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심드렁히 도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지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사람들을 보는지 아니면 생각을 하는지 종이컵만 자근거렸다. 커피를 조금 입에 담고 종이컵을 잡으려다 주머니 속에 있던 뭔가가 손에 쓸려 바닥에 떨어졌다. 내 주머니에서 무언가 흘린 기척에 흠칫 놀라 바닥을 봤다. 구겨진 하얀 휴지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가을바람 심술에 맥없이 바닥을 뒹구는 하찮은 휴지를 보다가 잠시 고민하다가 몇 걸음 내디뎌 휴지를 집어 들었다. 구깃 해져 하찮은 종이가루를 날리며 삭고 있는 휴지를 펴서 내가 무엇을 했나 잠시 살폈다. 별다른 얼룩이나 물기는 없고, 단지 몇 겹으로 접어 무언가의 매끄러운 표면을 닦은 듯, 내 지문만큼 휴지 한 면이 볼록하다. 모니터에 묻은 지문을 닦은 모양이다.
휴지를 탐색하다가 다시 한 손으로 제멋대로 동그랗게 뭉쳐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도록 주머니 속 깊이. 괜한 콧숨을 길게 내쉬고 믹스커피가 올려져 있는 저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항상 저곳에 서 있었구나!"
뭔가 커다란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항상 건들거리며 거리를 내려다보는 내가 보였다.
항상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맞은편에 나지막한 건물 외벽의 플라나리아를 닮은 거뭇한 얼룩, 라바콘처럼 뾰족한 성당의 남색 지붕, 큼지막한 간판의 네온관 하나가 고장 난 고깃집.... 항상 같은 광경만 보고 있었다.
커피를 들고 위로 빨려 올라가는 빨간 숫자를 바라보다가 드르륵 둔탁한 은빛 문이 열리면 항상 같은 보폭으로 환한 열린 공간으로 나왔다. 시간이 되면 조잡한 문을 열고 나와 웃기지도 않는 날갯짓을 하는 낡은 괘종시계에 사는 뻐꾸기처럼 쳇바퀴를 도는 것 같다.
"나는 왜 항상 같은 자리에만 있었을까?"
덩그러니 놓여 차갑게 식고 있는 커피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단지 몇 걸음 거리였지만 이곳은 저곳과 달랐다. 플라나리아는 몇 쌍이나 더 있었고, 성당의 첨탑은 한쪽 기와가 =뭉개져 있었다. 마치 자동차가 밟고 간 라바콘처럼. 그리고 고깃집 간판의 네온관이 고장 난 이유를 알았다. 간판 옆면이 뻥 뚫려 있었다. 비가 들어가서 고장 났나 보다.
단지 몇 걸음이었다. 하지만 단 몇 걸음으로 난 알게 되었다. 나는 고착화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없는 흔하디 흔한 구태의연한, 내방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책에서도 강조하는 단어가 지닌 힘을 실감했다. 행동과 변화. 이제는 심드렁히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지루해진 풍경을 굳이 참을 필요는 없다. 그 지루한 풍경을 보며 얼마나 한숨을 쉬었던가.
"언제쯤이면 나는...."
난 항상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단 몇 걸음 아니 한 걸음만 움직여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