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침몰하는 한국에서 살아남기 #19

EP 19 : 정치 - 분열되는 정치, 그리고 개인

by 이슬비

CHAPTER 1 : 재앙 편 / Part 2 - 4



[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시대 ]


2026년 1월 4일,

믿기 힘든 뉴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미국이 특수부대를 투입해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자국으로 강제 이송하고 있다는 발표였다.


국제법? 주권 침해? 외교적 절차?

그런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 사건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메시지’다.


세계는 더 이상

대화와 타협으로 굴러가는 '지구촌'이 아니다.

지금 국제 질서를 움직이는 원리는 단순하다.


외교보다 힘이 먼저 등장하는 시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대국들은 최소한의 ‘염치’는 있었다.


뒤로는 힘의 논리를 작동시키더라도,

앞에서는

‘세계 평화’, ‘인권’, ‘국제법 준수’같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다.


평화로운 척,

대화로 해결하려는 척,

최소한의 ‘외교적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가면마저 벗어던졌다.


‘대화→협상→합의’라는 공식은 깨졌다.

이제는 가능하다면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이 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21세기에도 전면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중동은 더 노골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란과 시리아를 향해

국경을 넘어 군사 행동에 나섰고,

국제 사회는 이를 비판했지만

막아내지는 못했다.


세계는 그 장면을 보며 깨달았다.


국경을 지키는 것은

조약서가 아니라 힘이라는 사실을.


이 논리는 군사력에만 그치지 않는다.

경제 역시 철저한 ‘힘의 논리’로 재편되었다.


2025년,

미국이 쏘아 올린 관세 정책을 떠올려 보자.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중국은 물론

동맹국에게까지 높은 관세 장벽을 세웠다.


“우리에게 물건을 팔고 싶으면 더 내라.”

“우리 땅에 공장을 짓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겠다.”


이건 무역이 아니었다.

경제력을 무기로한

명백한 ‘협박’이자 ‘폭력’이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 국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대만의 긴장 역시 마찬가지다.

세련된 외교적 언어보다는

군사적 제스처와 무력 시위가

먼저 튀어나온다.


그리고 2026년 1월,

미국은 마두로 송환을 통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군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주권과 외교의 선은

언제든 넘어설 수 있다는 선언.


그야말로 ‘각자도생’이다.


모든 나라는 이제

가면을 벗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내 나라가 먼저다.”

“목소리를 내고 싶다면 먼저 힘을 가져라.”


외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외교는

힘을 가진 국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진짜 ‘힘의 시대’에 들어섰다.



[ 관용은 죽었다 ]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축복받은

‘성장의 시대’를 살았다.


중산층은 두터웠고,

지갑은 풍요로웠으며,

그 넉넉함이 타인을 이해하는 여유를 만들었다.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했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소수를 포용하는 것이

지성인의 당연한 덕목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축제는 끝났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성장은 둔화되었고,

인플레이션은 일상이 되었으며,

자본주의가 낳은 절망적인 빈부격차는

중산층을 빠르게 붕괴시키고 있다.


내 삶이 벼랑 끝으로 몰리는데,

타인을 포용할 여유가 남아있을 리 없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하다는 것도,

소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따로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 가치들에 대한 '피로감'이

임계점을 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론은 아름답다.

하지만 현실은 따라오지 못한다.

모든 문제를 도덕의 언어로만 재단하지만,

정작 그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포용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내 삶에 걸리는 제약은 늘어난다.


어느 순간부터

소수에 대한 배려는 ‘권유’가 아니라

무조건 따라야 하는 ‘강요’가 되었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혐오자’로 낙인찍히는 세상.

사람들은 지쳐버렸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이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경제적・심리적 여유 자체가 없다.


먹고사는 문제가

다시 생존의 영역으로 추락하자,


대중은 고상한 ‘도덕’ 대신

확실한 ‘실리’를 택했다.


복잡하고 피곤한 ‘포용’ 대신,

단순하고 시원한 ‘배제’를 택했다.


그리고 바로 그 틈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한다.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먹고 자란다.


내 삶이 힘든 이유를 타인에게 돌리고,

누군가를 악마화함으로써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관용은 미덕이 아니다.

지금의 세계에서 그것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이제 ‘다름’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다.

제거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다.



[ 갈등은 돈이 된다 ]


시선을 안으로,

대한민국으로 돌려보자.


여기도 총・칼만 안 들었지,

매일이 전쟁이다.


지역,

세대,

성별,

종교,

민족,

이념.


우리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선을 그어놓고

서로를 물어뜯는다.


가장 무서운 건,

‘대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아니다.

곧바로 ‘틀린’ 사람이 된다.


건강한 비판은 사라지고,

원색적인 비난만이 남았다.


심지어 정당하고 합리적인 비판조차

“그래서 너는 누구 편인데?”

“너는 적이니까, 나를 공격하는 거야”

이런 진영 논리 앞에

힘을 잃고 묻혀버린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싸우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 갈등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지지층 결집을 위해

의도적으로 혐오를 자극한다.


언론인은 클릭 수를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낸다.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는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증오를 배설하고

그 대가로 조회수와 후원을 챙긴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이 모든 혐오를

우리 눈앞으로 끊임없이 배달한다.


분노는 돈이 된다.


그들이 챙기는

수익과 표심 뒤에는

갈기갈기 찢겨진

우리의 마음이 있다.



[ 개인에게 주어진 두 가지 선택 ]


이 아수라장 속에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선택지는 많지 않다.


거대한 혐오 비즈니스 앞에서

우리는 사실상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첫 번째 선택은

‘전사’가 되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말만 듣고,

같은 분노를 공유하며

확증 편향에 더 빠져든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은 흐려지고,

내 편이 건네는 논리에 취해

상대방을 향해 돌을 던진다.


상대는 더 이상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박멸해야할 ‘적’이다.


논리는 필요 없고,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


“저쪽이 틀렸다.”

“저들은 악마다.”


이 단순한 구도가

복잡한 머릿속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확증 편향은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쉬운 진통제다.


우리는 스스로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겠지만,

실상은 혐오 비즈니스의

충실한 연료로 소모될 뿐이다.


그 대가는 분명하다.


분노는 커지고,

타협 능력은 사라지며,

정신은 날카로워지고,

세상은 온통

적들로 둘러싸인 전쟁터가 된다.


두 번째 선택은

‘도피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소음이 괴로운 사람들은

눈과 귀를 닫아버린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자극적인 도파민으로 채운다.


유튜브를 켜고,

넷플릭스를 틀고,

비현실적인 연예인의 여행 브이로그를 보며

현실을 잠시 잊는다.


게임 속 가상 세계로 떠나거나,

15초짜리 쇼츠와 릴스의 쾌락에

자신을 맡긴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결과는 같다.


잠깐은 편해지지만,

현실은 그대로다.


편을 갈라 싸우든,

도파민 속으로 숨어버리든,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차가운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는 더 망가지고,

사회는 더 갈라지며,

그 결과는 언젠가

고스란히 내 삶으로 돌아온다.


결국 우리는

분노하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를 반복한다.


싸우느라 지치거나,

외면하다가 무뎌진다.


그리고 이 두 선택 모두에서

개인은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작아진다.



[ 재앙 편을 마치며 : 그래도 나는 살고 싶다 ]


이것으로


저출산,

초고령화,

연금 및 사회복지,

부채 위기,

제조업의 붕괴,

AI와 로봇 기술,

기후 위기,

그리고 정치까지.


우리를 둘러싼

8가지 재앙에 대한 기록을 마친다.


쓰는 나도 괴로웠고,

읽는 당신도 숨이 막혔을 것이다.


이 거대한 재앙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나 또한

이 재앙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철저하게 무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무력감이 깊어질수록

‘살고 싶다’는 욕구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침몰하는 배를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나만의 구명보트를

만들 수는 있다.


이제 ‘진단’은 끝났다.

본격적인

‘처방’만이 남았다.


돈을 잃지 않고,

건강을 지키며,

무엇보다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정신을 놓지 않고 살아남는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하려 한다.


성공하는 법이 아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도,

하는 방법도 모른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오로지

‘생존하는 법’이다.


살아남아라.


사랑을 찾든,

꿈을 꾸든,

후일을 도모하든.


뭐가 되었든,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다.

‘다음 이야기 2장 : 생존편’에서 계속됩니다.

이전 18화30대, 침몰하는 한국에서 살아남기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