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기억이 만든 크리스마스

by 이유나





2038년 12월, 크리스마스 며칠 전





짙은 녹색 코트를 입은 남자.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코트가 색이 바랬는지 잘 모를 정도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인해 약간은 굳은 표정. 시간은 저녁 7시 40분.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영업시간은 저녁 8시까지였다. 망설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좀 더 빨리 올 수 있었을 텐데. 설마 벌써 문을 닫은 건 아니겠지? 남자는 조금 조바심이 난다. 조금 더 빨리 걷자 생각하지만 엊그제부터 내린 함박눈으로 바닥이 만만치 않다. 여기서 최대한 빠르게 일을 보고 집으로 가면 될 거야. 해외 출장 갔던 리리가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겠지? 주머니에 찔렀던 손을 슬그머니 빼는 남자. 이제 가게가 코앞이다.


오래된 나무 문을 밀고 가게로 들어선 남자. 카운터에 사람이 없다. 괜히 헛기침 소리를 내본다. 두세 번 냈을까. 가게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사람, 유튜브에서 본 그대로다. 40대 중반의 빨간 머리 여자. 유튜브에서는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영상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안경이 없다. 그래서일까. 영상보다는 좀 더 부드러워 보여 남자는 안심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 올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 물건 팔러 오셨구나."

"..."

"아니 그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찾으러 오시기도 하거든요"

"그렇습니까"

대화가 잠시 끊어진 사이 빨간 머리 여자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자자 손님 일단 이쪽으로 앉으세요. 지금 사실 제가 문 닫을 시간이긴 한데. 손님 보니까 오늘 큰맘 먹고 오신 것 같은 티가 팍팍 나셔서 제가 오늘은 문 천천히 닫죠 뭐. 아, 차 한 잔 드릴까요? 어떤 거 드릴까요. 매실? 둥굴레? 아니다. 대추차 어떠세요. 대추차가 기억력에 좋거든요. 이왕이면 우리 선명하게 뽑아내면 손님도 좋고 저도 좋고 하니까요. 어떠세요?"

"네 뭐 그럼 부탁합니다."

"잠시 앉아 계세요. 금방 내 올게요."

빨간 머리 여자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정수기에서 물 따르는 소리가 들린다. 졸졸졸. 작은 쟁반에 머그컵 하나를 들고 나오는 여자. 남자는 여자가 권한 대추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남자의 목에서 넘겨진 액체가 온몸으로 뜨겁게 퍼진다. 끝에 이르러서는 단맛까지 살짝 느껴진다. 그래, 그날도 이렇게 뜨겁고... 뜨겁고.. 달았지.



"자 시작해 볼까요? 어차피 손님이 마지막이라서 천천히 하셔도 돼요. 최대한 집중해서. 아셨죠? 일단, 이거부터 작성 좀 부탁드릴게요."

여자에게 건네받은 종이에는 몇 가지 질문사항이 적혀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남자는 힐끔 여자를 쳐다봤다.



"아, 꼭 써야 하냐고 물어보시려는 거죠? 네, 맞아요. 아무래도 저희가 확보하는 영상이 실제랑 좀 차이가 있을 수 있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저희는 무조건 100% 실제로 일어난 일만, 더도 덜도 없이 딱 있는 그대로의 그 경험만 취급해서요. 그리고 사실 그게 제일 가치가 높고요. 이해하시죠? 아, 너무 부담 갖진 마세요. 이렇게 적어주신 걸로 1차 비교를 하긴 하는데 거의 다 비슷하게 나오세요. 그냥 이 종이는, 거름망! 거름망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되세요. 오케이?"

여자 얼굴에 없던 안경이 생겼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손에 쥔 펜으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이브, 포시즌스 호텔 27층. 리리와 결혼 후 맞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 우리는 아주 거침없었다... 밤은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글을 적어나가는 남자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리워하면서 아쉬워하는. 눈을 찡그리기도 눈을 짧게 감기도.



"아, 손님 표정을 보니까 아주 찐이네요. 찐! 값을 높이 쳐드릴 수 있겠어요. 요즘 안 그래도 연말이라 그런가 이런 류를 원하는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자! 이제 어느 정도 적으셨으니까 이쪽으로 오시면 기계 작동법 알려드릴게요."



이번엔 남자가 앉은 채로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지금이 8시 30분. 이제 10분 정도 있으면 그날의 내 기억은 영영 사라지는 건가? 그날의 그 느낌마저도? 남자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유튜브 후기 수십 개를 찾아봤다. 정말 아예 없었던 일이었다는 것처럼 모조리 사라진다고 말했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그 대가로 큰 수익을 올렸다. 내 기억, 내 추억을 팔고 얻은 수익.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장기이식이 소중한 생명 여럿을 살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고 하니까. 나도 이걸 판 돈으로 리리에게 소중한 선물을 해 줄 생각이다. 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녀에게. 그러기 위해서는 그날의 내 기억이 누군가에게 팔려야 한다. 누군가에게... 아니, 잠깐만.



"아, 저 질문이 있는데."

"뭘까요 손님?"

"제 기억이 온전히 팔리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러니까.. 저 말고 나오는 사람도 그대로요?"

"아, 걱정 마세요. 개인형상유출방지법 제35조에 따라서 등장인물의 얼굴은 그대로 나갈 수가 없어요. 낙찰자가 원하는 사람의 얼굴로 바뀐답니다. 물론 손님 얼굴도 낙찰자 얼굴로 바뀌고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걸리는 시간은 2분 정도니까 잠깐 누웠다 일어난다 생각하시면 되시고요. 아셨죠?"



여자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서니 한쪽 구석에 보라색 캡슐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눈으로 캡슐을 훑어보는 동안 여자는 조작방법을 읊는다. 듣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 내가 캡슐에 들어가 누우면 몇 초 후 자동으로 뚜껑이 닫힌다. 캡슐 안에 있는 검은색 버튼을 누르면 센서 달린 문어발 같은 게 수십 개 튀어나와 내 머리에 달라붙겠지. 그리고 마지막 빨간 버튼을 누르면 빨려 나간다. 내 기억이.



남자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래, 그냥 해치워버리자. 추억은 또 만들면 되지, 연연하지 말자. 질끈 눈을 감고 캡슐에 누웠다. 몇 초 후 캡슐 뚜껑이 아주 천천히 닫혔다. 잘 닫힌 걸 확인한 여자가 뚜껑을 탕탕 두드린다.

"마음 편히 먹으세요! 안 그럼 오류 나요!"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어발이 튀어나왔다. 내 머리에 닿은 촉감. 차갑다. 차갑지만 그 한가운데부터 뜨거운 게 느껴졌다. 예열하듯 위잉 위잉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눈을 꼭 감았다. 하나, 둘, 셋. 거기까지였다. 기억나는 건.



"손님? 저기요! 손님! 눈 떠 보세요"

이제 겨우 실눈을 뜬 남자에게 여자는 거침없었다.

"손님, 이거 언제 구매하신 거예요?"

여자는 태블릿에 나오는 영상을 남자에게 들이밀었다. 방금 전까지 남자의 머릿속에 있던 영상을.

"...?"

"아 정말 바빠 죽겠는데. 이래서 워크인은 안 된다니까. 검증이 안돼 검증이"

"그게 무슨 말이죠? 구매라니요, 이 영상은 또 뭡니까"

남자는 열린 캡슐 뚜껑 뒤로 보이는 밝은 조명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여자의 말에 계속 찌푸리고 있기가 애매했다.



"설마 했는데. 손님 그 기억, 가짜예요. 아니 벌써 삭제됐으니까 모르시겠지만, 어쨌든 그거 진짜 아니라고요. 모르셨어요? 지금 재작년 크리스마스 기억을 저한테 파셨거든요. 근데 여기 보세요, 여기. 손님의 영상 구매일 보이세요? 작년 2월. 호주에서 구매하셨네요? 근데 이게 손님한테 처음 팔린 것도 아니네요. 떠도는 영상 짜깁기해서 재탕 삼탕 우려먹은 영상이라고요. 지금 여기 보시면, 팔린 날짜들 보이시죠! "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무얼까. 남자는 생각했다. 호주? 영상? 짜깁기? 그럼 내가 사기라도 당했다는 말인가? 그럼 리리는? 우린 분명 재작년에 결혼했는데?



"손님, 제가 대충 들여다보니까 이게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고요. 아마 처음 구매하시면서 구독서비스에 가입되신 것 같네요? 그러니까 그 후로 쭉, 한 마디로 기억주입을 통해 결혼을 하셨고 부부생활도 해오셨고 잘하면 이제 아이도 낳으시려고 하셨겠어요. 아, 물론 실체는 없고 모든 건 기억으로만 말이죠. 뭐 쫌 안타까운 경우이신데 사실 그런 분들도 꽤 계시는 편이긴 해요"

남자는 재작년 크리스마스의 이브, 그날의 몇 시간의 기억만 삭제되었을 뿐 그 전후 기억은 멀쩡했다. 여자의 말을 조합해 보면 4년 전 리리와의 만남부터 결혼, 그 후의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 아니 사실이 아니라기보다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는 말. 그 말이다. 갑자기 오한이 느껴진다. 오늘 리리가 집에 온다고 했는데. 그것만 기다려왔는데.


"제 머리에서 빠져나간 기억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남자는 가게에서 나갈 채비를 마치고 여자에게 물었다. 소독용 물티슈를 몇 장 빼서 캡슐을 닦던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 기억은 일단 저희가 보관하고요, 그 영상 안에서 훼손되지 않은 부분이 있나 찾아서 그 부분만큼만 구매하는 걸로 그렇게 처리가 될 거예요. 결과는 한 이삼일 안에 나올 텐데 연말 꼈으니까 넉넉히 일주일 정도 기다려주세요. 아 그리고 지금 저 연장근무 한 것까지 아마 추가되실 거예요"

남자는 연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서 쓴 맛이 올라오는 듯했다. 녹색코트를 괜스레 한 번 여미고 가게 문을 밀었다. 그 순간,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저 손님! 이런 거 말고, 그냥 평범한 거. 그런 거 가져오셔도 돼요. 그런 것도 팔리거든요. 아니 어쩌면 그런 게 더 귀해요. 음, 예를 들면 어릴 때 길에서 엄마 손을 놓쳤다가 다시 잡은 기억이라든지,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도와줬다던지, 한 겨울 퇴근길 가슴팍에 붕어빵 봉지를 넣고 식을까 봐 집으로 뛰어온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라든지요. 그래, 붕어빵 이런 건 진짜 귀하거든요!"



여자의 말이 마치길 기다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마치지 않길 바랐던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장면들의 레퍼토리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했다.

가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훅 몰아쳤다. 남자는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몇 개는 떠오르겠지. 완벽하진 않아도 외롭지 않았던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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