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의 온도, 그날의 바람이 이끄는 여행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늘 무계획을 앞세운다. 목적지도 일정도 미리 정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 날 아침,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길을 나선다. 여행이란 결국 내 안의 방향을 따라가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침반 대신 감정이 이끄는 대로, 목적지 대신 하루의 기분을 지도 삼아 걷는 것. 그래서 나의 여행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지만, 그만큼 생생하고 설레는 일이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던 어느 여름, 우리는 그런 즉흥 여행을 했었다. 아들 둘을 둔 지인네와 아들 넷을 데리고 휴가 계획도, 숙소 예약도 없이 강원도로 향했다. 자동차 창문을 열자 바람이 밀려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따라 흘렀다. 처음 도착한 곳이 정동진이었다. 새벽녘 바다에서 맞이한 일출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해가 바다 위로 솟아오르며 세상을 밝히는 순간, 아이들은 마치 세상을 처음 본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굽이 굽이 미시령 고개를 넘고, 양 떼목장에도 들렀다. 하얀 양들이 구름처럼 흩어져 있던 초원 위에서 아이들은 풀잎을 손에 쥐고 양들에게 내밀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바람이 불고, 해가 기울고, 아이들의 웃음이 들판에 길게 번지던 그 오후. 그날의 공기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따뜻하게 머문다.
그 여행에는 화려한 호텔도, 유명 맛집도 없었다. 대신 소박한 민박집의 이불 냄새와, 길가에서 사 먹은 옥수수의 달콤한 향, 그리고 하루 종일 차 안에서 함께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계획이 없었기에 우리는 모든 순간에 마음껏 머물렀다. 시간에 쫓기지 않았고, 일정표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빈칸 속에서 우리는 진짜 여유를 배웠다.
아이들은 훗날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 이국의 도시와 문화를 경험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어디야?”라고 물으면, 여전히 아이들은 “강원도!”라고 대답한다. 그때의 자유로움, 가족이 함께 웃고 달리던 시간, 계획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우연의 선물들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말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된다. 완벽한 여행은 계획이 아니라 느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배운 셈이니까.
지금도 나는 가끔 그런 여행을 꿈꾼다. 어느 날 문득, 커피 한 잔을 마시다 창밖의 하늘이 예뻐 보이면 그냥 떠나고 싶다. 그날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여행의 본질은 어쩌면 ‘내가 나를 다시 만나는 시간’ 일지도 모른다. 계획이 사라진 자리에는 여백이 생기고, 여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금’이라는 순간을 온전히 느낀다.
강원도의 그 여름처럼.
무계획이었기에 완벽했던, 그때 그 여행처럼.
짐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