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느지막한 시간에 눈이 떠졌다.
‘왜 이렇게 피곤한 거야…’
날짜를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어느새 유럽에 온 지 6일 차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 유명한 90년대생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5일을 일하면 이틀은 무조건 쉬어 줘야 했다. 여행을 하면서 무슨 소리냐고? 여행도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일이지 않은가? 암, 암, 캠핑카 운전이 쉬운 일은 아니지. 마트에 가서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신중히’ 고르는 것도 일이고, 돌아다니느라 이곳저곳 걸었던 것도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당초에서는 캠핑카를 몰아 오스트리아로 떠날 계획이었다. 뮌헨에서 볼만한 것들은 다 본 터라 이제 딱히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내 몸뚱어리는 우리의 계획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5일 동안 열심히 일을 했으니 이제 좀 쉬자고’,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면 분명 산길일 텐데 얼마나 힘들겠어?’, ‘네가 과연 할 수 있을 거 같아?’라고 내 정신을 설득하는 것 같았다.
‘그래, 모르겠다. 하루 더 쉬지 뭐’
어차피 3개월 동안 하는 여행이잖아. 하루 늦게 떠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거라며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마침 그날따라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독일에 온 이후로 계속 흐리고 쌀쌀했는데 그날 아침부터 어두웠던 하늘도 개어 따사로운 햇살을 맛볼 수 있었다.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온몸을 꽁꽁 싸맸던 패딩은 벗어던지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밖을 나섰다.
캠핑장 옆을 흐르는 천을 따라 산책하던 중 저 멀리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여기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가까이 가 보니 사람들 손에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잔이 들려 있었다. ‘비어가든’이라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맥주를 마시는 정원이었다.
“독일은 맥주의 나라라더니 진짜 맥주를 물처럼 마시네”
“이게 바로 진짜 독일의 문화구만”
“너무 맛있겠다”
혼잣말하듯 여자 친구에게 말을 꺼냈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하지만 한국 맥주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카스의 밍밍한 맛을 너무도 싫어하는데 그 반대편에 있는 게 바로 독일 맥주다.
그중에서도 독일의 밀맥주는 그 진한 맛과 특유의 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내가 밀맥주를 팔고 있는 비어가든을 마주한 순간 어땠겠는가? 당장 그곳으로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미친 듯이 들었다.
그러나 산책을 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차마 여자 친구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자리는 이미 만석이기도 했고. 아쉬움을 삼키고 산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캠핑장으로 돌아가는 길, 두 번째 비어가든을 마주쳤을 땐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비어가든과는 다르게 자리도 남아 있었다. 옳다구나 싶었다.
“레이첼, 저기 들어가자! 응? 가자 가자. 제발~”
다행히 여자 친구는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사실 여자 친구는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일 년에 두세 번 마실까 말까 한다. 여자 친구와 술을 마시면 진솔한 얘기를 나누는 게 로망인 나로서는 아쉽다 못해 서글플 정도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억지로 먹일수록 없는 노릇이기에 에이, 슬프다 슬퍼. 이렇게 술을 즐길 줄 몰라서야… 투덜대면서 어쩔 수 없이 나 혼자서만 맥주 한 잔을 시키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날은 여자 친구도 자기 맥주를 한 잔 따로 시키는 것 아니겠는가. ‘오, 웬일이래’ 아무래도 비어가든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 한 잔. 여자 친구 한 잔. 그리고 안주로 독일식 피자 한 판을 주문했다.
‘캬~ 바로 이 맛이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첫 모금은 기가 막힌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어서 안타까울 지경이다. 며칠 동안 독일에 있었지만 시내만 돌아다니는 통에 식당에서만 맥주를 마신 게 전부였다. 물론 그 맥주들이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곳, 비어가든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관광지가 아니라 진짜 현지인들만 오는 장소 같달까. 독일 맥주 문화의 정수와 같은 이 장소에서 내가 사랑하는 밀맥주를 마시게 되다니. 행복하다 못해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겨우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그만 취해 버리고 말았다. 이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엔 한 잔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라고 내 머리는 생각을 했지만 내 몸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대로 캠핑장으로 돌아가 침대에 머리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최소한 두 잔은 마셔야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어그러졌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루였다. 게으른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신나는 날을 보냈으니. 피곤하지 않아서 오스트리아로 떠났다면 인생의 아주 큰 행복을 놓칠 뻔하지 않았나.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다 보니 예기치 않는 곳에서 만나게 되는 우연, 그리고 그 우연이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행복. 일상에서 계획대로 살지 않는다는 건 옳지 않은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행에 있어 나태해진다는 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장점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애초부터 여행 계획을 빡빡하게 잡아 놓지도 않았지만 나름 매일 할 것들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게으름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깨달아 버렸는데 어찌 계획대로 살리요. 여행 중간중간에 쉬는 날을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래도 너무 많이 쉬는 것도 그러니…
그래, 앞으로의 여행은 주 5일제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