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여러분의 ‘아저씨’는 어디에 있나요? (1)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

by 백상민

글을 시작하며

이번 겨울 최인호 작가의 단편소설, 「타인의 방」 텍스트를 처음 만났다. 소설은 1970년대 경제 개발로 등장한 아파트가 도시 사회에 일으킨 인간 소외 현상을 ‘사물화(事物化)’의 개념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타인의 방」에는 ‘그’로 표현되는 주인공과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굉장히 무기력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집에서 아내가 남긴 쪽지를 발견한다. 아내는 잠시 친정에 다녀온다고 했고, 그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그런 일상 속에서 그는 결국 자신이 사물화되고 있다고 느끼고, 돌아온 아내는 그를 그저 새로운 가구라고 여긴 채 다시 쪽지를 남기고 외출한다. 그의 사물화를 통해 작가는 소외가 인간의 생명력을 빼앗아 버린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리, 즉, 인간 소외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쪽지를 적고 다시 방을 나서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반복되는 인간 소외 현상을 나타냈다.

소설이 출간된 지 50년 정도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읽고 여전히 씁쓸하고 암울한 감정을 느꼈다. 흔히 사회화의 동물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겉으로는 여전히 서로 소통하며 정(情)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물건 취급하며 서로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가령 나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과거에는 이웃들과 가까이 지내며, 서로 왕래가 잦았다. 어머니가 “음식을 많이 했으니, 이웃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오라”고 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우연히 동네 마트에서 만난 위층 아주머니는 나를 반가워하며 음료수를 사주시곤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장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이를 보면, 이런 인간 소외 현상이 2022년 현재 극에 달한다는 것을 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물화(事物化), 인간이 사물이 된다는 것. 서로를 향한 감정이 메말라가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그래도 갈수록 서로에게 무심해지고 감정이 차가워지는 우리 사회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해주는 드라마가 여기 있다. 바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다. 작품은 서로를 향한 감정이 무뎌지고 있는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준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단절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희망을 느낄 수 있다. 지금부터 더 늦기 전 우리만의 ‘인간다움’을 찾기 위해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이 작품은 2018년 3월 21일부터 같은 해 5월 17일까지 방영한 16부작 tvN 수목 드라마이다. 배우 이선균과 이지은이 주연 배우로 연기했으며, 김원석 PD가 연출을 맡고, 박해영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2018년 제2회 더 서울 어워즈 드라마 부문 대상, 2019년 제55회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및 극본상, 2019년 제2회 한국극예술학회 올해의 작품 TV 드라마 부문 수상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tvN 대표 드라마이다. 소설 「연금술사(1988)」를 집필한 브라질의 유명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완벽한 묘사”가 이루어졌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현재는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심인물인 이지안은 사채를 갚으며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계약직으로 건설회사 삼안E&C에 입사한 지안은 회사 대표 도준영의 사주로 회사 부장이었던 박동훈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동훈을 도청하기 시작한 지안은 24시간 동안 동훈의 일상을 듣게 된다. 그러다 지안은 삶의 무게에 억눌려있으나 속은 누구보다 따뜻한 동훈으로부터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결국, 지안과 동훈은 서로에게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서로를 위로하기에 이른다. 처음으로 인생의 따뜻함을 알게 된 것이다. 이렇듯 차갑게 시작했던 드라마는 지안과 동훈의 ‘유대감’이 생성되는 과정을 그려내며 따뜻하게 마무리된다. 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인간다움을 지안과 동훈을 통해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르면 잘못된 사회

대기업 건설회사의 한 사무실,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눈에 띈다. 어떤 이유로 선글라스를 끼고 출근했을까. 사무실 동료들이 그녀를 한 번씩 쳐다보지만, 이내 관심을 끈다.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바로 삼안E&C의 계약직 이지안이다. 지안에게는 사실 2천만 원의 사채가 있다.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홀로 부양하는 ‘소녀 가장’ 지안은 낮에는 회사에서 영수증을 붙이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면, 돈을 독촉하며 폭행을 일삼는 사채업자 광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로 인해 얼굴은 항상 멍으로 가득했지만, 일을 쉴 수가 없으므로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서라도 출근을 강행한다.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딱한 사정을 지닌 지안, 그러나 사무실 직원들은 지안의 속사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지안에게 무관심하며, 자신들과 다른 ‘계약직’이라며 선을 긋는다.

"재 뭐니?"

1화에서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지안의 모습이 등장한다. 여기서 선글라스는 하나의 벽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경제 개발로 인해 등장한 아파트는 우리가 공유하던 공간적인 것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즉, 아파트라는 공간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벽을 만들어 서로를 분리했고, 이로 인해 인간 소외 현상이 심화 되었다. 더욱이 21세기에 와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전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물리적인 공간에 또 하나의 벽을 만들었다. 인터넷 속 공간에서는 상대방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잣대인 표정, 억양 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지안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지안의 선글라스 안에 있는 멍과 상처는 지안의 내면, 즉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글라스의 안쪽 지안의 모습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선글라스 밖에 있는 지안의 모습만을 보고 그녀를 판단한다.

또한, 1화에는 지안이 동료들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삼안E&C 안전진단 3팀 부장인 동훈은 영문도 모른 채 뇌물이 담긴 퀵을 받게 된다. 당황한 그를 본 유일한 목격자는 지안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서랍에 넣어둔 뇌물은 사라져있었고, 지안 역시 출근을 하지 않았다. 동훈은 지안을 의심하며 지안을 찾기 위해 직원들에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묻는다. 그러나 지안과 같은 공간에서 수개월을 일했던 동료들 중 어떤 사람도 그녀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


“이지안 핸드폰 번호 아는 사람 없어? 아무도?”

“너희 이지안 번호 몰라?”


그들은 지안이 출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직장 동료들이 지안을 그저 영수증 붙이고 인쇄물을 출력하는 계약직으로 여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안은 그들로부터 ‘사물화(事物化)’되고 있던 것이다. 즉, 드라마는 일과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직장 동료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한다는 장면을 빗대어, 서로에게 무심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는, 소외로 가득한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것 같다.

10화의 에피소드 역시 비슷한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안은 사실 6년 전 사채업자였던 광일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이다. 광일의 아버지는 지안의 집으로 들어와서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안의 할머니를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이대로면 자신과 자신의 할머니가 위험할 것으로 판단했던 지안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우발적으로 광일의 아버지를 칼로 찌르는 살인을 저질렀다. 비록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살인 뒤에 이와 같은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안의 사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그들에게는 그저 지안이 살인자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사람 죽인 거 알고도 친할 사람 있을까. 멋모르고 친했던 사람들도 내가 어떤 애인지 알고 나면 갈등하는 눈빛이 보이던데, ‘어떻게 멀어져야 되나’하고.”

사채업자 광일에게 폭행을 당한 후,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고 오는 지안에게 동훈은 “맞고 살지는 말자”며, 동네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지안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 그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위의 대사는 이러한 동훈의 말을 듣고 지안이 한 대답이다. 이미 사람들은 지안을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그녀로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지안의 대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지안의 모습이 그들의 언행으로부터 받은 상처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드라마 속 ‘살인자’라는 지안의 상황은 매우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는 연출자가 현실에서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유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살인자’ 지안처럼 남들에 의해 구분되고, 또 소외되고 있다.

이처럼 1화와 10화, 두 에피소드는 인간 소외가 만연한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자신’의 외부에 놓인 존재들을 대상화하며, 자신만의 기준점 아래에서 그들을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타자를 배척하며 ‘괴물’로 여긴다. 우리가 많이 실수하는 표현 중에 하나가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하는 경우이다. ‘Different’의 의미로 ‘다르다’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틀리다’고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러나 두 단어는 엄연히 다르다. ‘틀리다’는 옳지 않거나 잘못된 경우를 이르는 말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을 때 사용된다. 그러나 ‘다르다’는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는 경우에 쓰인다. 즉, ‘다르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실수가 우리 사회에 내재된 사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배척하는 사회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오른손과 왼손을 구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외다’는 ‘잘못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반면에 오른손은 ‘옳은’손에서 맞춤법이 변형된 말로,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오른손잡이가 압도적으로 많던 과거에는 자신들과 다른 손을 사용하는 왼손잡이들이 ‘잘못된 손’을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계속해서 선을 긋고 있었다. 즉, 지안과 같은 소외당하는 대상, ‘괴물’은 결국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타자와 자신을 선 긋는 행위는 결국 서로를 향한 감정을 메마르게 이끌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감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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