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적학 개론(2)
이 퇴적층 말이야. 이거 꼭 우리 같다.
야외조사 지역은 홍천강으로 정해졌다. 강 주변 퇴적층을 관찰하고 시료를 채취해 오는 것이 이번 실습의 목적이었다. 지도에 대충 표시된 조사 지역까지 걸으며 지원은 우엽의 쓸데없는 친절에 입이 떡 벌어졌다. 돌길이 위험하다고 앞장서서 자기만 따라오라고 하질 않나, 손을 잡아 주겠다고 하질 않나, 짐도 혼자 다 짊어지고 걷는 게 평소 지원을 대하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뭐지? 이 새끼는?’ 지원은 180도 달라진 우엽의 태도에 너무 혼란스러워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너 왜 그래? 약 먹었냐?”
참다못한 지원이 우엽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내가 뭐?”
“아니, 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냐고. 나를 사지로 내몰았으면 내몰았을 인간이 적응 안 되게 대체 왜 이래? 그냥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불신에 가득 찬 지원의 말에 우엽은 화딱지가 났지만, 감정을 애써 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거야 내가 너보다 운동 신경도 좋고 힘도 세니까 배려하는 거잖아. 아무튼 잘해줘도 지랄이야.”
“아~ 그렇게 힘세고 잘나신 분이 고등학교 때 지 가방을 나보고 들고 가라고 하셨어요?”
“와~ 한지원 뒤끝 작렬이네. 딱 한 번 그랬잖아! 그때 내가 다리 부러져서 목발 짚고 있었으니까.”
지원과 우엽은 유치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켜켜이 쌓인 서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항변하며 조사 지역으로 향했다. 서로를 향해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감정이 상하기보단 오히려 옛 추억이 떠올라 즐거웠다. 한동안 어색했던 지원과 우엽은 아옹다옹하며 등교했던 학창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날따라 유독 화창한 날씨와 살랑이는 바람, 그리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홍천강의 윤슬이 지원과 우엽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답이 없는 유치한 논쟁 끝에 지친 지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우엽에게 물었다.
“너 그나저나 이번엔 왜 분 단위 계획표 안 짜왔어? 고등학교 때처럼 또 계획표 들이밀어서 숨 막히게 할 줄 알았더니….”
“아… 이제 계획 같은 건 안 세우려고.”
“왜? 너 파워 J잖아. 계획 안 세우면 막 알레르기 반응 일어나고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싫다며. 너 내가 계획표 세우면 질색하잖아. 앞으론 네가 싫다는 건 안 해.”
갑자기 훅 들어온 공격에 지원은 아찔했다. ‘이 새끼가 언제부터 이렇게 배려심이 넘쳤지?’ 지원은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애써 둘러댔다.
“계획표 들이미는 네가 좀 재수 없어서 그렇지. 네 계획대로 공부한 덕분에 내 성적도 올랐으니까… 뭐, 맨날 싫었던 건 아니야.”
그런 지원의 말에 우엽은 안도했다. 역시 지원의 미적지근한 위로가 우엽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데에는 특효약이었다. 우엽은 결심했다. 오늘 지원에게 고백하자. ‘그동안 못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내가 아주 서툴러서 제대로 표현 못 했지만 너를 꽤 오랫동안 좋아했었다고….’
“가로, 세로, 깊이 1m씩 파야 한다고 했지?”
조사 지역에 도착한 후 지원이 우엽을 향해 물었다.
“응. 내가 삽질할게. 네가 물 좀 퍼내 줘. 여기 강가라 땅 파면 금방 물이 차오를 거야.”
우엽이 삽질을 시작했다. 여름이 코앞이라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났다. 그런데도 우엽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힘든 기색 없이 묵묵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지원은 그런 우엽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을 퍼내던 일을 잠시 멈추고 우엽에게 다가가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우엽의 이마에 맺힌 땀도 닦아 주었다. 지원의 행동에 흠칫 놀란 우엽이 고장 난 듯 갑자기 삽질을 멈추었다. 무안해진 지원은 어색해하며 손을 얼른 치웠다. 우엽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반대편 이마를 지원에게 갖다 대면 특유의 가느다란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이쪽도 닦아줘.”
자신을 보며 해맑게 웃는 우엽의 모습에 지원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 자식이 언제 이렇게 컸지?’ 우엽에게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던 지원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웃고 있는 우엽의 얼굴에 수건을 던졌다. 그러곤 우엽이 들고 있던 삽을 억지로 빼앗으며 말했다.
“야, 이거 내가 한번 해볼게. 너 힘드니까 잠깐만 쉬고 있어.”
“어? 이거 엄청 힘든데?”
“나도 힘세거든. 너 같은 건 한주먹거리도 안됨.”
지원은 호기롭게 삽을 쥐었지만, 우엽이 할 땐 쉬워 보이던 삽질이 만만치 않았다. 지원이 삽질을 하는 건지, 삽에 지원이가 끌려다닌 건지…. 우엽은 그런 지원이 웃기면서도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한편 지원은 ‘말이 1m이지, 땅 1m 파기가 쉽지 않구나’ 하며 속으로 꿍얼거리곤 영화 속 주인공을 생매장하겠다며 땅을 파던 조폭들의 노고에 새삼 감탄했다. 그러다 삽 끝이 무언가에 탁하고 걸리더니 지원의 손이 그대로 삽자루에서 미끄러졌다.
“으악!”
“괜찮아?! 어디 손 좀 봐봐.”
장갑을 끼지 않았던 탓에 지원의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놀라 지원의 손을 덥석 잡아 상처를 살피던 우엽은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네’라고 중얼거리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소독약과 상처 연고, 밴드를 꺼내오는 우엽을 보며 지원이 물었다.
“뭐야? 너 이런 것도 챙겨 다녀?”
“야, 기억 안 나? 넌 어렸을 때부터 맨날 넘어지고 깨지고 다녀서 내가 쫓아다니면서 밴드 붙여준 거?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다. 아무튼 계집애가 칠칠맞지 못하게….”
“맞다. 내가 다치면 이우엽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서 아프지 말라고 밴드 붙여줬었네.”
지원은 잊고 있었던 옛 기억에 웃음이 났다. 우엽은 늘 그랬듯 지원의 상처를 소독하고 야무지게 연고를 바른 뒤 반듯하게 밴드도 붙여주었다.
“야, 너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있어.”
자상한 행동과 달리 우엽은 반대로 퉁명스럽게 지원에게 말했다. 지원은 미안한 마음에 “대신 실험이랑 보고서는 내가 더 열심히 할게.”라고 작게 웅얼거리곤 돌바닥에 냅다 누워버렸다. 지원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우엽의 손길에 설레었다. 지원은 설레서 울렁거리는 그러나 우엽에겐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을 얼른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엽은 다시 삽질에 열중했다. 힐끗 보니 지원은 돌바닥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저기 저러고 있으면 등 아플 텐데…’ 우엽은 그런 지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사실 그런 지원의 꾸밈없는 모습들은 우엽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야, 한지원. 내가 너 괴롭혀서 그동안 나 싫어한 거 다 알아. 근데…”
우엽이 지원을 향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던 찰나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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