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가난한 화가
1956년 9월 9일.
이중섭이 무연고 시신으로 방치된 지 사흘 뒤, 그의 벗들은 시신을 수습한다. 밀린 병원비 18만 환 중 9만 환을 겨우 내고 나서 말이다.
죽음도 가난했다.
교과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근대 화가 '이중섭',
책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에서 접한 이중섭은 아내의 발가락까지도 사랑스럽다고 한 남자였다. 전쟁과 가난을 피해 일본 친정으로 보낸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편지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지리한 삶에서 이중섭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전시회만 마치면, 전시회에서 작품만 팔린다면..'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희망대로 작품은 팔렸다. 하지만 성황리에 마친 전시와 달리 팔린 작품의 대금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다.
그는 절망했고 절규했다. 그리고 희망으로 미뤄왔던 채무가 그를 삽시간에 덮쳤다.
희망의 이면에는 절박이 있다.
그는 절박했다.
대학교 4학년, 두 번의 암수술로 어머니는 편찮으셨고 우리 집은 절박했다. 아버지에게 등록금을 받는 게 죄송해 전화를 끊고 몇 번인가 울었다. 근로장학생도 했는데 그 시간에 공부하라며 머리를 콩-찧으셨다. 4학년이 단번에 임용시험을 봐서 붙는 경우는 희박했다. 그런데 나는 졸업 후에 집의 지원받을 염치가 없었다. 일하며 공부하는 건 더 자신 없었다.
그래서 1년 동안 절박한 마음으로 희망을 꿈꿨다. 숨을 들이마시고 긴 잠수를 하듯 공부를 했다.
뽑는 인원은 단 2명, 교실을 빼곡히 채우고도 넘치는 응시생들과 1차 시험을 마쳤다. 2 배수, 1.5 배수.. 조여 오는 압박감과 독서실의 비워지는 자리들을 보며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3차 시험은 3일을 봤다. 그리고 3일 동안 시험이 마치는 대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다녔다.
그 후 손발이 차가워지는 계절이 다가오면 임용시험을 보는 악몽을 다시 꾸곤 했다. 시험장에서 나는 허둥대며 시험을 망치거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내 마음에 다정이 차오르니 이제 더 이상 악몽은 꾸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업 준비로 보게 되는 이중섭의 그림은 애달프다.
절박은 사람을 궁핍하고 치졸하게 만든다.
자전거 한 대는 사줄 수 있는 아빠가 되려 했던 이중섭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늠되기에 그가 그린 그림은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