도, 한 그릇 거친 밥과 한 표주박 물로도 초탈하여 도를 즐겼다. 《주역》 복괘의 “멀리 가지 않고 바로 바른 본심으로 돌아오면 후회가 없다”는 가르침처럼,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즐거워하였다.
나는 우이동 계곡에 한 달에 한 번 겨우 들를 뿐이니, 그 경지에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 이곳 시냇가에 하루 한두 번 드나들며 얻는 기쁨도, 《논어》에서 말한 “날과 달로 잠시 이르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만약 내가 벼슬을 내려놓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오래 머물며 깊이 수양하고, 익숙해진 끝에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안자의 온전한 즐거움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우이계곡의 물소리와 달빛 아래, 나는 자연과 하나 되어 그 속에서 태호 복희 씨의 사유방식으로 도심道心을 회복하여 천지자연의 덕과 합하는 대인의 마음이 되고자 하는 나만의 낙을 찾는다. 세속을 떠나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내 마음을 맑게 하고, 삶의 참된 기쁨을 일깨운다. 이 하루하루가, 언젠가 안자의 경지로 나를 이끌어 줄 것이라 믿으며 오늘도 자연과 더불어 참된 즐거움과 깨달음을 좇아 조용히 가을을 거닌다.
*이 글은 이계 홍양호 선생의 유이계기遊耳溪記를 읽고 그때 그분의 마음이라면 어떠할까를 생각하며 감히 에세이형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원문과 번역과 해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제 티스토리블로그의 "이계 홍양호 유이계기遊耳溪記 번역과 해설" 을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