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서리뷰

책과 우연들

우연히 마주친 책이 주는 희망에 대하여

by 이현

no.1

책과 우연들 – 김초엽 지음


‘김초엽’

조금 진부하지만 ‘혜성처럼 등장했다’라는 표현이 이만큼 잘 어울리는 작가가 있을까?

「책과 우연들」은 SF 장르에서 유명한 김초엽 작가의 첫 에세이로, 그녀가 소설가로 데뷔하여 지금까지 겪었던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의 변화 과정을 담고 있다.


Poto by. 이현

내가 처음 김초엽 작가의 글을 접한 것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란 단편 소설집이었다. 그 책에 실린 모든 단편이 다 매력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였다. 나는 그 소설을 읽는 동안 ‘어떻게 이런 창의적 사고를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내가 항상 문제 풀이로만 접했던 과학이론을 참신한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한 작가. 충격적이었다. 나도 내가 아는 과학지식을 이용하여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무작정 ‘스토리텔링’이란 넓은 바다에 발을 담갔다. 겨우 엄지발가락만 담근 수준이었지만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야기를 전개해 갈수록 자꾸만 커다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상황.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호기롭게 글을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길을 잃고, 너무 막막한 나머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도 안 오는 상황. 그때 오는 무력감. 그리고 그런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 이쯤 되니 ‘역시 소설 쓰는 재능을 가진 이는 따로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김초엽 작가가 그런 재능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Poto by. 이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자주 가는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책과 우연들」이라…… 제목에 이끌려 살펴보니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었고, 나는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하여 첫 장을 펼쳤다.


p.11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했지만 그 앞에서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두려움을 겪어본 이들에게,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며 예기치 못하게 만나는 책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전보다 더 흥미롭고 복잡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이 책에선 전반적으로 김초엽 작가가 글을 쓰는 동안 읽었던 책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양이 실로 엄청나다. SF 장르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정하기 위해 읽었던 책, 글쓰기의 장벽에 가로막혀 괴로울 때 읽었던 책,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길잡이 역할을 해준 작법서와 여러 서평,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불순한 독서목록까지 작가가 접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책들이 작가의 일상과 어우러져 소개된다.


p. 47-48
처음에는 시키는 일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결과를 제대로 해석할 수도 없었지만 논문을 무작정 쌓아놓고 읽다보니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안갯속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모든 것이 마음만큼 잘 되지 않아 괴로웠던 그때도 세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감각이 주던 기쁨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떻게든 머릿속에 집어넣다보면 밑천이 생기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그러면 언젠가 새로운 질문들 던질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 (중략) … 괴로움 앞에서 나는 데뷔 직전까지 하던 일을 해보기로 했다. 일단 모르면 모르는 대로 뭐라도 무작정 읽어보기로. 그러면서 SF의 세계에 대한 흐릿한 지도를 그려보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어떻게든 쓸 수 있을거라고 믿어야 했다.

내가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책에 쓰인 내용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책방에서 만난 이 책이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김초엽 작가도 처음엔 나와 같은 고민을 했구나!’ ‘소설도 배워서 쓸 수 있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위로와 공감을 끌어냈던 부분은 '김초엽 작가도 우연히 만난 책에서 뜻밖의 답을 찾는구나!' 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 ‘어둠 속에서 만난 한 줄기 희망’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여느 자기계발서 못지않게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깊은 공감이, 어느 부분에서는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앞으로 오랫동안 글을 쓰기 위해 가져야 할 자세와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SF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사람이라면,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글쓰기의 장벽에 가로막혀 고민인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 사고에서 한 발짝 떨어져 보려는 노력, 소외된 계층에 대해 한 번 더 깊게 고민할 필요성, 과학을 대하는 자세 등 김초엽 작가만의 톡톡 튀는 생각을 알고 싶은 분들에게도 더없이 재밌게 읽힐 책이라 생각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