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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아나무 Apr 09. 2024

목련꽃 피고 지고

목련과 나

우리 집 뒤 교회 마당에는 수형이 아름다운 목련나무 한 그루가 있다.

꽃그늘 아래서 읽을 편지는 없어도 필 것은 피고, 올 것은 왔으면 좋겠는데, 목련은 더디기만 하다. 오며 가며 쳐다볼 때 '넌 언제 필래? ' 말 걸어보지만 대답이 없다. 그러더니 한 나흘 전부터는 놀란 듯이 봉우리를 다 열어젖혔다.


순백의 나무 연꽃은 가지마다 하얀 접시를 빼곡히 얹어놓은 것 같다. 밤이면 흰 등불을 밝혀 놓은 듯도 하고, 밤눈이 밝다는 흰 올빼미 같기도 하다. 합장하듯 오므린 두 손이 활짝 펴지면, 무엇을 저렇게 떠받치고 있나 싶어 위를 쳐다보게 된다. 그 손바닥 위에는 파아란 봄하늘 그리고 하얀 솜구름이 떠 간다. 들뜬 마음은 봄으로 충만해지고, 목련이 피어야 비로소 '진짜 봄이지'라고 한다.


이런 목련도 한때 나에게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일도 많고 책임도 많던 40대 중후반, 자린고비로 생활을 이겨내던 그 시절은 봄이면 유독 더 힘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음을 알지만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서성이던 봄밤, 아파트 한편에 밤을 밝히고 선 활짝 핀 목련나무 아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는 이리 괴로운데, 너는 어째 아무 괴로움도 없이 환하니. 사람이라고 열심히 살아도 내가 너보다 나은 게 없구나.'

남에게 들킬세라 누가 오면 슬며시 등을 돌렸다. 남몰래 우는 소리 없는 눈물만큼 서러운 게 또 있을까. 목련을 보면 그 시절의 나와 봄을 견뎌낸 우리의 시간이 보인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남편은 목련을 좋아했다. 마당 있는 집을 짓고 나서 제일 먼저 목련을 심자 했고, 그다음으로 단풍나무와 산수유 등을 골랐다. 하얀 목련이 참 좋다며 들떠했는데, 나는 흰 목련 대신 산목련을 심자고 했다. 그 시절의 봄밤, 홀로 울며 서성이던 일이 나 자신에게 남아, 부끄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얀 목련을 심었어야 했다. 그래야 우리 집 목련 아래서 아픔도 웃으며 기억하고, 먼저 간 사람에게 그리움 더 보태어 꽃소식 전해줄 텐데. 까다로운 산목련을 무진장 애를 써서 살려낸 내 마음을 알려나.



목련의 피고 짐은 담백하다. 멀리서도 한 눈길을 끌어당기지만 봄을 오래 잡아두지는 않는다. 

큰 꽃잎을 달고도 조용하더니, 개화 뒤 네닷 새가 지나면 조용히 한 잎씩 두 잎씩 꽃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한꺼번에 작별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에게 이별의 미련을 남기지 않도록 한다. 긴 작별 동안 마음에 준비를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백이나 무궁화가 꽃송이를 말아 통째로 떨어져서 단번에 깔끔히 작별을 해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갑자기 당한 이별은 여운보다는 미련과 아픔을 주기도 한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

     -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최영미--


돈오돈수(頓悟頓修) 같은 동백의 낙화와 오고야 마는 사람의 이별의 상태를 잘 대비시킨 시이다. 아마도 최영미 시인은 선운사의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애를 써도 남아 있는 서늘한 아픔을 도리없이 자책했을 것이다. 잊는다 해도 사람의 이별은 어떤 식으로든 오래 남는다. 

그러니 이별을 해야 한다면 동백꽃 아래서는 하지 말기를. 차라리 목련꽃 아래서 미련조차 이별하기를.




목련이 떨궈낸 한 잎 한 잎 꽃잎은 커다란 눈물방울 같다. 잔잔한 꽃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할 처연한 눈물방울들이 나무 아래 흙빛으로 짓물러지고 있다. 어떤 이는 이를 지저분하다고도 하지만, 달리 보면 새롭게 보인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아름다웠던 한때가 지금은 거름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덕분에 어느새 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연둣빛잎이 올라오고 있다. 꽃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목련은 부지런히 제 계절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니 사람과는 달리 참 엄정하기도 하다. 

목련이 피고 지는 어제, 오늘, 내일이 내가 살아가는 시간. 그래서 나도 시간에 눈을 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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