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 씨의 책 이야기
나는 엄마의 말뚝을 읽고서 한동안 가슴 깊은 곳의 먹먹함과 여운이 감돌았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현대까지 그것은 비단 주인공 한 개인의 집안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아픔과 공감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는 우리 엄마 아니, 우리 할머니 시대쯤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 엄마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 시절의 엄마가 그러하듯 우리네 엄마들은 온갖 모진 고생을 하시면서도 오직 자식을 위해 참아내셨다.
또한 소설 속에서 ‘신여성’이라는 부분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신여성!’ 소설 속의 엄마는 여성의 지위에 지각이 있으셨던 것 같다. ‘신여성’은 단지 외모뿐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사람,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집도 다른 많은 집들처럼 아들을 차별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딸이지만 장녀인 나에게 기대하시고 기대셨다. 그래서 나는 집안의 기둥 역할을 실제로 하였다. 진정한 신여성이란 무엇일까? 요새 ‘페미니즘’, ‘페미니스트’가 화두가 되고 있다. 단지 과거의 오랜 역사 속에서 남성의 지배 속에 있던 여성의 반향과 저항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기본권을 부여받고 동등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배울 수 있는 권리, 인간 존엄성의 권리를 가지고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구현할 수 있는 남과 여의 구분이 아닌 참된 지식인으로서 말이다. 나는 ‘신여성’일까?
엄마의 말뚝 3에서는 엄마의 7년간 더 지속되는 투병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엄마도 연세가 많이 드셨고, 큰 병으로 수술을 하셔서 더욱 실감이 되었다. 소설 속의 강하셨던 엄마도 약해지시고 죽음을 맞으신다. 죽음 후에도 유언과 같이 오빠처럼 화장을 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공원묘지에 묻히게 된다. 묘지에 엄마의 또 하나의 말뚝이 있다. 정식 비석이 오기 전 성함이 적힌 말뚝이었다. 어쩌면 엄마의 마지막 말뚝일 것이다. 엄마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 딸의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대한 엄마의 위로를 엄마의 이름에서 찾는다. 맑을 ‘숙’ 자가 아닌 잘 ‘숙’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