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추억을 먹었던 우리 삼 남매
세상 음식 중 요물 ‘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라면은 실망을 시키지 않는다. 냄새는 또 어떤가. 라면 냄새는 막으래야 막을 수 없는 초고속의 파급력이 있고, 수프를 물에 풀어버리는 순간 삽시간에 집 전체가 라면으로 바뀐다. 삼양라면, 너구리, 짜짜로니 삼총사는 늘 우리 집 수납장에 구비가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되었을 즈음 위로 언니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그 위에 오빠는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유독 먹어도 살이 좀처럼 붙지 않던 오빠는 시간제한 없이 음식을 맞이할 수 있었고, 모리나가 분유로 달련된 언니의 통뼈는 단단해 다부져 보였고 시금치와 카레를 유독 좋아했던 언니는 살집이 제법 있었다. 난 팔다리는 가늘고 길쭉했지만 배만 뽈록 나온 일명 E.T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유독 얼굴 볼살이 있어서 초등학교 때 가운데 가르마를 타시고 바람머리를 흩날리시던 남자 체육선생님께서 귀여워라 하시며 복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다. 통뼈 언니와 복어인 나는 엄마가 여자아이라고 관리에 들어가셨던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의 남아선호 사상에 입각하여 오빠 우선주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암튼 오빠에겐 음식에 있어서는 프리패스권이 있었고, 우리 자매에게는 늘 제한시간이 주어졌었던 걸로 기억된다.
“구하라 그리하면 구할 것이고,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 참으로 매력적인 성경구절이다. 다행히 우리 삼 남매는 여느 남매들보다 우애가 좋았고 셋이 노는 것을 제일 좋아했던 찰떡 남매였다. 우린 그런 프리패스권이 있는 오빠를 앞잡이로 내세워 우리의 욕구와 식욕을 채워나가기 급급했던 것 같다. 오빠는 또 기꺼이 자원봉사를 하듯 우리의 앞잡이가 돼주었다. 9시 뉴스가 끝날 무렵이면 맞벌이 사업가셨던 부모님은 다음날 출근을 위해 방으로 10시가 채 되기 전에 자리끼 물을 들고 들어가셨고,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공부(?)를 하면서 귀를 안방 쪽으로 쫑긋 세우고 있었다. 엄마 아빠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코를 골면 램수면에 들어가셨다는 신호다. 42평 아파트에서는 안방에서 코를 골면 건넌방에 살짝궁 소리가 들리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 방을 같이 나눠 썼던 언니와 나는 10시가 지나 안방에서 인간적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스멀스멀 망을 보고 조용히 문소리가 나지 않게 방 문을 열고 복도 건너편 오빠 방으로 스며들어 사인을 보낸다. ‘오빠 지금이야.... 배 고픈 거 맞잖아.... 시작해야 해...’. 오빠는 나름 눈치가 빤한 사람이어 다행이었고, 우리는 마치 대단한 음모를 꾸미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부엌으로 침투하곤 했다. 통뼈 언니는 라면 물을 적당히 냄비에 받아서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오빠는 섬세한 손길로 봉지라면을 뜯다가 바스락 소리에 엄마 아빠가 깨기라도 할까 봐 가위를 이용해서 오픈하는 치밀함을 보이며 만반의 준비를 완료한다. 그래도 삼 남매 중에 음식에 손재주가 있는 나에게 마지막 셰프의 손길을 오빠 언니는 기다리고 두둥! 수프를 물에 푸는 순간 우리 셋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냄새의 흐름이 우리의 머리를 쭈뼛 서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해피엔딩을 상상하며 건더기 수프에 이어 면을 사등분으로 갈라서 넣는다. 라면을 왜 아작을 내어 넣느냐고 호로록 명인들은 불편한 기색을 표현하겠지만 다 뜻이 있는 움직임이니 이해해 주셔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면이 길어서 호로록 소리가 너무 크게 나면 들킴의 단초를 만들까 해서 우리만의 면부수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꼬들한 면을 좋아하는 오빠도 야식으로 몰래 먹는 라면만은 푹 끓여서 호로록 소리보다는 안전하게 완라(완전하게 한 그릇 뚝딱하는 라면 한 그릇)를 할 수 있게 했다.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푹 익은 라면이 거의 완성될 즈음 우리는 찬밥 한 공기를 넣어 국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한번 더 끓여주고 나면 준비 완료다. 몰래 먹는 야식에 김치나 젓가락질은 호사스러운 움직임에 불과하다. 우리는 숟가락 세 개를 삼각형 꼭짓점으로 60도 각도에 맞춰 정렬해 놓고 전투적인 눈빛으로 라면밥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 들어는 봤는가? 숟가락라면! 면을 먹다가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여유 따위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고 기민한 동작으로 모든 것을 순식간에 해치워야 했기에 우리셋만의 생존라면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호호 불어가며 식힐 여유도 없이 입을 데이는 것쯤은 라면밥을 먹을 수 있는 대가를 마땅히 치르는 것이라 받아들이며 정수리를 부딪히며 콧등에 땀이 맺히게 먹는 우리에게 그 순간만큼 다른 행복을 비할 데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김없이 마지막 두어 숟가락을 남기는 순간이 오면 달그락달그락 거친 소리를 내며 안방 문이 열렸고, 언니랑 나는 오빠를 앞세울 수 있는 위치로 후다닥 자리를 바꾸려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라면 냄새가 안방까지 흘러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고 엄마가 몰랐을 리가 없었는데 꼭 클라이맥스에 엄마가 문을 열고 나오셨던걸 보면 아마도 우리가 다 먹을 때까지 얼추 기다리다 뒷정리를 해주며 한 소리 핀잔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시려 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이제야 든다.
엄마에게 현장범으로 잡히는 순간에는 이럴 거면 그냥 당당히 호로록 라면으로 끓여먹고 들킬걸~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다음에 또 야식타임이 되면 똑같은 라면밥을 끓이며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때 라면도 즐겼지만 키득거리며 먹던 순간의 추억을 같이 먹고 있었나 보다. 삼 남매가 라면 두 봉 지도 아니고 꼭 한 봉지를 가지고 정수리를 모았던 건 아마도 우리의 배를 채우는 것보다 형제애를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4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는 가끔 라면 얘기를 하면서 고개가 뒤로 떨궈질 정도로 웃고 또 웃으며 그 순간을 기억한다. 지금 또 그런 라면밥을 끓여 먹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