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중학교 때부터 줄곧 진짜 속 이야기를 터놓았던 절친 A가 있다. 나는 ‘중2병’이 만연했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A를 만났다. 함께 어울려 다녔던 친구들이 5명이나 더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친구가 제일 편하고 좋았다. 아침이면 집 근처 돌계단에서 만나 함께 등교를 했고, 학교가 끝나면 집 앞 포장마차에서 할머니표 컵떡볶이를 먹으며 놀았다. 주말이 되면 만화방에 들러 유명한 인터넷 소설을 같이 보면서 키득거리곤 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학교는 달라졌지만 종종 전화나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고, 시험 기간이 되면 함께 도서관을 다녔다.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해 오전 6시에 집에서 나와 도서관 앞에 가방으로 줄을 세워두었다. 그리고는 근처 분식집에 가서 라볶이와 김밥을 주문해 아침을 먹곤 했다. 그 새벽에 먹었던 라볶이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걸 보면 내게 그 시절이 정말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나 보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A의 제안으로 생애 첫 유럽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체코와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까지 첫 해외여행이라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았고, 크고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기억에 남는 추억이 많이 생겼고 행복했던 그 시간을 A와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엇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A는 매일 자신의 일과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다음 날을 계획하는 파워 J였고, 나는 그때 그때 하고 싶은 일로 하루를 채워나가는 파워 P였다. 취향 또한 매우 달랐다. A는 색감이 쨍한 파란색, 빨간색 등을 좋아했다면 나는 여리여리한 파스텔 톤의 분홍색이나 하늘색을 좋아했다. A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종종 빈 종이나 교과서 끄트머리에 캐릭터나 사물을 그리곤 했고, 나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해 블로그에 나의 추억을 정리해 공유하는 걸 좋아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비슷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20대 중후반을 지나오면서 A와 나를 둘러싼 환경은 많이 달라졌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은 점점 줄었다. A는 명문대를 졸업해 변시를 거쳐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서울 하위권 대학을 나와 2곳의 회사를 다니다 퇴사하고 현재 프리랜서로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A는 습관처럼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혹은 약속이 많아 바쁘다고 했다. 매번 반복되는 그 말이 마치 ‘내 바쁜 시간을 쪼개서 너를 만나주는 거야’처럼 들렸고, 상대적으로 나의 시간은 하찮아지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친구 관계에서 스펙이나 직업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A가 변호사 직업이나 동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면 나는 조금씩 작아졌다. 또 내가 제로웨이스트와 비건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A는 불편한 기색을 조금씩 드러냈고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서로에게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들이 하나 둘 쌓였지만, 우리는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서로 연락을 끊었다. 가끔 먼저 연락을 해볼까 생각하다가도,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절 인연이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마음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러다 지난 달에 갑자기 A에게 얼굴 한번 보자며 연락이 왔다. 먼저 연락해 준 것이 고마웠고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A를 마주하면 또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아 망설였다.
고민 끝에 만난 A는 여전히 멋진 친구였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것 저것 이야기하다 ‘혹시 나에게 불편한 점이 있었냐’는 물음에 A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제로웨이스트를 시작하면서 가끔 내게도 강요하는 느낌이 들어서 불편했어. 그리고 비건에 관심이 생겼다고 하니까 더 부담이 되더라’ 사실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의 신념이, A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 속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더 명확해졌다. A와 잠시 멀어지기로 했다.
20대 중후반부터 조금씩 흔들리던 이 관계에 대해 나는 줄곧 이렇게 생각했다. 나의 못난 열등감이 우리 관계를 멀어지게 한거라고. 내가 노력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내가 틀렸다. 이건 누구 하나의 잘못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과 경험이 우리를 다른 환경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는 고민하며 나를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A는 A고, 나는 나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불편한 관계라면 만나지 않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답인 것 같다. 그저 거리를 두고 지내다,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이 들 때 다시 만나야겠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