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호, 702호… 여기다. 703호.”
한가한 일요일 낮, 나는 할머니 병문안을 왔다. 아흔을 훌쩍 넘긴 황귀임 여사. 이제는 집보다 병원에 머무는 날이 더 많은 그녀. 6인실 병실은 생각보다 널찍했다. 큰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환자와 보호자가 뒤섞여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는 분위기였다. 할머니 침대는 우측에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침대 중 가운데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왔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셨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할머니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은주요.”
잠시 후 할머니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으으으… 우우으…”
틀니와 기력이 빠진 입에서 나오기는 소리기에
전부 뭉개져 있었지만
내 귀에는 수십 년 들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들렸다.
‘은주 왔나. 어서 와라.’
침대 옆 사물함 위에는 두꺼운 스프링이 달린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네 명의 아들들이 돌아가며 쓰는 일지.
시간 단위로 할머니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효자들의 흔적이었다.
나는 괜히 한 번 노트를 쓸어보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할머니가 힘겹게 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간절히 전하려 했다.
“으어어… 빠아아…”
“할머니, 뭐라고요?”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 순간, 옆 침대 여자가 말했다.
“아~ 할머니. 손녀한테 빵 주라고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근데 어떡하지?
그거 어제 할머니가 우리 보고 먹으라고 해서 우리가 다 먹었는데?
손녀 줄 게 없네.”
병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뭐지?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묘하게 다들 한마음 같았다.
할머니는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같은 소리를 냈다.
“으으으…”
나는 천천히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앉은 채로 조금 전 그 젊은 여자를 살폈다.
오른팔에 한 깁스를 제외하면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이는 그녀,
젊고
건강했고
웃음이 많았다.
풍성한 검은 머리칼을 동글게 말아 올린 그녀는
이 병실의 분위기메이커였다.
나는 노트를 펼쳤다.
혹시?
6월 9일. 2인실 입원.
6월 10일. 각종 검사 및 결과 기록.
6월 11일. 고향 조카들 방문. 특이사항 없음.
그리고.
6월 12일.
큰손녀 방문. 빵과 음료 다수 지참.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6월 13일, 바로 어제.
6인실 이동. 빵 분실.
노트를 덮었다.
고개를 들자, 그 여자가 보였다.
너로구나.
그녀는
환자인지 보호자인지 모를 몸놀림으로
병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약 30분 뒤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
그녀가 서 있다.
우리는 시간차를 두고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녀는 1층을 눌렀고, 나는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내려가는 동안, 나는 그녀를 훑어봤다.
많아야 이십 대 후반.
가벼운 몸짓, 경쾌한 분위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다.
그녀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나도 뒤따랐다.
정원 쪽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야.”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야, 거기 너.”
그제야 그녀가 돌아봤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는 다가갔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요.”
“우리 할머니 말, 어떻게 알아들었어?”
“네?”
“아니 그렇잖아.
발음 다 뭉개지고 ‘으’밖에 안 들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알아들었냐고.”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뭐래, 미친년이.”
“말해보라고.”
“와, 이년 진짜 또라이네.”
그녀가 돌아섰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똥머리를 움켜잡았다.
좌우로 흔들기 좋은
한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였다.
그녀는 악 소리를 내며 머리 쪽으로 두 손을 갔다 댔다.
남들이 보기엔 우스꽝스럽고 기묘한 장면이었겠지만
우린 꽤나 진지했다.
아니, 나만 진지했다.
상상이었으니까.
"지금 뭐라고 했어요?"
잠깐의 정적.
내가 말했다.
“잘 부탁한다고요.”
“네?”
“우리 할머니요.”
그녀는 잠깐 나를 보더니 의미 없이 머리를 한 번 매만졌다.
“아… 네. 뭐.”
그녀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일정한 리듬으로 경쾌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똥머리.
나는 그걸 붙잡지 않았다.
할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똥머리를 그냥 두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