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가만히 감았다. 귓가로 침묵이 흘러내린다. 고요에 먹혀 둔해진 귀가 아무런 소리도 찾지 못하고 있다. 가끔씩 들리던 발자국 소리나 개 짖는 소리,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헛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머릿속을 어지럽게 분탕질하던 잡생각마저 깊숙이 가라앉아 그저 고요하다. 변덕으로 한순간에 흙탕물을 만들 수 있지만 괜히 그러기는 싫다. 괴괴한 침묵에 외로움이 생각날 법도 한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결이 부드럽고 살갑게 느껴진다. 마치 따뜻한 이불속에서 만족스러운 졸음을 즐기는 것처럼. 초저녁에는 오토바이 소리, 사람들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내 마음마저 소란스러웠는데. 평화로운 이 시간이 좋다. 내 몸을 결박하던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멍에를 벗어버린 듯 홀가분하다.
귓가로 흐르는 살없는 침묵 사이로 은밀한 웅웅거림이 끼어든다. 평화롭게 흘러가던 개울물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자그마한 돌덩이처럼. 하지만 재미없는 고요에 싫증이 난 귀가 얌전히 있던 정신을 불러온다. 신이 나서 은밀한 녀석을 추리하더니 곧 정체를 밝혀냈다. 얼마 전에 바꾼 컴퓨터의 팬소리였다. 한동안 삐그덕 대며 거슬리는 소음을 내서 새로 바꿨더랬다. 평상시에는 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런 숨바꼭질 잘하던 녀석인데, 이번에 술래에게 걸렸다.
시끄러운 잡음과 노랫소리 그리고 내 정신머리에 익숙해진 녀석이 갑자기 찾아온 여름날의 소나기 같은 고요에 흠뻑 젖었다. 녀석은 고요를 뚝뚝 흘리며 겨우 찾은 가느다란 햇살 같은 팬소리에 갑자기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초원의 게으른 소의 하품 같은 나직한 소리로는 부족했는데 집요하게 고요한 방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나지막이 잡아끄는 소리를 뒤로 내 방 곳곳을 기웃거렸지만 헛헛한 하늘처럼 무엇 하나 걸리는 게 없다. 경계를 하며 꼬리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가 되어 민감히 반응하던 기분이 다시 평화로워졌다. 꼬리를 세운 녀석 때문에 내게서 한걸음 물러나 있던 침묵이 다시 포근하게 내 주위를 감쌌다.
눈을 감고 침묵을 가만히 즐기자니 기분이 나른해진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우직한 소나무 숲을 끼고도는 쾌활한 가을바람을 그려보았다. 쾌활하지만 절대 개구쟁이는 아닌, 그저 검푸른 졸음에 빠져 있는 소나무 숲을 좀 더 평화롭게 하는 그런 살가운 바람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