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그 어느 때 보다 예술 컨텐츠가 풍족한 시대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기술의 발달과 복지의 확산을 통해 세계 각지의 작품을 시간과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고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감상자 뿐 아니라 창작자 역시 기술의 발달로 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수월해 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찬란한 영상미를 보라.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통해 이룩한 최첨단 영상 기술의 집약체로서, 현대 문명과 예술의 드높은 향상을 보여주는 상징인 듯 하다. 더구나 현재는 몰락한 공산권 국가를 포함한 북한의 획일적인 프로파간다 예술과 이를 비교한다치면 그 수준의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붉은 별이 그려진 모자를 쓴, 건치를 드러내고 웃는 눈썹 진한 젊은 남녀들이 붉은 공산당 깃발을 들고 슬로건을 외치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 작품과 마블과 디즈니의 화려한 CG, 차도 옆에선 차가 폭발하고 뒤집히며 차도 한가운데를 달리던 자동차는 순식간에 로봇으로 변신하는 트랜스포머의 장면을 번갈아 본다면 그 시선을 빼앗는 압도감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 나는 방금 “시선을 빼앗는”다고 하였다. 무엇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가? 무엇하나 꼽기 힘들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시야를 채우는 거대한 것의 현란한 움직임, 화려한 빛과 색감, 매력적인 사람의 신체, “와!”하고 탄성을 자아내는 실제와 같은 컴퓨터그래픽 등일 것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인간의 주의를 본능적으로 끌어온다. 아닌척 하는 힙스터들은 제외하고선 말이다. 그 이미지엔 괴로움은 없고 감각적 즐거움이 가득하다. 맛으로 치면 단맛이다. 이 미적 파라다이스로 보이는 이미지들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서 딴지를 걸 수 있단 말인가?
요리에 관해 최신의 미학 이론가들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꽤 오랫동안 예술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왔다. 물론 많은 이들이 요리를 예술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해왔겠지만 요리에 관한 어떤 명료하게 확립된 미학 이론이나 해석이 존재한다고는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렵다. 헤겔의 경우, 미각과 후각을 예술적 향유 대상에서 제외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각과 후각은 오직 “쾌적한 것”만을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불쾌한 맛”을 맛보고 “불쾌한 냄새”를 맡으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변태는 의외로 많지 않다. 이를테면 우리는 “흠, 이 음식의 콧물을 삼키듯 물컹물컹하여 거지 같은 식감은 이후에 찾아오는 은은한 단맛을 돋보이게 해주는군”하고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맛은 은은하게 달달하니 좋지만 식감이 거지 같아서 별로군”, 혹은 “식감은 거지 같으나 맛은 은은하게 달아서 뭐 나쁘진 않군” 정도로 평가할 것이다. “거지같은 식감”은 어떻게 배치되든 마이너스 요소다.
하지만 예술에는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베토벤 교향곡에는 얼마나 많은 불협화음이 등장하며, 에곤 쉴레의 그림은 얼마나 좀... 하여튼 좀 그런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공포와 연민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비극 작가는 도덕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고귀한 인물을 그의 사소한 결점에 의해 몰락 시킬 수 있는 잔혹한 냉혈한이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잔혹한 냉혈한” 따위의 어휘를 쓰지는 않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테베시를 구한 고귀한 영웅 오이디푸스는 그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스스로 눈을 찌르고 테베시에서 쫓겨나야 했던 것이다.
공포와 연민은 단순히 그것의 해소로 인한 카타르시스를 꾸며주는 장식적 역할만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이기도 하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함”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숭고함을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나누는데, 수학적 숭고는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무한에 가까운 양에 대한 숭고함, 역학적 숭고는 인간을 위협하는 대상에게서 느끼는 숭고함을 뜻한다. 이를테면 거친 폭풍우나 가파른 절벽 같은 것 말이다. 이처럼 예술에서 공포와 연민과 같은 부정성은 배제되기 보다도 오히려 적극 권장된다. 미와 공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부정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영화 속 더 많은 폭발과, 더 많은 미남과 미녀의 신체와, 더 정교한 CG를 필요로 한다. 이는 마치 단맛만을 만들어야 하는 요리와 같다. 과장된 파라다이스적 미의 자극, 우리는 이를 “초정상 자극”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자극은 미적 향유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체적 자극에 가깝다. 마치 매우 큰 음량의 고음을 지속적으로 들으면 단지 신체적으로 귀가 아프듯, 그와 같은 자극에 우리 감각이 끌리는 것은 단지 신체적 작용에 불과하다. 한병철은 이와 같은 자극을 설명하기 위해, 롤랑 바르트의 사진 비평 개념인 “스투디움(작품의 객관적 사실 요소)”과 “풍크툼(작품에 대한 주관적 감상)”의 개념에 덧붙여 “아펙툼(작품의 감각적 작용)”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곰브리치는 인간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아는 대로 본다고 하였으나 그와 같은 신체적 작용에는 “아는 것”의 주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공포와 연민도 초정상 자극이 된다. 공포와 연민은 멜로 드라마가 되어 일종의 진통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 비극에서의 디오니소스적 광기를 잃어버렸다.
초정상 자극의 세계에서 공포와 연민과 광기와 같은 부정성의 상실은 곧 사회적 면역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인스타그램에는 예쁜 사진만 올려야 하고, 외모가 못났으면 자기 관리를 해야 하며, 말에는 내용이 없더라도 형식만큼은 예뻐야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부정성은 배제된다. 꽃길만 걸으라는 말은 사회적 면역력의 상실을 보여준다. 본래 예술은 그것을 감상하는 이들의 주관적 판단과 그에 따른 관점의 다양성을 보여주었으나, 현대의 예술은 “아펙툼”적 감각 작용을 통한 획일적인 감상만 남긴다. “볼거리가 화려하고, 배우가 예쁘며, CG가 정교하다”와 같은 것들 말이다. 이와 같은 감상은 사실 감상이라기 보다도 “맞으니까 아프다”와 같은 문장과 유사하다.
우리는 현대를 다원화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에서 다원적인 것들은 초정상적인 상품으로 다듬어진다. 이것은 다원화라기 보다는 “다원적인 것들의 동일화”다. 디즈니를 보라. 디즈니는 인종의 다양성 역시 아펙툼적으로 상품화한다. 인스타그램에선 본래는 심원한 힘을 지니고 있던 우울 역시 그 본래의 광기의 메세지는 사라지고 아펙툼적 이미지만 남는다. 우울은 그렇게 “힐링 공감 에세이”가 된다. SNS에선 심지어 당신의 창작물이 아닌, 당신 역시 상품화 된다. 그 공간에서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가 해체된다. 당신의 사적 영역 역시 아펙툼적 이미지로서 전시된다. 즉 SNS란, 모든 이가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상품화된 아펙툼적 이미지일 뿐, 사실 아무도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공간이다.
자본주의가 해체한 것은 다름 아닌 주관과 메세지이다. 주관과 메세지가 없는 예술에는 아펙툼적 이미지만 남으며 모든 것이 동일해진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이 메세지의 동일화라면 자본주의에서의 상품화된 예술은 (감상이라고 오인되는) 작용의 동일화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둘은 무엇인가를 동일화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어진다. 오히려 자본주의에서의 예술이 더 해로운 부분도 있다. 동일화된 메세지에는 반박이 억압당할 뿐, 대상이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반박이 가능하나 메세지가 부재하다면 대상이 부재하기 때문에 반박조차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관과 메세지의 해체로 인해 다양성은 힘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미와 자본주의가 화합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시학>, 천병희 역, 숲, 2017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역, 아카넷, 2009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이재영 역, 문학과지성사, 2016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01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차미례 역, 열화당, 2003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개정판)>, 휴머니스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