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TOPIK(한국어능력시험)에서 ‘쓰기’ 시험을 막 마쳤다. 감독관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라고 했고 난 억울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거의 절망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토픽시험, 얕잡아 볼 일이 아니었다.
한국 자막으로 영화를 보고 BBC(영국공영방송)보다 한국 뉴스를 더 청취하는 내가 한국어 능력 시험이 필요했던 이유는 교원 자격증 때문이었다. 보통 대학교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하면 교원 자격증 2급이 자동으로 나오는데 나는 영국시민권자다.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만, 현재 외국인들은 TOPIK 6급 자격증이 있어야 한국어 교원자격증을 신청할 수 있다. TOPIK 시험은 영국에서 일 년에 봄과 가을, 딱 두 번 있다. 지금에 와서 교원 자격증이 뭐가 필요할까 싶다가도 교원자격증이 있으면 영구적인 효력이 있다는 말에 쏠려 작년 12월, 한국어 능력 시험을 신청했다.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나서야 인터넷에서 떠도는 TOPIK 모의고사를 한번 치러봤다. 듣기와 쓰기 과목이 110분, 읽기가 70분. 듣기와 읽기는 별 무리가 없어 보였지만 쓰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주어진 표나 그래프를 읽고 300자로 설명하라는 건 그나마 괜찮은데 마지막 문제인 53번에서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700자로 써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평소 ‘쓰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50분 안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서론, 본론, 결론에 맞춰 700자를 써야 할 뿐만 아니라 원고지 작성 법을 따라 철자와 띄어쓰기를 주의해야 한다는 게 영 맘에 걸렸다.
4월 12일. 드디어 올 것이 왔다. Westminster Kingsway College에서 토픽 시험이 치러졌다. 3층으로 올라가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한국 감독관을 만났다. 그가 3층을 눌렀는데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어, 지하로 내려가네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쩜 한국말을 참 잘하시네요.”
모국어를 잘한다는 칭찬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그냥 살짝 웃어넘겼다. 그날 시험 치러 온 우리 반 학생수만 20명이었고 그런 수험실이 여러 개 있었으니 응시생이 한 100명은 훨씬 넘었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1교시 듣기가 시작되었고 이어 쓰기 시험이 이어졌다. 마지막 문제에서 써야 할 문장을 여분의 페이지에 조리 있게 적고 나서 답안지에 옮기려는데 감독관이 차분하게 말했다.
"10분 남았습니다."
세상에나 10분 만에 700자를 다 쓸 수 있을까. 손가락이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덜덜덜 떨렸다. 맘과 같지 않게 글자들이 원고지 박스 안에서 픽픽 쓰러졌다. 이윽고 시험이 끝났다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라는 감독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했다"
정말 울고 싶었다. 글씨인지 그림인지 모를 모양들이 원고지 안을 채웠지만 삼분의 일정도 밑부분은 백지상태로 답안지를 건네야 했다.
한 달 반이 지나고 나서야 시험 결과가 나왔다. 토픽은 실패나 합격으로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급수로 정해진다. 내 성적표는 6급이었다. 6급이면 한국어 최고급 수준. 다행히 이번 8월에 한국어 교원 자격증 2급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표현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 성적이 괜찮게 나와서 솔직히 놀랐다. 태어나서 한평생 한국말을 썼던 나에게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던 토픽. 막상 시험을 보고 나니 더 높은 등급을 위해 내 옆에서 시험 봤던 외국인 수험생들이 정말 대단해 보인다. 그들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앞으로 한국어 능력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어떻게 조언해 줘야 할지 조금 감이 온 것 같다. 내가 경험한 것만큼 최고의 가르침은 없을 테니까. 애가 탔던 그때의 초조함과 간절함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나의 '한국어능력시험' 성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