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자작나무숲의 시
쭉쭉 뻗은 나무가 떠올랐다. 크게 망설임 없이 떠났다.
마을에서 숲까지는 수십 년간 공간을 이뤄낸 나무들 그늘이 내 몸을 안는다. 널찍한 임도 가에는 초롱꽃들, 산딸기 덩굴, 키 큰 엉겅퀴들이 초롱초롱 자기 색을 낸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검은 오디를 따먹으니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시간을 잊어버린다. 길에서 만난 소리들로 가슴을 채운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결나무잎소리, 구름소리, 소리 없는 내 마음소리. 어느새 자작나무숲 입구다.
산허리를 감는 오솔길을 따라 갈수록 은빛 세상은 점입가경. 은빛 찬란한 숲의 왕국에서는 언제나처럼 새들의 부름이 이어지고 바람이 수런수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시를 벗겨내는 듯한 은빛 두루마리 시심이 나에게로 오도록 살포시 보듬어 본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산비탈과 계곡을 걱정 없이 무서움도 잊은 채 걸어간다. 큰 물이 쓸고 간 흔적이 보인다. 그래도 끄떡없이 굳게 곧게 하늘을 향한 푸르른 잎새들은 저 먼 공간에 자신들의 마을을 이루어 바람의 소리를 전하고 구름의 소리를 받아내어 삼십 년 시간을 키워냈다. 그 아래 앉아 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이들이 뿌리내리던 그때 나의 이십 대 청춘은 정의로움을 향한 열망으로 팔을 뻗어 올렸다.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가고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키를 키워가던 사이, 나의 삼사십 대는 아이를 키우며 오로지 나은 삶을 위해 몸부림쳤고, 이제 자기 세상을 이룬 자작은 숲을 이루어 그 그늘을 드리우는데, 세상 일에서 빗겨 난 나는 그 아래에서 지친 나를 잊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다.
숲을 이룬 나무들은 이웃마다 틈을 내어 놓았다. 그들마다의 공간이겠다.
우리는 얼마나 틈 없이 살고 있는가. 잠시도 놓아두지 않는다. 하루 중 오롯한 자기만의 틈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사람도 그 틈만큼 마음의 틈새를 찾아 편안히 숨이 쉬어지도록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한다.
자작나무들이 내어 놓은 틈 사이로 햇빛이 춤을 춘다. 눈부시게 고개를 치어들고 스적이는 이파리들의 흔들림을 본다. 고맙기만 하다. 나무의자에 누우니 나무들은 나의 시선을 주욱 끌어올린다. 높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공간이 거기 있다. 그 아래 한 점으로 누운 나. 아늑함에 싸여 잠들고 싶다.
숲을 나오는 내 무게는 자작나무잎 하나 정도이지 않을까.
마을까지 차를 태워줄 할까 하는 관리차량인의 말을 거절할 정도로 가볍고 상쾌하다. 임도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려오는 길에서는 유난히 기린초가 많이 보인다. 올라가면서는 못 보던 거 내려오는 길에서 보았네라는 시를 곱씹어 본다. 도로정비 표지를 보니 자기 터전을 잃게 될 야생화들이 참 안되어 보인다. 내려오는 내내 마음이 쓰여 기린초 한 포기를 담는다. 기린초의 꽃말은 '소녀의 사랑'이란다. 설핏 웃음이 난다. 노란 꽃평지가 왜 그리 눈에 밟히는지.
오늘 하루 내 마음의 틈새도 차츰차츰 많아지고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