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빛아래서

by 서은


파란 대문 집이라 불렸다.

연탄을 들이거나,

곤로에 쓰일 석유를 주문할 때도

파란 대문집 끝방이라고 얘기하면

다들 알아 들었다.


좁은 골목길 맞닿은 집들 사이로

파란 대문은 그중 가장 큰집 이었다.

대문을 지나면 바로 세입자들만 사용하는

변소가 있어서 비가 와 공기가 축축할 때나,

한 여름 쨍쨍한 날씨엔

코끝이 찡한 변소냄새가 제일 먼저

맞아준다.



대문은 하나인데 마당을 가운데 두고

다섯 가구가 살았다.

늘 잔소리만 해대고,

밀린 월세 독촉이 무서워

인기척만 들려도 피해 다니던

주인아줌마집.

그리고 그 바로 앞 연탄불 피우던

작은 아궁이가 있던

두어 평 부엌과 단칸방이 우리 집이다.


옆방 희정이네는 내가 제일 부러워하던 집이다.

희정이네는 일 년에 서너 번 제사를 지냈고

그때마다 빨강노랑하얀색이 예쁘게 꼬아진

오강사탕을 손에 쥐고 마당에 나왔다.

'누가 먹고 싶어 할 줄 알고?

흥! 일부러 자랑하러 나온 거

속이 빤히 보인다!

절대로 먹고 싶은 척 따위 안 할 거야!'

속이 배배 꼬이면서도 고무줄 잡아 달라는

희정이 말에 상냥하게 고무줄을 잡아준다.

절대 오강사탕 때문은 아니다.


그 옆방은 칼잡이 아저씨 방이다.

어떤 땐 아침에 또 어느 날엔 점심에

원래는 파란색이었겠지만

때로 물들어 검은색처럼 보이는 가방을

메고 칼을 갈러 나갔다.

가끔 아저씨가 어디서 얻어온 건지 모를

낡은 냄비나 꿀을 담았던 병들 따위를

모아 고물아저씨에게

엿으로 바꿔 주기도 했다.

대패로 판자에 쏵 눌어붙어있는

큰 엿을 쓱싹쓱싹 대파질을 하면

대패 사이로 엿이 밀려 나온다.

그걸 반으로 잘라놓은 나무젓가락에

척척 감아서 주는데

이가 흔들려

빠질랑 말랑할 때

먹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늘 그 타이밍엔 먹을 순 없었다.


그 옆방이 영희언니네다.

영희언니네는 사실 우리 집보다 더 불쌍하다.

처음엔 언니네 엄마가 늘 집에 있어서

젤루 부럽긴 했지만

언니네 엄마는 웬일인지 늘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었다.

아픈 것도 아닌데 누워서

볶아놓은 콩을 먹으면서도

껍질을 여기저기 흩어놓았고

알지도 모를 엉뚱한 말만 했다.

영희언니는 저녁마다 중앙일보 석간신문을

돌리러 나갔고

학생은 많고 교실은 적어서

오전반 오후반 나눠서 학교를 가야 할 땐

늘 오후반이 안 걸리기를

그래서 선생님 몰래 삼교시후

도망 나가지 않는 게 최고

좋다고도 했었다.



가끔 10시쯤 등화관제가 시작되어

모두 불을 꺼놓고 있어야 할 때는

다섯 가구 모두가 불 꺼진 방보다

달빛으로 밝은 마당에 나와

얘기도 하고 강냉이도 나눠 먹었다.

엄마가 있음 나도 당당히 나가서 있으련만

눈치는 말게서 엄마가 없음

언니도 동생도 나도

껌껌한 방에 모여 앉아

자는 척 소리도 내지 않았다.


희정이 웃는 소리,

영희언니 엄마의 큰 목소리가

귀신 나올 거 같은

껌껌한 방 안 세 자매에게는

위안이 되는 사람소리가 아니고

귀신보다 더 두렵고 경계되는 이웃사람이었다.

그땐 그렇게 누군가 부딪히는 게 무서웠던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