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공유되길 바라는 비 이야기

by 나린

어린 시절엔, 예고도 없이 내리는 비가 유난히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종이처럼 얇은 옷가지에 빗 물이 스며들면 살갗이 으슬으슬 떨리고, 젖은 운동화에서는 축축한 소리가 발걸음마다 울렸다. 그럴 때면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 나와 있던 친구들의 엄마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엄마의 품으로 뛰어드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혼자 비를 쫄딱 맞고 걸어야 했다. 비 냄새와 젖은 머리카락, 무거워진 가방 끈의 감촉까지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좋은 추억’보단 ‘피하고 싶은 기억’으로 남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젖은 옷을 허겁지겁 벗어 빨래통에 넣고,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 시간들. 따뜻함보다는 어쩐지 서글픔이 먼저 스며들었다. 그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 빗속을 걷는 낭만을 이야기할 때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살짝 거리가 생긴다.


그렇다고 비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한옥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때면 마음이 잠시 고요해진다. 낮게 드리운 회색 하늘 아래, 처마 끝에 매달린 빗물이 일정한 리듬으로 떨어질 때면 세상의 속도가 잠시 멈춘 듯한 착각이 든다. 그건 어릴 적 하굣길의 억울한 기억과는 다른, 조용하고 따뜻한 시간이다. 어쩌면 나는 ‘빗속의 낭만’은 몰라도 ‘빗소리의 위로’는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비가 오는 날이면, 굳이 밖에 나가지 않는다.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옆에 두고,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천천히 듣는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친구의 목소리처럼 낯설지 않다. 흙과 나무, 바람과 비가 어우러진 그 소리는 나를 다시 어린 시절의 어느 오후로 데려간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나는 우산 없이도, 젖은 옷 없이도 그 비를 ‘내 속도’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종종 ‘비와 함께한 추억’을 이야기한다. 비 오는 날 첫사랑과 걸었던 거리, 빗속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 파전과 막걸리가 어우러진 저녁 식탁의 풍경….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한다. “나에겐 어떤 비에 대한 기억이 있을까?” 비록 낭만은 아니었지만, 나의 기억도 결국 나를 만든 한 조각이다.


이렇게 글로 꺼내 놓고 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 따뜻해진다. 마치 오랫동안 젖은 채로 구석에 걸어두었던 우산을 꺼내 햇볕 아래에 말린 느낌이라고 할까.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비 오는 날이 참 좋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지만, 이렇게 기억을 글로 풀어내는 이 시간이 참 좋다. 나와는 다른 빗속의 추억을 가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