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옥현 Oct 23. 2021

맘 속의 흉터

6학년

   대학생이 된지도 1년이 다 되어 간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자주 만나고 지내는데 중학교,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특별한 관계가 아니고는 자주 만나지 못한다. 대학에 처음 들어가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등학교 절친들도 자주 만나기는 힘들다. 그러던 그즈음, 겨울방학이 시작될 즈음 초등학교 6학년 동기가 연락이 왔다.

   "승우야. 너 나 기억나냐? 오랜만이지? 나 형우야. 우리 OO초등학교 6학년 동기 모임 한 번 하려는데 너 시간되냐?"

   얼떨결에 아 오랜만이다 하고 언제 어디서 하느냐고 묻고는 알았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 맞는 겨울방학에 별 계획도 없이 뒹굴다가 갑자스런 연락에 참석을 하겠다고 했다. 물론 안 가도 그만이지만 별로 할 일도 없고 오래전 친구들 얼굴이 기억나고 그간 다들 잘 지냈는지 약간 궁금하기도 해서 가겠노라고 했다. 6학년 동기 중에 꾸준히 연락하고 지낸 친구는 없다. 하지만 날 기억해서 연락을 준 형우가 고마웠을 뿐만 아니라 이사도 했는데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도 궁금하다. 전화번호는 안 바뀌었던 걸까?

   그러나 아주 반갑지만은 않았다. 마음 한 켠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혹시 담임선생님도 나오시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였다.


   며칠 뒤, 모임 장소로 갔다. 시내에 있는 중심가에 모 맥주집을 통째로 빌린 것으로 보였다. 지하에 있는 작은 집이었고 차분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이미 8-9명 정도 와 있었고 앞으로 5-6명이 더 올 거라고 했다. 눈에 익은 친구들도 있고 많이 변해버려 낯 선 친구들도 있었다. 여자애들도 3-4명이 왔다.

   한 덩치 하는 찬호는 벌써 식당 사장이 되어 있었다. 명함을 돌리며 하는 말이

   "어이 친구들 오랜만이네. 다들 대학 잘 들어가고 잘 지내는가? 나는 일치감치 사업하기로 했어. 다들 저기 네거리 알지? 그 네거리 바로 옆에 있는 식당이 내가 운영하는 식당이야. 자주 와. 내 특별 서비스해 줄테니까."

   담임 선생님은 안 오시는지 궁금했다. 결국, 형우에게 물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 후로 다른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오늘 못 오신다더라. 연락을 해보긴 해야 할 거 같아서 했는데. 그보다 우리들 모임이 더 중요하쟎냐? 신경 쓰지 마라"

   형우는 나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한편으로는 나와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안 보는 게 더 낫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 놓은 음식에 맥주를 들면서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샌님 같은 장하는 여전히 인텔리 같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어 어 반갑다. 그래 잘 지냈지?"하고는 소심하게 맥주를 홀짝거렸다. 장하는 6학년 때 공부도 잘했지만 서울로 못 가고 지방대 평범한 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6학년 6반이었던 우리 반 인원은 70명에 육박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남자가 많아서 남녀 짝꿍을 못하고 남자끼리 짝이 되기도 하고 교실 뒷 벽까지 책상을 놓아야 했었다. 난 별로 키가 크지는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랑 짝꿍이었다. 그 친구는 오늘 나오지는 않았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있었고 잘 웃고 약간 멍청해 보이기는 했으나 착하고 온순했다. 그 당시에 맨션에 살았으니 잘 사는 집 아들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그 친구 소식을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형우는 모임을 주도하면서

   "자 다들 주목! 우리가 6-7년 동안 연락 없이 지냈는데 앞으로는 자주 보자. 6-7년 만에 많이 진로가 달라지긴 했지만 우리 6학년 때 추억도 많잖아. 자 건배!"

   우리는 모두 잔을 높이 들었다. 형우는 깐돌이라는 별명답게 자그마한 체구에 날렵하고 항상 머리 회전이 잘 되는 스타일이었다. 분위기를 잘 주도하는 윤활유 같은 스타일이고 여자애들한테도 인기가 많았다. 재수 중이라고 했다.


   은숙이는 6학년 때 키가 제일 컸던 여자애였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중에 키가 제일 작은 축에 속했다. 키는 더 크지 않았지만 그 당시 가지고 있던 카리스마는 더 커진 듯했다. 은숙이는 한의사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여전히 밝고 활달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호는 키가 정말 많이 컸다. 6년 전에는 나보다 작았는데 지금은 나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경호는 서울의 명문대 경영학과에 다닌다고 했다. 다들 부러운 눈치였지만 우린 맥주 한 잔에 옛 기억들로 무장하고 기분이 들떠 있었다.

    누군가 물었다. 담임선생님은 안 오시나? 야 너희들 담임선생님 기억나냐? 우리 때 임신했었잖아. 졸업식 할 때까지 출산은 안 하신 걸로 아는데 그 뒤 소식 아는 사람 없냐? 형우는 그 뒤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지금은 다른 지역에 계신다고만 했다. 갑자기 소환된 담임선생님에 대한 얘기들이 터져 나왔다. 은숙이가 말했다.

   "야 니들 우리 전부 봄소풍 갔다 와서 도로 학교 가서 전부 다 우울했던 거 기억나니? 반장이 소풍 때 담임 점심을 부실하게 사 가지고 왔다고 담임이 쪽팔린다고 우리 모두 다시 교실로 집합시켜서 한참동안 말도 안하고 우리를 째려보고 공포분위기 만들었잖아. 그때 반장이랑 내가 친했는데 그날 반장이 내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너희들 아무도 모르지?"

   그랬다. 기억난다. 우린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소풍을 끝내고 다른 반은 다들 흩어졌는데 우리 반만 교실로 집합하라고 했다. 소풍 끝나고 교실에 다시 들어가기는 그날 이전, 이후 통틀어 유일했다.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째려보셨다. 다른 반은 다들 도시락에 먹을 거 잔뜩 가져와서 주는데 자기는 너무 초라했다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에게 반성을 요구했다. 그때 반장은 여자 애였는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우린 아무도 반장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장하는 맥주 한 잔 한 김에 벌건 얼굴로 힘겹게 한 마디 했다.

   "난 좀 쪽 팔린 기억이 있다. 사실 오늘 담임샘 나오신다고 했으면 안 왔을 건데 형우가 안 나오신다고 해서 나오긴 했다만. 옆 반에 데리고 가서 완전 쪽 팔린 기억이 있다."

    당시 우리 교실은 3층에 있었고 교실과 복도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어서 모두 실내화를 신고 다녔다. 건물 맨 끝에 있었던 우리 반은 건물 끝에 있는 계단을 청소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계단은 시멘트로 되어 있었고 외부였다. 당시 규칙은 1층 계단 입구에서부터 실내화를 갈아 신고 올라오게 되어 있었다. 계단 청소를 맡고 있었던 우리 반은 청소 담당이 실내화를 갈아 신고 올라오는지도 감독해야 했다. 하지만 가끔 말 안 듣는 사내 애들은 아침 등교할 때 실내화로 갈아 신지 않고 냅다 뛰어 올라가는 애도 있었고 우린 그런 애들을 붙잡아 적발해야 했다. 그날도 옆 반 2-3명의 애들이 뛰어올랐고 샌님 같은 장하는 붙잡을 수도 없었지만 분에 못 이겨 울그락 불그락 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에게 알렸고 선생님은 누가 그랬냐며 옆 반으로 장하를 끌고 갔다. 누구냐고 지목하라고 했고 장하는 이제 거의 망가질 대로 망가진 얼굴로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까지 상기되어 겨우 팔을 뻗어 두 명을 지목했다. 그 애들은 가볍게 주의를 들었을 뿐이었지만 장하는 이미 참담한 심정이었다. 장하가 참담해진 건 담임선생님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장난치는 분위기로 장하의 팔을 잡아 데리고 갔던 것이다. 옆 반에서도 옆 반 담임에게 웃어 보이면서 재밌다는 듯이 제스처를 보이셨다. 나는 어렴풋이 기억난다. 장하가 완전 풀이 죽어 담임과 교실로 돌아오던 그 모습이. 장하는 거의 유치원 애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장하에 대한 기억이 샌님이라고 굳어진 것이 그일 이전부터였는지 그 이후였는지 잘 모르겠다.


   "자 자 옛날 일은 지나간 일이니 잊어버리고 한 잔 하자. 다음번 모임은 우리 식당에서 하자. 내가 한 턱 내께"

    찬호는 일찌감치 공부에 소질이 없는 걸 알고 아버지가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의 분점을 내주셨다고 한다. 우리 모두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능력을 갖춘 찬호에게 찬사를 보내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으나 담임선생님에 대한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경호는 상기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사실 경호의 기는 나와 같이 경사건이라 무조건 동감하는 얘기다.

   "야 니들 여기 있는 애들 중에 잘 기억 못 하는 애들도 있겠지만 사실 승우나 나는 몇 번 했던 얘기다. 물론 관심 없는 애들도 있겠지만. 승우도 의대 들어갔고 한데 우린 사실 6학년 때 시험성적이 이상해서 아무한테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성적이 이상하면 와서 확인해보라고 해서 나갔다가 무안만 당했는데 니들 기억나냐?"

   5학년 때 전학 온 나는 시험공부란 걸 하게 되었고 시험 성적을 잘 받아 엄마에게 칭찬받는 게 하나의 낙이었다. 그런데 6학년이 되어 언젠가부터 갑자기 성적이 내가 예상한 것보다 낮게 나왔다. 그때는 선생님이 모두 채점을 하고 우리에게 점수만 알려주셨다. 사실 초등학교 시험이 다들 그 수준에 맞게 나오겠지만 그 당시 내 수준에 어느 정도 점수는 예측이 가능했다. 내 짝꿍은 항상 만점을 받았다. 어느 날 수업 시간 끝날 즈음에 선생님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중 아무도 묻지도 않았던 시험 성적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굳은 표정과 말투가 너무도 선명히 기억난다.

   "시험 성적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여기 캐비닛에 시험지가 있으니 확인을 원하면 와서 자기 시험지 봐도 돼!"

   우리는 웅성거리고 머뭇거리다가 순진한 마음에 경호와 나 그리고 3-4명 더 되는 애들이 선생님의 책상 앞으로 갔다. 당시 선생님의 책상과 캐비닛은 교실 앞 좌측에 있었다. 쉬는 시간이라 다른 애들은 떠들고 쿵쾅거리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어찌 된 게 내가 맨 앞에 서게 되었다.

   "샘, 저 시험지 좀 볼 수 있어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내가 왜 제일 앞에서 순진하게 그 말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후회가 몰아쳤고 어쩔 줄 몰라하는 내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고 나는 하루 종일 선생님을 쳐다볼 수 없었다. 선생님은 앉은 채로 고개만 살짝 돌리면서 눈을 치켜뜨고

   "꼭 봐야 되겠나?"

   우린 모두 뒷걸음치고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 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우린 단 한 번도 자기 시험지를 볼 수 없었다.

   나는 졸업식 때 반에서 다섯 명이나 타는 우등상을 타지 못했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 때 배치고사에서 반에서 1등으로 배치되었다.


   잘 아물어 나을 수 있는 상처를 주신 데 대해 감사한다. 자그마한 흉터로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물지 못하는 상처가 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진물이 베어 나오는 상처가.



사진; 픽사베이


작가의 이전글 쥐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