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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혁재 Aug 19. 2021

윤리와 자유

  우리는 자유로운가? 질문이 이상하다. 당연히 자유롭지 않은가? 나는 오늘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어서 무려 1만 5천원이나 지불하고 수제버거 세트를 먹었는데 도대체 이게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그게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그것이 물질이든, 관념이든) 원인에 의해서 소산되는 결과로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햄버거를 먹은 이유는 햄버거를 먹고 싶어했기 때문이고, 햄버거를 먹고 싶어한 이유는 배가 고프기 때문이고, 배가 고픈 이유는 점심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인과관계에 종속되어 그의 명령에 굴복하는 노예일 뿐일 테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정말 그런 것만 같다.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보다 그리 똑똑하지 못하기도 하고, 시야도 더럽게 좁기도 한 연유로 나를 움직이는 그 모든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다하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양반까지 거들면서 시간 마저 환상이라는 소리를 하는게 아닌가? 그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라는 개념 역시 사실 인간의 좁디 좁은 시야로 인해 생겨난 환상에 불과하다는 거다.


  아,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인과관계에 충실하게 봉사하며,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정해져 있는 운명을 기다리는 것뿐이란 말인가? 그나마 그 미지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라도 줄이기 위해 점집에 가서 사주나 타로점을 보고, 어쨌든 동업자 조심하고 여자만 조심하면 대충 탄탄대로가 열린다는 위안을 얻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 근데 애초에 그런걸 조심한다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운명을 피하려다 도리어 운명에 의해 화를 입은 오이디푸스나 맥베스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줄 것이란 말이냐? 점괘란 그 자체로 불합리한 것이 아닌가?


  이 운명의 부조리에 대한 실존주의자들의 대답은 “좆까, 어쩌라고.”이다. 세상은 요지경이고, 내맘대로 되는거 하나도 없을지라도, 어쨌든 스스로를 부조리 속에 던지며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거다. 꽤 멋있는 태도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운명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맞으며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숭고함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때로 우리에게 어떤 무력감을 주기도 한다. 우리가 운명에 아무리 반항한다고 해서 그것의 부조리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면 도대체 반항은 왜 해야 하는가? 뿐만 아니라 반항은 아무나 하나? 그것은 아무런 효용없는 반항 후에 맞이할 허무를 견뎌낼 만한 힘을 지닌 이들만이 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이에 대해 좀 더 세련된 대답을 내놓는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자유롭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불평만 하지 말고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우리가 보기에 세계는 동일한 원인에서 동일한 결과만 도출되는 기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그것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우리의 눈에 비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선험적인 인식 체계에 따라 재구성된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선험이고 인식 체계고 도대체 이게 무슨 외계어란 말인가? 그니까 풀어 말하면, 흑백 카메라는 세상을 흑백으로 보고, 컬러 카메라는 세상을 컬러로 보고, X-ray 카메라는 대상의 속을 꿰뚫어보고, 열화상 카메라는 대상의 온도를 보듯이, 우리는 하나의 카메라에 불과하고, 정해진 방식대로만 세상을 볼 수 있을 뿐, 대상이 도대체 진실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니까 자유의 존재는 시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겠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세계의 현상 속에서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게 진실로 자유가 없는 것인가? 반대로 1인칭의 시점에서 우리는 진실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우리의 행동이 남의 눈에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자유란 없는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는 정언명령을 말한다. 중학교 도덕시간에 질리도록 들었을 정언명령이란 개념은, 결과에 구애 받지 않고, 스스로에게 내리는 의무적 명령과 행동, 그 자체이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라”가 아니라 그냥 “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 의무적 행위에서 그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의무와 명령에서 자유가 실현되는가? 이것은 무슨 국가가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주 인용하곤 하는 말인 “Freedom is not free” 같은 말과는 그 맥락이 다르다.


  스피노자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고, 감정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를 그저 마일드한 운명론자로 보는 이들이 있지만 그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은 이 이후에 나온다. 스피노자는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때에, 그리고 -그가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르는- 모든 존재가 스스로 존재를 유지하려는 성질과 욕망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위할 때, 비로소 자유롭다고 한다. 그러니까 감정과 같은 수동적인 요인에 이끌리지 말고,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행하는 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좀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왜? 감정은 수동적인 것이고, 감정에 반하는 올바른 행동이야 말로 자유로운 것이니까.


  칸트는 여기서 한술 더 뜬다. 정언명령은 코나투스고 나발이고, 행위 자체의 자유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그저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기만 하면 된다.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자유롭게 행동하라”라는 의식적인 명령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자유는 이렇게 윤리와 결합한다. 윤리적 원칙이 있는 곳에서 비로소 자유가 탄생한다.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윤리가 필요하다. 원칙을 잃어버린 곳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도 없다. 현대 사회의 문제의 원인으로 흔히들 거대담론의 해체를 꼽는다. 래퍼 저스디스가 말했던가. “우리가 특별한 게 있다면 자유의 확대라고 인식했던 고독이겠지.” (P-Type - <네안데르탈>中) 포스트 모더니즘은 인간을 이데올로기의 폭력에서 해방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잃어버린 오늘, 우리는 동시에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지 않았는가? 니체의 초인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고 스스로 가치를 설정하여 행동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했을지언정, 주체적인 가치설정은 하지 않지 않았는가? 바로 그 가치의 상실이 인간을 허무주의와 고독, 그리고 수동성으로 몰아넣었다. 어쩌면 지금이 새로운 가치의 탄생을 위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제 윤리와 자유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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