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 이후로,
엄마는 하루에 몇 번 공중전화에 다녀오는 일
말고는 대부분 집에 머물렀다.
마치 껴서는 안 될 이방인처럼 대하던
대문 안 사람들도
살갑게 언니나 내 이름을 불러 주기도 했다.
나는 다시 등화관제에도 마당에
나와 앉아 있을 수 있는 아이가 되었고,
희정이와 싸워도
숨거나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는 대로 힘껏 뛰어 집으로 와서
감자 삶는 냄새, 널어놓은 빨래를 보며
안도하였다.
때때로 일부러 길을 거슬러 올라가
친구와 학교 앞 문방구에서 달고나 뽑기를
하는 언니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언니~ 엄마가 밥 먹으라고 빨리 오래!!"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며
의기소침한 언니에게 힘껏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엄마는 방과 후 집에 올 즈음엔
뜨끈한 삶은 감자, 라면에 소면을 섞어서
양을 푸짐히 늘린 라면 혹은 떡국에 넣을만한
어슷 썬 가래떡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놓곤 했다.
엄마는 비로소 진짜 우리들만의
엄마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어쩐지 우리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빠 월급도 꼬박꼬박
집으로 오고 있는 듯했고
엄마도 전처럼 닷새 엿새 집을
비우는 일이 없었음에도
삼사일에 한번 꼴로
쌀집에 정부미 한대박을
외상으로 사러 가는 내 심부름은
계속되었다.
가겟집 아저씨는 여전히
날 볼 때마다 못마땅한 듯
눈을 흘겼고
주인아줌마는 시시때때로
찾아와 월세를 내놓으라고
쌍욕을 퍼부었다.
간혹 아빠 편지를 받는 날엔
낯익은 아빠 필체가 반갑기도 했지만,
어쩐지 내가 아빠한테 죄를
지은 것만 같아 들킬까 봐 겁도 났었다.
아빠가 집에 있을 때의 불편함이
편지글 사이사이에 떠 올라
가족이 보고 싶고 음식도 입에 안 맞아 힘들다는
편지글에 그다지 애달픈 마음이 들지 않아서
괜스레 아빠가 불쌍해져 운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언니는 이제 중학생이 되어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동생은 이제 툭하면 우는 떼쟁이가 아니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리만치 생각하고
고민하고 계산하는 복잡한 아이 그대로였다.
그해 초여름 아빠가 돌아왔다.
카세트 라디오, 설탕을 듬뿍 넣어 마셨던 홍차티백,
향기 좋은 화장품, 커피포트등 선물을 잔뜩 사 와
우리 집도 부자가 된 거 마냥 으쓱했던 건
아빠가 집에 온 그 하루뿐이었다.
아빠는 다음날 주인아줌마네 집으로 불려 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간간이 새어 나오는 아줌마의 격앙된 고함 소리와
애들이 불쌍해서 볼 수가 없었다는
가슴 서늘한 거짓말을 엿들으며
아빠가 돌아왔어도 우리 집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또렸해졌다.
엄마도 아빠도 돌아왔지만
가난은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이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